소설리스트

12시간 뒤-150화 (150/198)
  • # 150

    본 게임을 위한 대비(2)

    나는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검은색 새 인간 코스튬을 입은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염세적이고 파괴적인 영화를 찍어 버드맨 피닉스의 부활. 여드름투성이 애들이 질질 쌀 거야 전 세계 10억 달러는 거뜬해 넌 위대한 배우야 따분하고 비참한 일상에서 사람들을 구해주잖아 사람들이 놀라고 웃고 지리게 만들지.”

    “크으...”

    나는 그걸 보며 감탄을 질렀다. 내 개인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이 영화는 2014년작 ‘버드맨’.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작품상 시상작이다. ‘최우수 작품상’답게 상업영화보다는 예술영화에 더 가깝지만 왠지 나는 이게 볼 때마다 새롭고, 재밌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아영이도 비슷한 생각인가 보다.

    “이거 왠지 재밌다. 무슨 이야기 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응 나도 이 영화 한 5번은 봤는데 메시지를 다 읽지는 못하겠더라고. 다만... 볼 때마다 늘 새롭고 신선하고, 놀라워. 이걸 보고 작품성이라고 하는 걸까?”

    “흐음”

    그런데 그러던 중,

    ‘띠링’

    내 휴대폰에 문자가 하나 왔다. 박 비서 문자다.

    ‘사장님. 대표님들 모두 모이셨습니다.’

    나는 이어서 우측 상단의 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 20분.

    ‘약속시간은 오전 11시인데... 40분이나 일찍들 오셨군...’

    마지막 온 사람도 40분 빨리 왔다는 소리. 오늘 아침에 아영이와 영화를 보려고 분명 천천히 오라고들 했는데, 다들 일찍 왔다. 10분이라도 먼저 얼굴을 내밀어야 내가 예쁘게 봐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일종의 충성경쟁이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하는.

    ‘어쩐다? 원하시는 대로 기다리게 해드려? 아니면... 내려가 봐야하나? 아이 좀 일찍 오지 좀 말라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영이의 허벅지를 탁탁 치며 말했다.

    “나 내려 가야할 것 같아. 나머지 혼자서 봐.”

    “응? 벌써?”

    “응 벌써. 다른 사장님들이 벌써 왔댄다.”

    “그래? 그럼 도와줄까?”

    “아니야. 넌 영화 봐. 옷만 입고 내려가면 되는데 뭘.”

    “음... 그래 오빠.”

    개인극장에서 나온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옷 방 안으로 까지 들어왔다. 옷장에 걸려 있는 와이셔츠 수 십 개 중 하나를 골라 입고, 바지를 집고 넥타이를 메고 자켓을 걸쳤다. 그런 다음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창밖으로 눈이 오는 것을 보고, 긴 외투도 하나 걸쳤다.

    일종의 코스프레로. 집이랑 회사랑 같은 곳에 있어서 밖에서 눈 맞을 일은 하나도 없지만, 계절에 맞게 맞춰서 입고 나가는 것이다. 옷을 다 입은 나는 휴대폰을 들어 박 비서에게 전화를 했다.

    “응 나 내려갈게.”

    “지금 내려오시게요?”

    “응 다 모였다는데 나도 가서 농담 따먹기라도 하지 뭐.”

    “네 사장님.”

    통화를 마친 나는 다시 옷 방에서, 침실로 나와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로 온 다음, 하강 버튼을 눌렀다.

    *

    “그럼 하반기 정례보고를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장 부사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짝짝짝짝짝짝!’

    일동의 박수가 이어진다. 나는 슬쩍 좌우를 훑어보았다. 현영제약 신재은 회장, OH엔터 권오혁 사장, 오라클뉴스 정소영 대표, 퓨처싱크 지강현 CEO, 블루E&M 김정균 사장, 그리고 최근 이 자리에 모이게 된 창해식품 우해진 사장과 송원양조 구본길 사장까지. 다들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다.

    ‘음...’

    나는 잠시 그걸 지켜보았다. 그리고 박수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내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나는 이어 말했다.

    “다들 잘하시고 계시지만, 제가 몇 가지만 요청하고 싶군요. 먼저 OH엔터, 지우엔터 권오혁 사장님.”

    자신이 제일 첫 번째로 불릴 줄 몰랐는지, 권오혁 사장은 급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 네. 사장님.”

    “나인 테일 중국 재진출을 하려고 한다고요?”

    “네. 사장님. 이제 슬슬 한한령도 거진 다 풀리는 분위기고 이제 제대로 한번 빅 점프를 해보려고 합니다.”

    ‘음...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나는 내 앞에 있는 보고서를 들추며 말했다.

    “근데 한중합작 법인을 세우려고 하신다고요?”

    “네 중국 내 꽌시를 뚫으려면 아무래도 중국 분들하고 같이 일을 해야 해서, 필수 불가결한 일입니다.”

    ‘꽌시’란 중국말로 ‘인맥’. 사업상으로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산당과의 인맥을 뜻했다. 모든 사업이 그렇지만 특히 연예사업은 사람가지고 하는 일이라, 공산당 눈치를 많이 봐야만 했다. 혹시나 밉보이면, 사업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중화권 수입 제 1위 스타, 판빙빙도 순식간에 훅 가고 그런 곳이니까. 한국 엔터 업체는 중국 현지인과 합작을 하지 않으면 진출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권오혁 사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합작법인 설립이... 내년 4월.”

    “네.”

    “이건... 조금만 늦추는 게 어떻겠습니까? 9~10월정도로요.”

    “9월이요? 그런데 그러면 저희 애들 일정하고 안 맞는데...”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10월 정도로 미루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내 옆에 있던 권오혁 사장은 살짝 놀란 눈치다. 여태 비즈니스에 대해 내가 이래라 저래라 딱히 뭐라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본격적으로 경영에 개입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권오혁 사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사장님. 저희 쪽 신용을 생각하면...”

    그는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 눈치다. 그럴 만도하다. 최근 들어 한한령이 해제되면서 OH엔터, 지우엔터 소속 연예인들이 다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었으니까. 한중합작 법인을 만들면 완전히 신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분명히 말했다. 권 사장과는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지만, 그래도 비즈니스에서는 그렇게 사람 봐가면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생각에는 내년 9월정도로 미루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본심을 이야기했다.

    “내년 초 즈음에는 조금 금융시장이 불안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권 사장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장님.”

    그는 야심차게 준비한 사업이 미루어진다는 생각에 조금 시무룩해보였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그도 알게 될 것이다. 나 덕분에 위기 하나 피해갔다는 것을. 나는 이어서 창해식품 우해진 사장에게도 말했다.

    “우해진 사장님?”

    “네.”

    “그 중국 내 냉동식품 생산 공장 매입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네 사장님.”

    나는 보고서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건 일시가...”

    “내년 6월 정도로 잡고 있었습니다.”

    “음... 그것도 내년 9월 혹은 10월정도로 미루시지요.”

    “...그... 그럴까요?”

    우해진 사장은 아직 결정이 난 것은 없는 모양이다.

    “네. 그래주세요. 어쩌면 조금 더 싼 값에 사게 되실 지도 모릅니다.”

    “아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갈 때 즈음, 송원양조 구본길 사장이 내게 물어온다.

    “저 사장님. 그 저 저희 회사도 내년 초에 일본 히로시마에 주조공장 투자를 하려고 했는데 조금 미루는 게 좋을까요?”

    “주조 공장이 그 막걸리 주조공장이었죠? 요즘 일본 분들이 많이 찾으신다고?”

    “네. 사장님.”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건 괜찮습니다. 본래대로 진행하세요.”

    “아 네 사장님.”

    “그리고...”

    나는 보고서 한두 개를 더 뒤적거리다가,

    “지강현 대표님?”

    그 이름을 불렀다.

    “네 넷! 대표님.”

    테이블 말석에 앳된 CEO가 내게 고개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어린 사람이었다. 딱 한 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테이블에 나보다 어린 사람이 있는 것은 그가 최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 인공지능 학술대회 얼마나 남았죠?”

    “20일 뒤입니다. 사장님.”

    “음 그래요. 실리콘 밸리에서 한다고요?”

    “네 산호세에서 열립니다.”

    그는 꽤나 긴장한 투로 말했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까봐 그런 듯하다.

    “그래요. 그럼 잘 갔다 오세요.”

    “네?”

    그는 눈을 크게 떴다가

    “아 넵”

    바로 이어 대답했다. 퓨쳐싱크의 기술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제 거기서 홍보만 되면 된다. 그러면 현재 시가총액이 1300조에 달하는 전 세계 시총 1위 기업, 아마존에서 컨텍이 올 것이다. 사겠다고.

    ‘미국이라... 시간 되면 나도 한 번 갔다 올까? AI는 미래뉴스에서도 자주 나오는데’

    정례보고가 끝나고 모든 CEO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사이, 백발의 신재은 회장님이 내게 와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 대표님.”

    조금 조심스런 눈치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네 회장님.”

    그러자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저희 회사 매각 건은 그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한두 달 내로 매각자가 선정될 것 같습니다.”

    “저 그런데... 그러시면... 혹시 저희 회사 전망을 나쁘게 보시는 건 아닌지...”

    그는 내가 본인 회사를 판다고 하니, 걱정이 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서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우리나라 제약주는 대표적인 고per 주식으로. 미래가치를 담보로 가지고 있는 현금성 자산, 매출보다도 가격을 높게 쳐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암 치료제 준비 중이라더라, 치매 치료 코앞이라더라, 유전자 가위 기술로 암이 생기기전 잘라낸다더라.’

    그런 이야기로 엄청나게 주가가 뻥튀기되어 있는 주식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경기 좋을 때, 꿈을 꿀 수 있을 때나 좋은 것이다. 당장 은행에서 대출 갚으라고 하고, 매출채권은 회수가 안 되고, 거래처도 망하고 하는 상황이 오면 가장 먼저 버블이 꺼지게 된다.

    현영제약은 나름 실질적인 성과가 있는 회사였지만, 그 때가 되면 분위기에 휩쓸려 제약주 주가가 전체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그 점을 우려해서 판 것이다. 나는 고령의 신재은 회장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저희 회사에서는 조금 현금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매각을 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 신약 판매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 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회장님.”

    그는 마치 ‘다 잘 될 겁니다.’점쟁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팔고나서 주가는 어찌될지는 모르겠다. 아마 하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년 중반 즈음에는. 내가 만두 파는 기업, 술 빚는 기업을 산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쪽은 거품 대신 현금이 많은 회사들이었으니까.

    지금와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시점은 바로, 1997 IMF직후,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 때. 그럴 때다. 다들 불황에 불경기에 아우성일 때, 그 때 현금을 쥐고 있다면. 부자 되는 건 쉽다. 강남 아파트건, 상가건, 주식이건 매물이 싸게 나오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늘 그렇지만, 기회가 없음을 아쉬워하지 말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경계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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