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48화 (148/198)

# 148

나는 유심히, 벤틀리에서 내리는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권오혁 사장이었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그의 반짝거리는 머리를 바라보다가, 큰 혼란에 빠졌다.

‘아니 거기서 권 사장이 왜 나와? 잠깐 그럼 권 사장은 단지 현주 씨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아니 그럼 왜 하루 종일 여기다가 차를 대 놔?’

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권오혁 사장이, 바로 오현주 씨와 사귀는 본인이라는 것을. 내가 그걸 깨닫고 몸이 굳어 있는 사이, 권오혁 사장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 사장님.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방금 전, 여기 올 때 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오현주 씨. 애인이 있습니까?’

‘글쎄요오... 그런 건 없는 걸로...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보시는 지?’

권오혁 사장은 오현주의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본인이 오현주의 애인이어서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일이었군.’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근래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스페인 나갔다가 스캔들 뉴스 보고, 그게 나 인줄 알고 아영이에게 미안해했던 일, 2주 전부터 스캔들 나지 않게 이렇게 저렇게 조정해보려고 했던 일, 결국 오현주네 집까지 쫓아와서 파파라치를 찾아낸 일 까지.

그걸 생각하니, 왠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나는 그 자리 서서 껄껄 웃었다. 한 달 전 뉴스를 보고 오늘까지 이어진 일들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

나는 맥주잔을 든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한강, 그리고 한강 너머 강북의 도심 불빛이 보인다. 나는 그걸 보며 말했다.

“한강변이라, 이것도 나름 운치가 있네요.”

내 앞에 앉은 권 사장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현주의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호프집. 나는 여기서 권 사장과 맥주 한 잔을 걸쳤다. 어찌되었든 미래는 바뀌었다. 오현주의 애인이 오현주네 집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서 나랑 술을 먹고 있으니까.

“저는 지방 사람이라 그런지 예전부터 한강 프리미엄이 왜 있는 지 잘 몰랐는데. 이럴 때 보면 이해가 가기도 갑니다.”

“그러시군요.”

권오혁 사장은 별 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습니다, 그러시군요.’ 단문으로만 대답을 했다. 지금 보니 어깨도 평소보다 훨씬 움츠려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왜 그러세요. 권 사장님. 연애하는 게 죄도 아니고.”

“아니... 그런데 보통 한 사장님은 본인한테 거짓말 하시는 거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잠시 권오혁 사장을 보다가, 잔을 앞으로 건네며 말했다.

“글쎄... 케이스 바이 케이스란 말 있죠.”

권오혁 사장은 얼른 잘을 앞으로 내밀어 나와 짠, 하고 잔을 부딪친다.

“네. 사장님.”

“말씀하신대로 저는 본래 남이 저를 속이는 걸 매우 싫어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왠지, 화가 나질 않네요. 그냥 그렇구나. 놀랍다. 하는 것 정도. 권 사장님이랑 오현주 씨랑 알고 지낸지 오래 되서 그런 것일까요? 스토리도 깊고요. 어쨌든 그렇습니다. 화 안 났으니 너무 움츠려 있지 마세요.”

“아 네. 사장님.”

우리 둘은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잔이 비자, 권 사장은 바로 주인장에게 손짓해 500cc짜리 잔을 다시 한 번 더 가져왔다. 나는 넘칠듯 찰랑거리는 맥주를 살짝 마시면서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두 분 언제부터 만나신 거예요?”

“본격적으로 애인 사이가 된 건... 한 반 년 된 것 같군요.”

“아 그러세요?”

반 년이라니 꽤 됐다. 권오혁 사장은 덤덤하게 자기 연애사를 말했다.

“...아시다시피 현주 씨는 저희 회사의 초창기 멤버로, 최근 탑스타까지 성장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저는 그걸 처음부터 지지하고 지켜봐온... 유일한 사람이고요. 그게 계속해서 이어지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그러면서 나는 문득, 예전에, OH엔터테인먼트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것도 벌써 2년 전. 하지만 분명 그 때, 내 연설에 이어서 권오혁 사장이 연설을 할 때, 오현주가 손을 모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팬처럼. 당시에도,

‘두 사람 동료의식이 끈끈하구나.’

생각하긴 했는데, 그게 사랑까지 진전될 줄은 몰랐다. 그것은 아마도, 두 사람의 나이 차, 그리고 외모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40대 초반 대머리에 키도 작은 권오혁 사장. 20대 후반에 꽃다운 미모를 가진 오현주. 미녀와 야수가 연상되는 두 사람이라서.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그런 것을 초월하는 것 같다. 이 케이스가 그런 종류인 듯하다. 권 사장은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이런 감정은 예전부터 있었는데... 제가 피했습니다. 제가 오현주 씨의 짝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요. 그런데 반 년 전 즈음에, 어느 행사 끝나고 같이 와인을 마시던 차, 오현주 씨가 먼저 사귀자고 해 와서.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아아... 네... 그러시군요.”

심지어 오현주가 먼저 사귀자고 했단다. 어떻게 보면 참 탑스타 답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탑스타 다운 것 같기도 하다. 세속적인 조건은 내팽겨 치고 본인을 지지해주는 사람과 연애를 한다. 라는 것 말이다. 비현실적이지만 아름답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두 분은 좋으시겠어요. 서로 일을 잘 알고, 그러니까 서로 도움도 줄 수 있고 말이죠.”

내 말에 그제야 권 사장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네 그거야... 저희는 한 5년간 거의 한 몸처럼 일을 해왔으니까요. 아무래도 일을 할 때, 자신의 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지지자가 있으면 좋지요. 저도 현주 씨도 서로에게서 도움을 받는 편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자연스럽게 모교 근처에서 아나운서 공부를 하고 있을 아영이 생각이 났다.

‘음...’

그러는 사이, 권오혁 사장이 내게 말했다.

“어찌되었든, 앞으로 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나름대로 파파라치들 따돌린다고 노력을 해왔는데... 이렇게 대표님한테 들키고, 도움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그래요... 그렇지요. 앞으로도... 유의해 주세요. 두 분 사랑은 응원할 테니 말이죠.”

“네 사장님.”

권오혁 사장에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그가 스캔들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미리 보고 막을 테니까. 이번엔 어쩌다보니 직접 와서 카메라를 뺏어버렸는데, 다음 번 부터는 대원일보 이원재를 통하든 KJ그룹 장한설을 통하든, 그냥 원격으로 조져버릴 것이다. 뉴스가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

그 주, 토요일 오후. 나는 소파에 앉아서 검색창에 ‘오현주’를 쳐보았다. 오현주와 나에 대한 기사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과정이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막는데 성공한 것이다. 나와 오현주의 스캔들 기사를. 그 때 내게서 명함을 받아간 파파라치는 카메라 값을 돌려 달라 전화를 하지 않았다. 하지 않은 건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버렸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을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오현주’의 기사 중에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에 띄는 사진이.

‘백상예술대상 영화 최우수연기상 후보 오현주. 단아한 드레스 자태.’

라는 기사에 나온 사진. 사진의 메인은 당연히 배우들 사이에 앉아 있는 오현주다. 그런데 사진의 구도 상, 뒤의 관객석에 앉아 있는 권오혁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두 연인이 우연하게 한 컷에 실린 것이다. 관객석의 권오혁 사장은 두 손을 모은 채 오현주를 보고 있다. 마치 자기가 연기상 후보인 것처럼 긴장한 것으로 보인다.

‘5월 달이면... 사귀고 있을 시점이로군. 자신이 키운 탑스타, 그리고 애인이 상을 받을지 말지 지켜보는 와중인가...’

이렇게 보면 오현주가 자신의 권오혁 사장에게 기대게 된 것도 이해가 간다. 오현주는 미녀도 미녀였지만, 배우로서 직업의식이 큰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가장 잘 도와줄 사람으로 권오혁 사장을 고른 것이다. 사랑과 일을 동시에 취한 것이다.

‘참 현명하다면 현명하달까...’

나도 비즈니스가 커질 텐데, 그 때 곁에서 나를 지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원해주는 여자가.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소파 뒤 쪽을 쳐다보았다. 우리 집 거실 한 편, 의자에는 펜을 든 채 뭔가를 써내려가고 있는 아영이가 있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아영아. 이리 좀 와봐.”

아영이는 펜을 놀리다가 말고, 나를 보았다.

“응? 왜?”

“글쎄 좀 와봐.”

그녀는 하반기 공채에 지원한다고, 주말에 우리 집에 와서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너 꼭 그 아나운서 해야겠어? 그렇게 하고 싶어?”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본 것은 처음이다. 내 진지함을 본 탓인지 아영이도 꽤나 진지하게 답변을 한다.

“꼭해야겠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미술 내려놓은 다음에는 딱히 할 일이 없는 걸. 평생 백화점 쇼핑 다니고 해외여행이나 다니면서 사는 건 너무 무의미하잖아. 나도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이야.”

“그래.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나운서가 되고 싶으시다?”

“응.”

의도만큼은 좋다.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아영아. 너 우리나라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아니?”

“글쎄?”

“그건 내 전 재산을 다 써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야.”

“미세 먼지?”

“미세 먼지... 도 문제는 문제지만, 그것보다 핵심적인 문제가 있지. 저출산. 미세 먼지도 마실 사람이 없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내 말은 네가 아나운서가 돼서 멋진 커리어를 가지는 것도 좋지만, 멋진 아내, 멋진 엄마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거야. 사회에 엄청나게 공헌하는.”

그 말을 들은 아영이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설마 오빠 지금 그거...”

나는 이번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아영아 나는 말이야. 앞으로 더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거야. 우리나라... 아니 우리나라를 넘어서서 글로벌하게 활동할지도 몰라. 그러면... 나도 누군가가 집에서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할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 물론 남녀평등사회에 너더러 네가 하고 싶은 일 하지 말고, 집에서 나 도와달라고 하는 건 조금 미안하지...”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아영이가 말했다.

“할게. 오빠. 오빠가 진짜 그걸 원하면 아나운서 일은...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살짝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도 괜찮겠어?”

예상외로 빠르게 포기해서, 조금 놀랍다.

“응. 솔직하게 말하면 아나운서도 나는 오빠가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나보다 해서, 그래서 준비하려고 했던 것도 있어.”

“그래?”

“응. 나도 내 인생이 있는데 오빠한테 전부 기댈 순 없잖아. 그래서 그랬지.”

아영이 말을 듣던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 여기로 이사 와. 네가 말한대로... 여긴 혼자 살긴 너무 크거든. 반년 같이 살아보고. 나도 좋고, 너도 좋다 싶으면... 언제 날 잡아서 집에 좀 갔다 오자.”

“집?”

“응. 우리 집. 고향 집.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이 있는 집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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