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46화 (14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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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주년 창립제(2)

    나는 와이셔츠를 입고, 자켓을 두른 뒤, 평소 메는 긴 넥타이 대신 나비넥타이를 멨다. 그런 다음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음...’

    오늘은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창립 2주년 행사가 있는 날. 이번 창립제는 우리 회사 임직원뿐만 아니라 계열사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거대한 행사로, 1주년 때 회사 근처 식당에서 조촐하게 임원 몇 명과 저녁식사를 하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처음 여는 창립제였다. 당연하지만, 회사의 창립자이자 CEO이자 지분율 100%의 오너인 나는 이 행사의 주최자이자, 주인공이었다. 나는 내 앞에 놓여 있는 대본을 주워들고 의자에 앉아 그걸 소리 내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대표 한상훈입니다. 오늘, 우리 회사 창립제에 오신 여러분들을 대단히 환영합니다.”

    며칠 전부터 열심히 반복해 읽은 덕에, 토씨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잘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긴장만 하지 않는다면, ‘대표 인사말’. 내 차례는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수만 명이 보는 카메라 앞에서도 잘 했잖아. 다 내 회사 사람들, 계열사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건데 뭐. 너무 긴장하지 말자.’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사실 오늘 긴장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계열사 임직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회사 밖으로 잘 나다니는 편이 못 되는 나(회사 옥상에 집이 있어서 더 그런 면이 있었다.)를 볼 오랜만의 기회였으니까. 개중에는 내게 선물 보따리도 들고 오고, 어떻게 잘 보여야 할지, 멘트를 준비해오기도 할 것이다.

    ‘그런다고 한들 내가 뭘 어떻게 바꿔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생각해보니... 블루E&M 같은 경우도 있었지.’

    선물, 아부라는 게 확실히 결정적인 때가 있긴 하다. 나는 대표나 임원을 앉힐 때도 ‘인물검색’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미래를 들춰보고 했지만, 사실 사람이라는 능력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 일 때도 많았다. A란 사람도 B란 사람도 비슷하다고 한다면 나 역시 인간인지라 그 둘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하여간 이 사람 저 사람 다 달려들어서 귀찮게 하겠군.’

    가기 전부터 예상이 된다. 다들 나나, 장 부사장한테 붙어서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그럴 것이다.

    ‘뭐 대충 할 것만 하고 나오자. 그나저나... 현주 씨 문제는 어떻게 한다?’

    스캔들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채였다.

    ‘오늘 내 귓가에 대고 이상한 말을 하면 어쩌지? 그럼 내가 거절 할 수 있을까?’

    아예 아영이를 데리고 왔다면 애초에 유혹이 막아질지도 모르겠지만, 예전 탁준기의 위협이 있었을 때부터 아영이의 신상보호, 신변보호를 위해서 공식석상에 아영이를 데리고 나온 적이 없었다. 아영이 역시 본인이 4조 부자의 여자 친구라는 사실을 어디다가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예전에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도 내게

    ‘오빠 혹시 나 시험 볼 때 방송국에 이상한 압력 같은 거 넣지 마. 나는 내 실력으로 붙고 싶으니까.’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 압력을 넣으려면 떨어트리는 쪽으로 넣고 싶은 심정인데. 어쨌든 그녀는 그랬다.

    ‘하아... 어쩐다? 아니야. 나만. 나만 마음 굳게 먹으면 돼. 오현주가 아무리 나를 유혹한다고 해도. 단호히 거절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란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도중

    ‘띠리리~’

    전화가 왔다. 박 비서다.

    “사장님. 준비되셨습니까?”

    “아. 그래 나 지금 엘리베이터 탈 테니까. 그거 기다려서 잡아 타. 같이 내려가자.”

    “네 사장님.”

    나는 대본을 든 채로 펜트하우스의 엘리베이터에 와서 하강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오 ‘P’층에 선다. 이 빌딩에서 ‘P’층을 들락거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엘리베이터는 내려다가 중간층에서 한 번 선다. 거기에는 ‘P’층에 갔다가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그걸 잡은 박 비서가 있다.

    “그럼 가자.”

    “네”

    나는 주머니에서 롤스로이스의 차 키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계열사 사람들이 참석하는 공식 석상이니 아마 벤틀리나, 롤스로이스를 탔었을 것이다. 푸른 색 벤틀리 벤테이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마 중 하나.

    ‘그게 사진에 나왔었지.’

    참 소름이 돋는다. 미래 뉴스에 그게 나왔다는 것이 첫째, 누군가가 그걸 찍었다는 게 둘째. 나는 박 비서에게 물었다.

    “오늘 파파라치 차단은 잘 돼 있겠지?”

    “물론입니다. 사장님. 그 점은 오늘 아침에도 점검을 해두었습니다.”

    “그래. 잘 했다.”

    곧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와 박 비서는 주차되어 있는 롤스로이스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 롤스로이스를 탔으니,

    ‘한상훈 대표의 파란색 벤틀리를 타고 이동하는 오현주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라던 정정보도도 바뀌어 있을 것이다. 정정보도는 딱 한 번만 나온다는 룰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귀빈 여러분들. 오늘 밤, 준비된 행사와 식사를 즐기시고, 좋은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 말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진다.

    ‘짝짝짝짝짝짝짝짝!’

    맨 앞줄에 선 사람들,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의 임직원들에서부터, 현영제약 이사들, OH엔터테인먼트와 지우엔터테인먼트의 이사들, 블루 E&M 이사들. 하여간 높으신 분들이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다. 하여간, 권력, 그리고 돈이라는 게 무섭다. 저 사람들도 나이 지긋이 먹고, 돈도 십억 대 혹은 백억 대 까지도 가지고 있을 사람들인데, 열심히 박수를 친다. 혹시나 내 눈 밖에 날까봐.

    나는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단상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오늘 MC를 맡고 있는 김준형과, 오현주가 보인다. 하여간 둘 다 주변 사람들을 시선을 빨아들이는 듯한 꽃미남, 꽃미녀들이다. 괜히 연예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 특히 오현주는 오늘 정말

    ‘내가 왜 탑 여배우인지 보여주겠다.’

    라는 느낌이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미모를 자랑했다. 나는 그녀는 오늘 드레스도 가슴이 꽤나 파인 옷을 입고 왔다. 말 그대로 시선을 끄는 치명적인 드레스. 나는 단상에서 내려오며 생각했다.

    ‘후... 이거 큰일이로군.’

    내 자리는 행사장 맨 앞에 있는 자리다. 장 부사장, 엔터 총괄 권오혁 사장, 현영제약 신재은 회장, 블루 E&M의 김정균 사장, 오라클 뉴스의 정소영 대표, 퓨쳐싱크의 이강현 대표까지. 자회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이다. 내가 자리에 돌아오자, 김준형과 오현주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행사를 진행했다.

    “지금까지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한상훈 대표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으신 말씀이었는데요. 그럼 차례는 뭐지요? 현주씨?”

    “네. 다음 있을 차례는 바로. 한국과 중국, 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적인 그룹이 되어가는 지우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걸그룹 나인 테일의 공연이 있겠습니다.”

    두 사람은 탑배우들 답게 MC도 엄청 잘 봤다. 생각해보면, 차례도 있고 각본도 있는 행사다. 거기에서 애드리브 조금 섞어서 내놓으면 바로 MC다. 나는 두 사람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왼편에 앉은 권오혁 사장을 보았다. 그는 만족스러운듯한 표정으로 두 MC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하다. 권오혁 사장은 두 사람을 필두로 OH엔터테인먼트의 사세를 크게 확장시켜 가고 있었으니까.

    ‘음... 그래 본인에게 가장 믿을만한 두 사람이겠지.’

    나는 다시 시선을 그 두 사람에게 돌렸다. 오현주. 평소 길을 걸어도 다른 사람 시선을 모두 뺏는 그녀다. 오늘은 정말 예쁘긴 하다.

    *

    모든 인사, 행사가 끝나고, 이어진 저녁 식사 시간. 테이블에 조금 조정이 있었다. 장 부사장이 다른 회사 이사들을 만나러 가고, 고령의 신재은 회장이 몸이 불편하다며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집에 간 다음, 두 자리를 오늘 MC 두 사람, 김준형과 오현주가 차지했다. 그것도 하필 오현주가 장 부사장 있던 자리,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앉아마자 내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어요. 대표님?”

    나는 살짝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걸 받았다.

    “네 현주씨도 잘 지내셨죠?”

    “네. 덕분에.”

    ‘덕분에’라는 말은 보통 지나치듯 관례상 하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나 ‘덕분에’ 이렇게 MC도 보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예전부터 팬이었고, 좋은 미담도 있고, 평소 같았으면 좋게좋게 이야기를 했을 텐데, 그 스캔들 뉴스 때문에 친한 척을 못하겠다. 나는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대쪽에서는 오라클 뉴스의 정 대표가 꽃미남 김준형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지난 번 드라마 너무 잘 봤어요. 준형 씨. 준형 씨는 보면 볼 때마다 연기력이 계속 느는 거 같더라.”

    “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그녀가 똑같은 노총각 신세인 권오혁 사장과 이어지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권오혁 사장에게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음 조금 어린 남자 취향인가...’

    하여간 너무 눈이 높으면 장가도, 시집도 가기 힘들다. 정 대표 역시 꽤나 농염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지만, 여태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저런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러던 중, 오현주가 내게 한 번더 물었다.

    “사장님 바쁘시겠지만. 요새도 유도 하시나요?”

    “아아 유도는 잘 못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런닝 뛰는 정도.”

    “아아 그러시구나아. 아쉽네요. 유도도 잘하는 CEO. 정말 멋있는데.”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스캔들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뒤로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저보다 잘하는 친구가 제 주변에 있어서요.”

    내 뒤편에는 기둥처럼 서 있는 박 비서가 있다. 그녀는 박 비서를 보더니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그러시구나.”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때였다. 갑자기 오현주가 자신의 얼굴을 내 귀 가까이에 가져오더니, 박 비서조차 들을 수 없게 작은 목소리로 내게 뭐라 속삭였다.

    *

    “그럼 가시죠. 사장님.”

    박 비서가 나를 일깨운다.

    “아... 응.”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2주년 창립제. 식사까지 모든 행사가 끝난, 연회장.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다음 번 부턴 하지 말아야지. 아니 아예 안할 수는 없으니... 격년으로 2년마다... 아니다. 5년마다 해야겠다.’

    식사 이후에는 남은 것은 수 없이 많은 이사들과 악수, 그리고 인사, 아부였다. 다들 내게 눈도장이라도 한 번 찍어보겠다고 인사를 해온 탓에 나는 그걸 받으라 한종일 시달려야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고역은 고역이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래. 가자.”

    나는 그러면서 슬쩍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오현주가 어디 있는지 해서. 그런데 연회장안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먼저 빠져나간 듯하다. 박 비서와 함께 호텔 주차장으로 가는 길. 나는 그녀가 내 귀에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그 때 정말 감사했어요. 대표님.’

    그녀는 나를 유혹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감사. 진정한 감사를 보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런 일도 없었다. 나는 이제 박 비서와 함께 롤스로이스를 타러 갔다. 벤틀리가 아니라. 그 때 그 스캔들은 악성 파파라치의 농간으로 보인다.

    ‘그래도 미래뉴스에 떴다는 건 분명 뉴스가 뜰만하다는 건데... 내일 뉴스 봐서... 누군지 내 이름으로 찌라시 내는 놈 있으면 그 놈 완전히 기자 일 못하게 만들어줘야지.’

    그것 때문에 해외여행 갔을 때부터 몇 주 고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괘씸하다. 왠지 헛물 켠 느낌도 나고 말이다. 박 비서가 먼저 달려가 롤스로이스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타시죠.”

    “응.”

    그런데 그 때였다. 우리 차 앞으로 푸른색 벤틀리 벤테이가가 천천히 지나갔다. 자연스레 타고 있는 사람에 눈이 간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우측이어서 들어오는 사람은 조수석에 앉은 사람뿐이었다. 그것은 오현주다.

    “어...?”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에 푸른색 벤틀리 벤테이가를 모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멍청한 기자 놈이 저 게 내차인줄 알고 나로 기사를 썼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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