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32화 (132/198)
  • # 132

    가든 로얄

    멀리, 붉은 노을이 진다. 가을바람 선선히 불어오고, 그에 맞춰 한강은 유유히 흘러간다. 아이들은 공을 차고 뛰어 놀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자전거를 탄 채로 떠들썩거린다.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아줌마 아저씨들은 짝을 맞춰 배드민턴을 친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그걸 지켜보았다. 크로우와 함께. 그걸 보던 크로우는 한 마디를 한다.

    “좋군요. 대표님.”

    “그렇죠? 이게 서울사람들이 여유를 즐기는 방식입니다.”

    “그렇군요. 무엇보다... 평화로워서 좋아 보입니다.”

    나는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왠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음...’

    그는 깔끔하게 발라져 있는 닭 뼈를 들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맛있습니다. 닭튀김 요리.”

    그는 붉은 양념이 듬뿍 발라진 양념치킨을 들고 있다. 지난 번 뷔페에서 치킨을 걸러낸 나는 다시 한 번 후라이드, 양념, 갈릭 중에 ‘양념’을 골라냈다.

    “아... 네. 이게 양념치킨이란 건데...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중 가장 대중적이고 맛있는 음식입니다. 한국사람 대부분 한 달에 한번은 꼭 먹는... 인기 있는 음식이지요.”

    “그렇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치킨을 뜯어댔다. 이렇게 보면 딱 한강에 놀러온 외국인 같다.

    “그나저나 그건 대단하더군요. 그... 검은 색 털이 달린 안대 말입니다.”

    내 말에, 크로우는 말없이 치킨을 뜯는다.

    “참 마법과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요새 VR기기 같은 게 나오고는 있지만... 그렇게 생생하게는... 못하거든요. 아직도.”

    그러자,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건 만들어진 꿈일 뿐입니다. 대표님. 너무 심취하지는 마십시오.”

    그의 푸른 색 눈동자는 꽤나 진중하다. 나는 내 두 눈썹을 들어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크로우는 금세 세 마리를 모두 해치워버렸다. 나는 종류별로 한 두 조각 씩 많아봐야 반 마리 정도 먹은 것 같은데, 그는 정말 대식가다.

    ‘세 마리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한두 마리 더 시킬 걸 그랬군.’

    “오늘도 정말 잘 얻어먹었습니다. 대표님.”

    “그래요. 한 달에 두 번 보는데, 때마다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네 대표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번에 의뢰할 일은 말입니다....”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우리가 앉은 돗자리 근처에 대화를 주워 들을만한 사람은 없다.

    “탁문수라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 꿈에서 나왔던 수연전자 부회장.”

    “네.”

    “그 사람의 치부? 구린 점을 조금 알아 다 봐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분 제가 알아본 바로는 겉과 속이 꽤 다른 분 같더군요.”

    “...정확히 어느 것을 말씀하시는 지...”

    “글쎄... 그가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아니 부회장이 되기까지 과정에서 뭔가가 비리를 저질렀다든가, 주변 인물을 해했다던가.”

    그런데, 그 말을 듣던 크로우는 난색을 표한다.

    “그렇게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표님.”

    “네에?”

    “제가 조사를 하려면 어느 정도 특정 장소, 특정 시간대에 누구가 어떤 일을 했는지 등등의 그런 구체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 단지 이 사람의 뒷조사를 해달라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음...”

    나는 잠시 탁문수에 대해 생각했다.

    ‘특정 장소, 특정 시간, 특정 사건이라...’

    여기 오기 전, 나는 이미 탁문수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었다. 나 스스로. 하지만 그는 정말, 깔끔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한테 갑질을 해서 피해를 줬다는 이야기도 쓰여 있지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했다는 이야기도 나오질 않았다. 포털에서 나오는 정보만 가지고 그는, 완전히, 완전히 깔끔했다. 하긴,

    ‘업계에서는 칭송이 자자합니다.’

    장 부사장도 그렇게 알고 있을 정도니, 일반인에게 전해지는 뉴스는 정말 좋고 아름다운 것들 뿐일 것이다.

    “그런 특이한 사건 같은 건 없는데...”

    “그러면 저도 조사에 착수하기가...”

    ‘어쩐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아. 혹시.”

    다시 한 번 그 때 그 꿈을 빌려서.

    “탁준기가 수연을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준비해두었다는 그 자료. 그 자료들을 얻을 수 없을까요?”

    “탁준기 준비한... 자료 말씀이십니까?”

    “네. 그 때 꿈에서도 말하지 않던가요. 본인의 최종 목표는 수연이었다고. 그는 계승순위가 낮았지만 수연 그룹 사람이었습니다. 내부총질을 하기로 마음먹고, 정보를 수집했다면, 수연 그룹 내에 부정부패. 비리내역을 모을 수 있었을 겁니다. 탁문수가 숨기고 싶어했던, 치부까지 모두 합해서요.”

    “...그렇군요. 그러면, 죽은 탁준기의 자료를 수집해오는 것으로?”

    “네. 그건 가능합니까?”

    “네 가능할 것 같군요.”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탁준기가 기업공략을 위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정보들. 가져다주세요.”

    “네 대표님.”

    그런데, 그러던 중에

    ‘띠리리리~’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그걸 들어보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아영이. 나는 크로우에게

    “잠시 전화 좀...”

    양해를 구하려고 했는데,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평소처럼 신출귀몰하게. 나는 살짝 벙 찐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어 아영아.”

    *

    ‘띵~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린다. 나는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서 우리 집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마침, 옆 집 문이 열리고, 아영이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왔네? 오빠?”

    한창 작업 중이었는지 머리를 묶은 채다. 그 모습이 퍽 귀엽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곧 온다며. 게다가 나는 복도에서 나는 발소리만 들어도 오빠인지 아닌지 알지롱.”

    “흠 그러셔.”

    나는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말고 그녀에게 다가가 살짝 키스를 해주었다.

    “미안 요새 너무 바빠서. 여자 친구한테 얼굴도 자주 못 보여주고.”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나도 바빴는걸.”

    나도 바빴지만,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그녀 역시 꽤나 바빴다. 미술 대학원. 졸업 작품을 해야 한단다.

    “그래서, 졸업 작품은 잘 되가?”

    “그럭저럭.”

    “그럭저럭?”

    내 물음에,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서 바탕화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형형색색 나무 위에 사람들이 화를 내고, 박장 대소하고, 생각에 잠겨 있고, 슬피 울고,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이 있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탐탁지 않아 하셔서... 교수님이 뭘 원하시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현대 미술이란...’

    나는 별 생각이 없지만, 재벌 사이에 저런 작품이 수십 억, 수백억에 거래되기도 한다. 미술품에는 세금이 따로 붙지 않아서,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 된다. 대기업 사모님들이 다들 작은 미술관 하나씩 운영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나는 아영이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저거 완성 되면, 한 몇 억 하는 거 아닙니까? 선생님?”

    아영이는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아직 무명이어서...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사람들은 누구처럼 다 돈이 엄청 많지는 않거든요.”

    “또 모르지. 어느 바보 부자가 몇 억 쥐어주고 사갈지.”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엄지로 내 가슴 쪽을 가리켰다. 내 말에 그녀는 다시 한 번 피식 웃는다.

    “됐어요. 저도 돈은 충분하거든요. 그나저나 저녁은 먹었다고 했지?”

    “아... 응 먹었는데. 조금 적게 먹었네.”

    치킨 세 마리를 시켜놓고 적게 먹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아 그럼 먼저 들어가서 씻어. 내가 그동안 뭐라도 해 올게.”

    “그래 그럼.”

    아영이는 묶은 머리를 살랑거리며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 보니, 왠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름 두 번째긴 했지만, 촬영이라는 게 여전히 힘들이긴 하다.

    ‘아까 크로우랑 떠들 땐 몰랐는데, 그건 치맥 덕분이었나...’

    나는 옷을 대충 벗어서 소파 위에 걸어 두고 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더니 조금 덜 하다, 샤워를 하는 와중에 밖에서 소리가 난다. 아영이가 우리 집에 들어 왔나보다. 나는 샤워를 대충 마치고, 물기를 씻고, 팬티와 실내용 바지 티셔츠를 챙겨 입은 다음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뭔가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뭐야? 이 냄새는?”

    아영이는 소파 뒤에서 서 있다. 그녀는 내게 말한다.

    “호두파이.”

    “호두파이? 음 맛있겠다.”

    그런데 그 때, 그녀가 휙 돌며 말한다.

    “오빠. 이거 뭐야?”

    그녀 손에는 작은 종이 하나가 들려 있다.

    ‘저게 뭐지? 명함?’

    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건 명함이다. 내 바지에 들어 있던 ‘MBE 아나운서 신민선.’이라 쓰여 있는 명함.

    “아... 그거.”

    아영이의 말투가 살짝 바뀌어 있다. 살짝 차갑게.

    “명함이네?”

    “명함... 이지.”

    ‘뭐야 혹시 내 바지를 뒤졌나?’

    “근데 이게 왜. 거실에 떨어져 있어?”

    ‘아...’

    나는 떠올렸다. 방금 전, 들어오자마자 바지를 벗어서 휙 하고 소파에 걸쳐놨던 것을. 그때 저게 방바닥에 떨어 졌나보다.

    “아아 그거. 오늘 받은 건데. 주머니에 넣어뒀던 것이 떨어졌나 보네. 별 거 아냐. 오늘 촬영하고 주길래. 받았어.”

    “으음... 업무상 받으셨다?”

    “그런 셈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조금 양심에 찔렸다.

    ‘연락주세요.’

    하며 윙크를 하던 신민선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걸을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던, 그 빨간색 스커트도.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거 찢어서 버리든가 말든가 해. 어차피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으니까. 한동안은.”

    “으음...”

    아영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더니, 그 명함을 다시 내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명함은 주고받아야지. 같이 일하는데 전화번호는 알아야할 거 아니야. 나는 오빠 믿어.”

    그녀의 이런 점은 참 좋다. 나를 믿어줘서. 하지만 그 때 그녀가 한 마디를 더 했다.

    “하지만 조심해. 나는 다른 여자들도 믿거든. 내 남자를 꼬실 수도 있다고.”

    여자 감은 역시 무섭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알람이 울린다. 아침 7시. 내 기상용 알람인데, 그걸 들은 아영이가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빠 나 가볼게. 사실 어제 작업 더 했어야 되는데. 오빠랑 놀려고 일찍 집에 와버렸거든. 나 오늘 일찍 학교 갈테니까. 아침은 따로 드셔요.”

    “으응.”

    그녀는 마치 마감에 쫒기는 작가마냥 부리나케 일어나 내 볼에 키스를 하고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홀로 남은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에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든가...’

    오랜만에 집에서 트레이딩이나 하면서 쉬고 싶은데, 서 비서에게 물어봐야겠다. 나는 거실에 와서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한잔 들이켰다. 지금 보니, 소파에 어제 벗어둔 옷이 그대로 있다. 나는 바지를 들었다. 바지 안에서

    ‘MBE 아나운서 신민선.’

    그 명함을 보다가, 구긴 다음 휴지통에 집어넣어 버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영이가 좋다. 그녀와 신의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 다음 나는 그걸 빨래 바구니에 넣어두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아 참.’

    생각해보니, 그 상의에 더 중요한 문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져보니 그건 여전히 품속에 들어가 있다. 황금색 ‘R’이 찍혀있는 가든 로얄의 초대장. 나는 그걸 다시 펴 보았다.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것은 마지막 문구다.

    ‘참여 의사가 있으신 분은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이 편지를 소지한 채 기다려주십시오.’

    “음...”

    나는 그걸 지켜보다가, 그걸 들고 침대에 돌아와 침대 매트 아래에 넣어 두었다. 예전 참석했던 엔비 가든이 용이 되지 못한 뱀들의 소굴이었다면, 거기는 정말 이무기들. 용이 된 사람들의 모임일 가능성이 높았다.

    ‘가든 로얄이라...’

    나는 침대에 누워서 그에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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