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초청장
만나겠다는 말은 먼저 해놓고, 이어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은 오후 4시 10분이다. 크로우와의 만남 약속은 6시. 한 시간 정도는 만나서 떠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혹시 저녁식사를 제의하면 그것만 거절하면 될 것이다. 선약이 있다고. 나는 서 비서에게 말했다.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 어디로 가면 돼?”
내 말에, 서 비서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잠시만요. 성 피디님이... 직접 안내해 드린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 마침, 안경을 쓴 빼빼마른 남자. 성 피디가 나타나 말한다.
“대표님. 비서님.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서 비서가 대신 말을 해준다.
“한 시간 정도는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저... 이쪽으로.”
나와 서 비서, 그리고 멀찌기 떨어져 있던 박 비서는 그를 따라서 방송국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가는 도중 성 피디는 나에게
“저... 대표님.”
“네?”
“오늘 녹화 어디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그런 것을 물어온다. 아마 자기 상관을 만난다니, 내가 이상한 말을 할까봐 그런 듯하다. 촬영 전에는
‘5번 카메라. 정신 안 차릴래?’
‘야야야!’
‘쟤는 또 뭐야? 얼른 치워.’
스태프를 쥐 잡듯이 잡던 그도, 상관 앞에서는 그 쥐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 네 좋았습니다. 첫 번째는 조금 긴장했었는데, 이번이 두 번째 다보니 마음 편히 임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에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스태프분들도 다 훌륭하게 잘해주셨고요.”
“아아 그러셨군요. 다행입니다. 다행.”
직장상사가 후배를 혼내는 것은 내 트라우마가 되어버려서, 아직도 조금 그런 광경을 보면 썩 마음이 좋지 못하다. 나는 잠시, 회사 다니던 시절을 생각했다.
‘그나저나... 허 과장은 잘 지내나...’
그러던 때에,
“이쪽입니다. 대표님.”
성 피디가 한쪽 대기실을 가리킨다. 그런데 때 마침 문이 열리면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하나가 나온다. 성 피디는 그를 보더니 역시나 몸을 반쯤 접어 인사한다.
“아 국장님. 여기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한상훈 대표님이십니다.”
그는 이어서 내 쪽에도 인사를 시켜준다.
“한 대표님. 저희 MBE 박명철 국장님이십니다.”
60대로 보이는 박명철 국장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아 예 반갑습니다. 국장님.”
“저 들어가시지요.”
나는 그와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박명철 국장은 뒤따라 들어오려는 서 비서, 박 비서를 보더니, 내게 말했다.
“저 대표님.”
“네?”
“죄송하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두 분은 잠시 밖에 계시라고 해도 될까요?”
정중한 부탁이다. 나는 서 비서, 박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인을 받은 두 사람은 대기실 밖에 서 있다. 내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자 박명철 국장은 바로 문을 닫는다. 이쯤 되니 조금 궁금하긴 하다.
‘대체 무슨 이야길 그리 긴히 하고 싶어서?’
“앉으시지요.”
그는 내게 자리를 권한다. 나는 그 자리에 앉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광고 이야기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투자 상담? 주식하다가 조금 말아드셨나?’
내가 자리에 앉자 그가 묻는다.
“저 오늘 촬영은 어떠셨습니까?”
어찌된 게 피디랑 질문이 똑같다. 상투적인 질문. 나 역시 상투적인 답변으로 그걸 받아주었다.
“네 뭐 좋았습니다. 다들 잘 해주셔서.”
“올해 서른이시라고요? 참 대단하십니다.”
역시 또 매번 듣는 이야기다. 여태 이 이야기는 백 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젊은데 대단하다.
‘하아... 지루하구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대답을 했다.
“과찬이십니다.”
MBE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제전문TV였기 때문에, 국장이라고 하면 입김이 매우 강했다. 내가 돈 버는데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한상훈’이란 내 이름이, 대중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그래야 계속해서 언론에 좋게 나오고 그래야 나중에 미래뉴스에서
‘한상훈’
이란 이름을 검색을 했을 때 더 자주 나오게 될 것 아닌가. 그것도 좋은 이야기는 즐겁게, 나쁜 이야기는 슬프게 말이다. 나는 대충
‘좋아. 나름 국장님 이신데 한 시간 정돈 들어주지 뭐.’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그는 슬쩍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마을 꺼냈다.
“저... 제가 대표님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면서 품에서 흰색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거. 대표님께 전해 달라 부탁을 받아서요.”
지금 보니 조금 입체감이 있다.
‘편지 봉투?’
나는 눈을 껌뻑거리며 그걸 받았다. 딱 잡는 순간, 뭔가 꺼끌한 느낌이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흰 바탕 위에 금색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음...’
나는 그것을 빙글 돌려보았다. 편지봉투의 중심부 거기에는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R’이 쓰여 있다.
‘R... R이라... 루갈?’
뭔지 모르겠다. 나는 박명철 국장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보시는 대로. 편지입니다. 일종의 초청장... 으로 알고 있는데 한 번 보시지요. 저도 자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 단지. 위... 흠. 아시는 분이 전해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빠르게 말을 고쳤지만, 나는 분명 들었다.
‘위에서?’
방송국 내에서 국장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 그런단 말은 사실상 그를 국장에 앉힌 사람. 그 사람이 보냈다고 봐야 한다.
‘그럼 MBE의 사주 쪽에서 보냈다는 건데... MBE가 어느 쪽이었지? 수성? KJ? 명진? LC? 아니면... 수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면 확실히 전달 받으신 걸로 알고...”
그는 오히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에게 다시 한 번 손을 건넸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손을 잡고 흔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아마 한 1분? 2분? 예상했던 1시간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 앞으로 승승장구하시기를. 저희 텔레비전에도 더 자주 나와 주시고요.”
“아 네.”
박명철 국장은 진짜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딱 하나 이게 목적이었던 듯하다. 나는 그 편지를 바라보다가, 그걸 일단 내 품 속에 넣어두었다. 예상 외로 나와 국장이 대기실에서 바로 나오자. 멀리 의자에 앉아 있던 서 비서와 박 비서도 놀라 다가왔다.
“그럼 대표님. 살펴 들어가십시오.”
“네 국장님.”
인사를 마친 뒤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MBE 국장을 집배원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
“그러면, 잠원한강공원으로... 가겠습니다.”
“응.”
서 비서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 박 비서가 네비게이션에다가 ‘잠원한강공원’을 써넣는다. 이렇게 보니 둘이 콤비도 점점 맞아가는 것 같다. 서 비서가 차를 이끌고 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품속에서 그 편지봉투를 꺼내, 마개를 열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첫 번째 문장을 보는 동시에
‘음...’
슬쩍 서 비서와 박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 서 비서는 운전에 정신이 없고, 박 비서는 창밖으로 뭔가를 주시하고 있다. 그걸 확인한 나는 다시 편지에 쓰여 있는 문장을 읽어보았다.
‘초청장 – 가든 로열’
‘마개에 찍혀 있던 R. 로얄Royal의 R이었나...?’
지금 보니 royale이라고 쓰여 있다. 구어형태로 Garden royale. 딱 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가든 엔비.
‘맞아... 분명...’
생각해보면 그 때, 꿈에서 탁문수는 탁준기더러
‘너 아직도 하냐? 그 카피 쇼를?’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럼... 가든 엔비가... 이 가든 로열의 카피? 그럼 이걸 보낸 사람은...’
탁문수.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때, 탁문수가
‘한상훈이라... 나도 만나봐야겠군.’
말을 했었으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걸 더 내려 보았다.
‘11월 3일. 토요일 저녁. 귀하를 초대합니다.’
‘초대자. KJ쇼핑 CEO 장한설.’
그런데 보낸 사람이 KJ이다. 수연이 아니라. KJ그룹 역시 국내 20위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장한설 역시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점 찍혀 있는 사람이었다.
‘...이거... 국장님을 집배원으로 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으로군...’
생각해보니 방송국에서 나오자마자 검색해보려고 했는데, 따로 검색을 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쪽 가지였나 보군.’
갑자기 왜 KJ 장한설이 나를 만나자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강 그런 그림은 그려진다. 이 가든 로열의 모임에, 탁문수가 있을 거란 그림.
‘어쩌면... 장한설이 탁문수 부탁을 들어준 것일 수도 있고 말이야.’
탁문수도 내가 탁준기와 격렬하게 싸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은 탁 씨가 나를 부르면 내가 심하게 경계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시선을 더 내려보았다.
‘초대 장소는...’
그런데 장소가 조금 묘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수동면사무소’
‘면사무소?’
면사무소에서 대기업 차기 회장들이 파티를 한다니, 영 이상하다. 그런데 그 아래에 한 마디 문구가 더 쓰여 있다.
‘참여 의사가 있으신 분은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이 편지를 소지한 채 기다려주십시오.’
‘참여 의사라...’
나는 그 편지를 한참 보다가 일단 다시 접어 내 품속에 넣어두었다. 그 사이 서 비서가 모는 차는 잠수교를 지나 잠원한강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이번에 크로우를 소환한 곳이었다. 한강 보면서 치킨에 맥주라도 마시려고. 시계를 보니 5시 20분이다. 40분 가량 남았다. 나는 비서들에게 말했다.
“아 참. 혹시 이 차에 돗자리는 있나?”
“없습니다만...”
“그럼 가는 즉시 어디서 사와라. 그리고 치킨도 시켜줘. 생맥주 1500cc랑 치킨... 세 마리. 후라이드, 양념, 그리고... 갈릭으로. 이거 나랑 내 손님이 다 먹을 테니까. 너희는 너희끼리 따로 시켜서 먹어. 저녁.”
“네 사장님.”
나는 일찌감치 좋은 자리를 잡고 흘러가는 한강을 보며 크로우가 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크로우보다도 맥주와 치킨 세 마리가 더 빨리 왔다.
‘꼬르르...’
촬영 전 점심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배는 고프다. 배는 고픈데, 치킨 냄새가 올라오니 참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기다렸다. 크로우는 누구보다도 내게, 유용한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확실치는 않지만, 크로우가 유용하게 쓰일 일이 앞으로 더 자주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강 뒤편에서 익숙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부르셨습니까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