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27화 (127/198)

# 127

까마귀 꿈

“어떠십니까? 입에는 잘 맞으시나요?”

내 말에, 크로우는 고개를 끄덕인다.

“맛있습니다. 대표님. 정말 맛있군요.”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요.”

“참 이곳은 놀라운 곳입니다. 먹고 싶은 만큼, 음식을 가져다가 먹을 수 있다니.”

그는 이런 뷔페는 처음인 듯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얼마든 드실 수 있으니. 천천히 드세요.”

그는 내 말대로 거의 여섯 접시 일곱 접시를 꽉꽉 채워서 모두 해치웠다. 대단한 식사량이다. 재밌는 점은 처음에는 해산물이니 초밥이니 탕수육이니 깐풍기니 불고기니 피자니 스파게티니, 메뉴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담다가 후반부에는 양념치킨 위주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그걸 지켜보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치킨이 입에 맞으신가봅니다?”

“네. 이거... 맛있군요. 새콤달콤한 맛이.”

“흠 그럼 다음번에는 같이 치맥이라도 하지요.”

“치맥? 그건 뭡니까?”

남의 비밀은 잘도 알아오면서, 이런 건 모른다.

“치킨에 맥주 말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저야 대표님이 사주시는 대로 먹어야지요.”

크로우는 그런 말을 하면서 우걱우걱 치킨을 잘도 먹었다. 서 비서나 장근이도 꽤 잘 먹는 편인데, 크로우는 완전히 격이 다른 것 같다. 그렇게 기나긴 식사가 끝난 뒤, 호텔 정문 앞에서 나는 그와 헤어졌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크로우”

그리고, 들고 있는 봉투를 탁탁 치며 말했다.

“이거 수고 많았어요.”

“네. 대표님. 다음 달에도 찾아주시길.”

크로우는 평소처럼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한다. 그런데, 폼이 살짝 어정쩡하다. 하긴 그토록 먹어댔으니, 아무리 거한이라고 해도 위가 조금 불편할 것이다. 나는 그걸 보며 피식 웃고는 뒤로 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아. 대표님.”

크로우가 나를 잡았다.

“네?”

“그 안대는 꼭 사용법에 맞춰서 사용하셔야합니다.”

“안대요?”

“네. 그 봉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용법도 첨부해 놓았으니, 꼭 지켜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봉투 안을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안대 하나가 있다.

“아... 네...”

나는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런데, 그는 그새 어디로인가 사라져 있었다.

*

집에 돌아온 나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모두 꺼내보았다. 안에는 지난번보다는 조금 얇은, A4 더미가 있다. 양은 조금 적지만 동일한 보고서다. 크로우가 쓴 것 같은 자필로 되어 있는 보고서다.

‘이건 이거고...’

나는 이어서 검은색 안대를 들어보았다. 검은 색이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검은색 까마귀 깃털이 양 옆으로 세 개씩 붙어 있다. 마치 가면 같이 말이다.

“음...”

왠지 이걸 끼고 자면 악몽을 꿀 것만 같다. 나는 안대 옆에는 ‘설명서’라고 쓰여 있는 브로슈어가 한 장 끼어 있었다. 나는 그걸 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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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오브 블랙피더(Dream of blackfeather)

전설 장신구

패시브스킬

까마귀 꿈(Ⅰ) – 흘러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7시간 이어지는 숙면 시에만 발동한다.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이라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이야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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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걸 읽다가 육성으로 말하고 말았다.

“뭐?”

‘기기를 사용할 때는 ...주의해 주십시오.’

와 같은 설명서에 익숙한 내게 영 이상한 설명서다. 나는 그걸 안대를 든 채 그걸 번갈아 보았다. 이상한 소리를 제외하고 핵심만 추려내자면.

‘7시간 이어지는 숙면 시에만 발동한다.’

크로우가 말했던 ‘사용법’이란 아마 이걸 말하는 것 같다. 이걸 쓰고 자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나 보다

‘그럼 아주 길게. 푹 자야한다는 것이로군.’

나는 설명서를 빙글 돌려보았다. 뒤편에는

‘모든 꿈은 단 한 번 꿀 뿐입니다.’

라고 쓰여 있다.

“그건 나도 알아 임마...”

나는 일단 그 설명서를 제쳐 둔 채, 안대와 보고서를 들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 다음 한 장 한 장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1. 탁준기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

바로 본론이다. 그걸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

보고서를 다 읽어 본 나는

“허... 참...”

그걸 머리맡에 두었다가, 바로 다시 들어서 침대 시트를 들고, 그 아래다가 넣어놓았다. 내일 한 번만 더 읽어보고, 바로 태워서 없애버려야 될 것 같다. 이 보고서는 위험해도 너무 위험하다. 단순히 내 궁금증 때문에, 크로우를 시켜서 알아오게 한 것인데. 너무 위험한 사실을 알아버렸다.

“역시... 자살이 아니었어.”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9시. 강남의 빌딩들은 휘황찬란한 불빛을 내뿜고 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야경. 하지만 오늘은 그 마저도 섬뜩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 저런 빌딩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에. 그런데 그 때,

‘위이잉’

휴대폰이 알람이 울린다. 나는 그 소리에도 살짝 놀랐다. 한참 긴장을 한 탓이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보았다. 아영이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미팅은 잘 하고 왔어? 오빠 아버님이 사 오셨다는 프랑스 와인. 오늘 마실까?’

나는 그 문자를 보며 생각했다. 오랜만에 로맨틱한 밤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오늘은 푹 자야한다. 7시간 정도. 나는 그녀에게 답했다.

‘미안 오늘은 내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내일이나... 모래. 그 때 마시자.’

나는 일부러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를 해두었다. 아영이가 떼를 쓰지 않도록. 다행이도, 그건 잘 먹혔다. 사업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인지, 아영이는 내가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를 했을 때는 방해를 하지 않았다.

‘응. 오빠 시간 될 때 마셔요’

문자를 주고받은 뒤, 나는 바로 거실에 와서, 스쿼트 50회. 버핏 테스트 100회. 팔굽혀 펴기 30회를 한 다음. 반신욕을 하고, 우유를 데워서 반 컵 정도 마신 다음, 침대에 누웠다. 시간을 보니 10시다. 평소 11시나 12시 즈음 자는데. 잠이 오려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크로우가 가져다 준 안대를 끼고, 잠을 청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영 잠이 오질 않는다. 아까 봤던 그 충격적인 내용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 수면 주기를 무시하고 잠을 청해서 그런지.

‘하아... 양이라도 세 볼까?’

생각해보니 억지로 잠을 자려고 한 것도 오랜만이다. 싶다. 나는 양을 세는 대신에, 동생 생각을 했다. 나는 늘 자주, 동생과 티격태격 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심으로 너죽자 나죽자, 치열하게 싸운다던가 해본 적은 없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생각했다.

‘참 무서운 세상이야... 돈이라는 게...’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에,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어디서 외풍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 몸 앞으로 전신에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진다.

‘뭐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공기를 헤치고 나아가고 있다. 검은색 하늘을. 고개를 내려다보니, 빛나는 건물들이 있다. 서울. 그리고 길게 이어지는 하천과 다리들, 그리고 그걸 밝히고 있는 불빛들이 보인다.

‘청계천?’

이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어딘가에 앉았다. 작은 나무. 주변을 둘러보니 정원이 펼쳐져 있다. 역시 나무 크기에 알맞은 작은 정원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는 컴컴한 허공이다. 여기는 빌딩 옥상에 있는 정원이다. 나는 깨달았다.

‘여긴, 수연여행 옥상이로군.’

그리고,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도. 크로우가 건네준 안대를 사용법에 알맞게 쓴 것 같다.

‘이걸... 루시드 드림? 자각몽이라고 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몸은 움직여지질 않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는 건 된다. 정원 한 쪽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하나 있다.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남자. 40대임에도 불구하고 군살이 하나도 없다. 나는 생각했다.

‘뉴스에서 보던 것보다... 미남이로군. 조금 차가운 인상이긴 하지만.’

곧 옥상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들어온다. 탁준기와, 그의 비서인 거한이다. 탁준기는 얼굴이 빨개져 그 남자에게 다가간다.

“형!”

형이라 불린 남자는 그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말한다.

“나까지 불러야 했냐. 준기야.”

“미안해. 너무...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그랬어.”

그걸 보던 나는 살짝 놀랐다. 탁준기가 진심으로, ‘미안해’라고 하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 인 것 같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이야기는 들었어. 뭐 근데 어쩔 수 없잖아. 기사 내용 보니까 빼도 박도 하지 못하게 걸렸던데. 이번 건은 어쩔 수 없겠더라. 내가 변호사는 최고급으로 해줄게. 판사는 요새... 고르기가 쉽지 않아서. 어쨌든 재심까지 가면 10년 정도로... 조정해 볼게. 그리고 7년 정도 살면 나올 수 있을 거야.”

“7년? 7년이라니. 나 교도소에서 7년 썩으면 끝이야 형!”

그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끝은 아니지. 갔다 와서 외국에 나가 살아. 미국이든 유럽이든. 아버지가 그 정도는 해주실 거야. 작은 아버지는 널 죽여 버리고 싶어 하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똥밭에서라도 구르게는 해주시겠지. 자기 아들인데.”

여기서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난다.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다. 탁준기는 그 사촌 형에게 심지어 무릎을 꿇는다.

“그건 안 돼. 제발. 형. 이렇게 부탁할게. 형은 해줄 수 있잖아. 이거 다 없던 일로 해줄 수 있잖아!”

그 사촌 형은 고개를 젓는다.

“미안하지만 준기야. 내가 전에 말했잖니? 검찰도, 기자도, 다 우리 장사꾼들이나 다를 바 없다고. 내가 원하면 너 하나 구해 줄 수 야 있겠지만, 그러면 그 장사꾼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게 되어버리지 않겠니?”

“그 빚은 내가 갚을게. 어떻게든 살아서...”

그 말에 사촌형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빚을 갚겠다고? 너는 이미 빚쟁이로 알고 있는데? 명동에 소문 돌더라. 수연그룹 사람이 사채 쓰고 안 갚는다고. 내가 그런 이야기를 내가 들어야 겠니? 좆같게?”

그 사촌형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욕을 해댔다. 그게 더 무섭다.

“이미 너 때문에 수연그룹은 많은 빚을 졌어. 이곳 저곳에. 그것도 작은어머니께서 널 감싸셔서 그런 거지... 작은어머니 아니었으면 넌 이곳도 물려받지 못하고 그냥 팽 당했을 거야.”

그는 ‘이곳도’를 말할 때, 구두 발로 정원 위를 탁탁 친다. 이곳이란 다름 아닌 수연여행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래도 봐주고 봐줘서 하나 줬더니, 그룹 이름에 쪽팔리게, 이런 개짓을 해? 아니 개짓은 그렇다 쳐 넌 원래 개새끼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까발려 지다니?”

탁준기는 개새끼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에게 개원했다.

“미안... 미안해 형. 그게... 그건... 한 번 잘 못 걸려서 그래. 이상한 녀석한테.”

“이상한 녀석?”

그 때, 내 이름이 나온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걸 바라보았다. 까마귀도 침을 삼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있어. 한상훈이라고. 투자회사 차려서 키우는 녀석인데. 성분도 천한놈이 어떻게 연줄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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