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26화 (126/198)

# 126

사필귀정(2)

“음 그래서... 부사장님 생각에는 외부인보다는 이분으로 가는 게 좋겠다?”

“네. 아무래도 이 인터넷방송사업이 생겨난 지 채 10년 밖에 되지 않은 신생사업이다 보니 베테랑이 부족합니다. 타사에서 영입을 해온다고 해도 검증이 되었다고 하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누군가 온다고 해도 확실한 카드다 이렇게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정균 이분을 뽑으면 최소한 안정감은 있겠지요.”

김정균. 안용균 사장 지위가 흔들릴 때 바로 내게 와서 달라붙은 그 사람이다. 하지만 나한테 아부 잘한다고 뽑아줄 수는 없다. 애초에 안용균 사장도 내 앞에서는 개처럼 기곤 했었으니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럼 이분으로 제가 한번 검색... 아니 생각하고 이른 시간 내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사장님. 그리고, 지우엔터테인먼트 인수 건에 대해서 말입니다.”

“네에”

“가격은 말씀드렸던 가격으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중국 쪽에서는 액수보다도, 공산당에 보여줄 건수가 필요한 것 같더군요. 그래서 싼 가격에 업어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됐군요.”

“그리고 이쪽도 신임 CEO가 필요합니다. 중국인 CEO는 투자가 끝나는 동시에 중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건 권 사장님하고 이야기를 해서, 본인에게 겸임을 시키거나, 아니면 OH엔터테인먼트 이사 중에 하나를 사장으로 둬서 권 사장님이 오더를 내리는 방식으로 하지요.”

“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사장님”

“네에.”

장 부사장은 고개를 숙인 뒤 사장실을 나간다. 나는 깍지를 껴 머리에 댄 다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유 이거 끝이 없구만 끝이 없어.”

9월. 탁준기 이사 건이 마무리 되고, 조금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바쁜 것 같다. 나는 바탕화면 위에 있는 달력표를 보았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비밀보물창고라면, 이건 진짜 내 ‘스케줄표’다. 방금 전에 논의 되었던 ‘블루E&M 새 대표 임명식’, ‘지우엔터테인먼트 인수 합병’말고도 다른 일정이 줄줄이 사탕으로 잡혀 있다. 다음 일정은

‘이원재 이사네 IPO 기관투자설명회.’

이름도 제대로 쓰여 있지 않다.

‘회사 이름이 뭐였더라... 투데이...’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가긴 가야한다. 이건 약속이다. 이원재 이사가 중요한 승부처에서 내 편을 들어주었으니, 가서 얼굴 내밀고, 투자 약속도 해줄 것이다. 요새 투자업계 쪽에서는 나와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의 평판이 높아져서, 내가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좋은 가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누군가 내게 좋은 일을 해주면, 나도 그에게 보상을 준다. 신용을 지키는 것이다.

‘아 좀 쉬고 싶은데... 일단 이것까지는 가야겠지.’

그런데 그러던 때에

‘띠리리리’

전화기가 울린다. 나는 그걸 들어보았다.

“저 사장님.”

“응?”

“MBE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슈퍼개미를 만나다’에 다시 한 번 출연을 해주실 수 없냐고 하시네요.”

“아... 그거?”

“네.”

생각해보니 예전에, 남자 아나운서하고 기 싸움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1조원 넘기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아 그래요오? 1조원이요오? 하하하 만약 그렇게 되면 제가 먼저 투자하겠습니다.’

1조원. 그건 얼마 전에 넘었다. 카이게임즈 지분가치가 점점 커졌기 때문이다. 나가서 그 녀석 콧대를 한 번 눌러주고 싶긴 하다.

‘자 봐라 1년도 안 걸렸지?’

“그 때 신년에 처음 출연하셨으니까... 딱 8개월 지났네요. 다시 한 번 카메라 앞에 나가셔서 이렇게 성과 냈다. 자랑 한번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건 언젠데?”

“다음 달 첫째 주 수요일 촬영. 다음 달 마지막 주 목요일 방영입니다.”

“...그래. 나갈게.”

스케쥴이 하나 더 늘었다.

“네 사장님. 그러면 피디님한테 그렇게 말해놓겠습니다.”

“그래그래.”

투자 초창기만 해도,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자회사가 늘고, 명성도 쌓이다 보니 이것저것 할 게 많았다. 예전처럼 잡무는 장 부사장에게 맡겨놓고,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서 클릭 몇 번 하면서 몇 억씩 버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본래 그게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9월 15일. 저녁. 8시 55분. 나는 이날도 이메일을 받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이것 때문에 탁준기가 죽었지만, 뭐, 그렇다고 한들 반성을 할 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BKS 9시 뉴스~”

나는 그 익숙한 로고를 보다가, 고개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내 가슴팍에는 흰 정수리와 긴 머리카락이 있다. 나는 그 긴 생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재밌겠다. 그치?”

내게 안겨 있던 아영이는 나를 쓸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잘 나와야하는데.”

“잘 나오겠지. 걱정 마”

본래 9시 뉴스 같은 건 연인끼리 볼만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볼만한 게 있었다. 바로 아영이의 인터뷰. 하루 전 날. 아영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오빠. 나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 나간다고 할까?’

‘인터뷰? 어디서?’

‘BKS. 9시 뉴스라는데’

‘아 그래? 아버지 일 때문에 그런 거지?’

‘응 나한테 당시 심정 같은 거. 물어보고 싶다는데.’

고영식품은 재조사는 금방 끝났다. 크로우가 물어온 정보가 워낙에 정확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재조사를 했고, 고영식품과 이강산 사장의 결백은 금세 밝혀졌다.

‘나가서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부모님 명예. 되찾고 싶어 했잖아. BKS 9뉴스면 명실상부한 공영티비 메인 뉴스인데. 거기 나가면 전국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겠어? 좋은 기회일 것 같은데’

아영이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응... 그렇긴 하네. 알았어. 한다고 할게. 오빠.’

하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오늘, 지금 나오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뉴스입니다. 4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고영식품 쓰레기 식자재 납품 논란. 그런데 사실은 주가조작의 희생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재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나는 그걸 보며 흥분했고,

“오 한다한다.”

아영이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렸다.

“어떻게 해”

아영이의 인터뷰 장면은 뉴스 중반 즈음에 삽입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고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대략 15초 정도, 짧은 인터뷰였지만,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여자 친구도 엄청 예뻤으니까.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 말고,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아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왜 안 봐.”

“못 보겠어. 어때? 잘 나왔어?”

나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텔레비전에 나온 미녀가 내 가슴에 묻혀있다니, 퍽 비현실적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잘 나왔어. 아나운서보다도 네가 더 예쁘다 야.”

본인은 정작 부끄러워서 못 봤으면서도, 아영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봤어야 할 텐데...”

그녀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예상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다음 날.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 ‘고영식품 딸’ 혹은 ‘주가조작 인터뷰 녀’라고 불리는 아영이 때문에. 다시 본 텔레비전 클립이 1등이 고영식품 뉴스였으니까. 9시 뉴스가, 다른 예능 프로그램을 제치고 조회수 상위권에 올라온 것은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나도 다시보기로 몇 번을 봤다.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고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댓글을 보면 난리가 나 있었다.

‘와 진짜 여신이다 여신.’

‘이게 9시 뉴스라고? 드라마가 아니고? 저게 일반인이라고? 연예인이 아니고?’

‘웬만한 여자 연예인 뺨따구 때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인터뷰 그만 하고 배우하자 배우.’

‘고영식품이라고? 거기 어딥니까? 앞으로 3시 3끼 모두 고영식품으로 먹겠습니다.’

개중에는 ‘뉴스는 보긴 본건가?’ 싶은 댓글들도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아영이의 부모님이 결백하다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잘 됐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데, 그런 댓글들도 눈에 띈다.

‘와 존예네 존예. 내 꺼하자 아영아’

‘개소리 마시죠. 이미 제 여친입니다.’

“이 새끼들이...”

예전에 회사 인수 합병을 할 때나 공매도를 칠 때나

‘한상훈 이 듣보잡은 누구야?’

‘개 호구새끼가 이걸 사네?’

‘와 시발놈 공매도 안 빼냐?’

악플을 수도 없이 받아 본 적이 있었지만 그 것들보다도, 이 댓글이 더 기분 나쁘다. 여자 친구가 인터넷 상에 오르내리는 게 별로 그다지 유쾌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

9월 20일. 나는 아영이와 함께, 아영이네 부모님이 안장된 납골당을 찾았다.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는데, 아영이가 꼭 같이 와달라고 부탁해서 왔다. 생각해보면 살아계신 부모님 앞에 서는 것보단 덜 부담스러운 일 같아서. 아영이가 향을 피우고 합장을 하는 동안, 나 역시 옆에서 합장을 하고 속으로 기도를 해드렸다.

‘두 분 복수는 제가 대신 해드렸습니다. 앞으로 따님 천국에서 지켜봐 주시고, 보호해주세요.’

그렇게 분향을 마친 나는 다시 아영이와 함께 팔짱을 끼고, 분향소를 나왔다. 그런데 문득, 아영이가 내게 물었다.

“뭐라고 기도했어?”

“뭐 돌아가신 분들에게 할 말이 어디 있겠어. 하늘에서 잘 지내시고. 따님 잘 돌봐 달라 그랬지.”

“으음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영이가 말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옆에 있는 사람이 남자친구이자... 부모님 대신 복수해준 사람이라고 말하고 왔어. 고마운 사람이라고.”

나는 ‘탁준기를 보내버린 것도 나야’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걸 알고 있는 듯 했다. 애초에 비상건설 때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하고 찾아왔던 그녀였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내가 그랬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오빠가 한 거 맞지?’라고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연인끼리 모두 다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역시 알고 있었군...’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한 마디를 더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혹시... 또 모른다... 라고도 말 해놨어.”

“뭐가?”

그녀는 팔짱을 낀 본인의 가느다란 팔뚝으로 내 가슴을 톡 쳤다.

“뭐긴 뭐야”

떠오르는 단어는 딱 하나다 ‘결혼’.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억지로 그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 이 역시 서로 생각은 해도, 말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해두어야 할 것 같다. 한동안은 말이다.

*

그리고 9월은 이어지고 이어져, 9월 28일. 마침내 그 날이 왔다. 바쁜 9월 일정 중에서도 이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크로우의 보고가 있는 날. 궁금증을 푸는 날이다. 나는 최고급 호텔 뷔페의 가장 비싼 방을 예약해서, 그를 기다렸다.

‘뭐든 잘 먹습니다.’

라고 대답한 그를 위해서, 뭐를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놨어. 방식으로 대응을 한 것이다. 약속시간이 됨과 동시에, 크로우는 내 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나는 여느 때보다도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크로우.”

그는 커다란 봉투를 허리에 끼고 있다. 나는 그걸 보며 손을 맞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