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05화 (105/198)
  • # 105

    1억 짜리 휴가

    나는 벤치에 누워서 와이패드를 들어보았다. 화면에 나오는 것은

    ‘현영제약 반기보고서’

    내 네 번째 인수대상이 될 회사다. 85년 코스피에 상장된 시총 1조의 중견 제약업체. 하지만 반기보고서 내용은 영 꽝이다. 재무제표에는 적자를 의미하는 빨간색 숫자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영업이익은 그럭저럭 나오고 있었지만 연구개발비가 엄청나게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올해까지.’

    5년간 수천억 원의 연구비를 들여 개발해온 관절치료제가 내년 초. 미국 FDA 임상 3상 승인이 난다. 이게 되면 시가총액이 최소 두 배 뛴다는 게 투자업계의 정설이다. 그리고 그 정설은 실현이 된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신재은 회장과 그 가족 지분이 25.4%... 대충 환산하면 2500억 이거보다 많은 지분을 가져야 12시간 뒤가 인정해주는 대주주 요건이 성립이 되는데... 나머지 외국계 투자회사 JM파트너스 지분이 9.8%. 두리투자증권이 7% 연기금이 3%...’

    JM파트너스와 두리투자증권과는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다. 두 투자회사에게서는 5%대 프리미엄을 주고 지분을 가져오고, 나머지 부족분은 제 3자 배정 유상증자로 지분을 늘리기로 했다. 유일한 문제는 딱 하나.

    ‘한상훈 CEO가 유능한 투자자인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누구 밑에 있는 건 싫습니다.’

    신재은 회장이 혹시나 경영권에 간섭을 받을까 걱정하는 게 문제였다. 이해는 한다. 상장한지 50년, 길게 보면 일제 강점기 때 한양에서 고약을 팔던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회사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이거 넘기시오.’

    한다고 한들 그냥 넘겨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경영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단지 투자목적입니다.’

    그걸 설명하느라 꽤나 진땀을 빼야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3천억 이상 돈을 들여놓고 그냥 내버려 두시겠다고요?’

    신재은 회장이 끝까지 버티는 바람에

    ‘아오 시장가로 사버려? 진짜 적대적 M&A로 붙어봐?’

    그런 위기까지도 갔었지만,

    ‘보십시오. 카이게임즈, 블루E&M, OH엔터테인먼트. 전부 다 경영에 손 댄 것 없습니다.’

    장 부사장의 끈질긴 설득 덕택에

    ‘...그럽시다. 그럼.’

    결국 승낙을 얻어냈다. 다행이었다. 적대적 M&A를 하려면 돈이 수배는 들었을 테니까. 시총 1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카이게임즈 지분을 담보로 싸웠다면 결국 이겼을 테지만, 그래봐야 사이에 낀 다른 사람들만 좋은 일만 해줬을 것이다.

    ‘좋아 그러면 이것만 인수하면 바로 마스터 등급...’

    현영제약이 좋은 점은 하나 더 있었다. 코스닥에 현영바이오팜이라는 시총 400억짜리 자회사가 하나 더 있었다는 점이다. 작은 회사긴 하지만 엄연히 상장회사다. 현영바이오팜의 대주주는 현영제약이고, 현영제약의 대주주는 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는 두 회사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이 점은 ‘고객센터’를 불러서 확실히 확인을 해두었다.

    ‘좋아 그러면 이건 됐고...’

    나는 벤치 옆에 있는 작은 단상에서 녹색 모히또가 담긴 잔을 들어서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다음 이어서 MTS를 켰다.

    ‘어디 잘 되고 있나 볼까...?’

    그런데 그 때였다. 빨간색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는 흰 두 손이 와이패드 끝자락에 올라온다.

    ‘아...’

    하는 순간, 와이패드는 내 손 위로 사라진다. 내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거기에는 빨간색 비키니를 입은 이아영이 허리에 손을 가져간 채로 서 있었다.

    “아이 참 여기서는 일 생각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오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환상적인 몸매에 시선을 옮겨 갔다. 평범한 옷을 입어도, 몸매가 드러나는 초 글래머인 그녀가 비키니를 입고 있으니 완전 예술품이 따로 없다. 그 뿐이랴, 뒤로 펼쳐진 에메랄드 빛 해변과

    ‘끼룩 끼룩~’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보면, 한 편의 화보가 따로 없다. 그녀의 말이 맞다. 여긴 하와이, 여름휴가까지 와서 일 생각하는 건 좋지 않다. 쉴 때는 확실히 쉬어야 일할 때도 능력이 사는 법이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아... 그래. 미안.”

    그녀는 허리에 손을 가져간 채로 내게 말했다.

    “한 번 더 그러면 압수에요. 압수.”

    살짝 찡그린 표정이 오히려 더 귀엽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녀는 내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서 해변에서 놀아요. 같이.”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에 자연스럽게 빛이 나는 해변으로 향했다. 이곳은 하와이. 천혜의 절경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나는 여기서 내 여자 친구가 된 이아영과 함께 일은 머리에서 지워두고 신나게 놀았다. 그녀가 여자 친구가 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단순하다. 그 때,

    ‘제가 밥 한 번 더 살게요.’

    ‘좋아. 술만 안마시면.’

    주고받은 문자로 다시 만나서 밥 먹고, 이야기하다가 더욱 더 친해졌다. 바로 옆집에서 살다보니 가끔 왕래도 하고 문자도 주고받고, 또 데이트 하고 그러다가,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오빠 저거, 저거 빌려요. 커플 튜브. 재밌겠다!”

    친해지기 전까지. 아니 사귀기 전까지 몰랐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밝은 사람이었다. 도도하고 고압적인 태도는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것 뿐.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인이 숫기가 없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경계심이 들어서 그러는 것뿐이라고 한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한테 오히려 도도하게 대하게 된다나.

    뭐 좋다. 어찌되었든 내게는 잘하고, 귀엽게 애교도 부리고 하니까. 물론 화려한 외모와 백인 여자들조차 범접하지 못하게 만드는 육체미가 그 절정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커플 튜브를 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늘 위로는 따사로운 햇볕과 푸른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불가사리가 보이는 투명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파도는 넘실넘실 우리를 위아래로 기분 좋게 흔들어 준다. 나는 아영이의 손을 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하 여기가 천국인 것 같아.”

    그건 진심이었다. 장소도 좋고, 같이 있는 사람도 좋다. 마치 천국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곧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도 들린다.

    “저도요. 오빠.”

    *

    나는 한 손에는 파인애플 주스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이아영의 손을 잡고 호놀롤루 시내를 걸었다. 세계적인 휴양지답게 도시 내에서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나는 그걸 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녁은 뭘 먹는 다고?”

    하루 종일 물놀이를 했더니 꽤나 배가 고프다. 그녀는 내게 반대로 물었다.

    “오빠 혹시 그 프로그램 봤어요? 알아요? 얼마 전에 했던 미식스트리트? 하와이 편?”

    나는 고개를 갸웃 했다.

    “음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요새 먹방 프로그램이 수 없이 쏟아지고 있어서,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거기 나온 맛 집인데, 각종 신선한 해산물들을 하와이 고유의 방식으로 조리해 낸대요.”

    “아아 그래.”

    여행 일정 대부분은 그녀가 짰다. 나는 매일 회사 일 하느라, 매매하느라 바빴고, 그녀는 방학이어서 시간이 꽤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혼자서 여행 일정을 짠다고 해서 불평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호텔하고 식당까지 제가 다 잡을게요. 오빠.’

    그녀는 그런 것을 고르는 것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점은 나 랑도 잘 맞았다. 나는 그런 것을 귀찮아하는 편이었으니까.

    “하와이에서 당일 잡아 올린 참치를 특제 소스로 버무려서 포케를 만드는데...”

    그녀는 미식에도 조예가 깊어서 어디서 뭐가 맛있고 그런 것을 잘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어렸을 적에 그녀는 고영식품의 유일한 상속자였을 테니까. 놀라운 점은 그녀는 대식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연애 극초반에 부끄러웠는지 내 앞에서는 살짝 숨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본성이 드러났다.

    ‘오빠 이것도 하나 시킬래요? 오빠 양 적을 까봐.’

    그녀는 내 핑계를 대면서 혼자서 남자 1인분보다도 많은 양을 먹었다. 참 놀랍다. 많이 먹는 것도 많이 먹는 것이지만, 그렇게 먹으면서도 살이 하나도 찌질 않아서. 역시 몸매도 타고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면서 내게 말했다.

    “기대된다. 그죠?”

    나는 뭘 먹든 그녀와 함께 먹으면 맛있다.

    “응.”

    그런데, 그러던 중이었다. 그 맛집을 향해 걷던 중 그녀는 잠시 멈추어 섰다. 고개를 들어 이 곳 저 곳을 살핀다.

    “음... 이쯤인데... 안 보이지?”

    나는 휴대폰을 들면서 말했다.

    “식당 이름이 뭐라고 했지?”

    구글 맵을 켜서 보면 어딘지 알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식당 이름을 알려주는 대신, 길가는 한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Excuse me, is there a nicor's pier 38 around here?”

    완벽한 원어민 수준의 영어로.

    “Thanks. Bye.”

    한참 현지인 아주머니와 떠들던 그녀는 다시 내 팔에 찰싹 감겼다.

    “가요 오빠. 요 앞만 지나면 나온대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부러워.”

    “뭐가요?”

    “영어 잘하는 거.”

    이야기를 듣기로 그녀는 대학교 때뿐만이 아니라, 초등학생 때도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4년. 대학 4년. 도합 8년. 대학 때는 전공인 미술을 위해서 미국에 갔었지만, 초등학교 때는 완전히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갔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배워서 그런지 발음이 진짜 외국인 수준이다. 나는 그 나이 때 아버지 도장에서 잡일을 도와 줬었는데. 금수저는 그녀가 금수저고, 나는 흙수저다. 지금은 내가 더 돈이 많지만 그건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음 오빠도 몇 달만 배우면 잘 할거에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쎄 그게 몇 달 가지고 될까?”

    나는 이미 한 번 견적을 내 놓았다. 앞으로 미국이나 해외에 진출할 것을 생각해서 말이다.

    “봐서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이렇게 붙어 다니면서”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훗... 그래.”

    나는 다시 그녀와 함께 길을 걸었다. 그녀는 슬쩍 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본다. 아까 구글 맵을 켜려고 든 휴대폰. 눈치를 챈 나는 휴대폰을 내 바지에 집어 넣었다. 그녀는 내가 휴대폰을 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건 내 탓이 컸다. 하와이와서 까지도 계속해서 주가를 체크하고 그랬으니까. 주식 투자자의 어쩔 수 없는 버릇이긴 하지만. 그건 나도 미안하다. 나는 휴대폰을 넣으면서 생각했다.

    ‘뭐... 자동으로 매매되도록 알고리즘 짜놓고 왔으니까 잘 되겠지만...’

    나는 휴가를 떠나기 전에, 내가 없어도 주식이 자동으로 매매가 되도록 프로그램을 짜놓고 왔다. 내 컴퓨터는 내가 없어도 알아서 달력에 쓰인 호재에 맞춰서 주식을 사고, 일정 가격에 가게 되면 판다. 물론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단 못해서, 매일 1억 정도는 적게 수익이 날 수 밖에 없다.

    나도 부자고, 아영이도 부자고, 우리는 호텔서부터 먹는 것 노는 것까지 여행경비를 아끼지 않았지만, 사실 가장 크게 돈이 나가는 것은 그것이었다. 내가 직접 매매를 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건 감내하기로 했다. 그 돈까지 아까워했다간 나는 평생 휴가를 가지 못할 것이다.

    ‘일당 1억짜리 휴가라... 참 비싼 휴가군.’

    하지만 아깝지는 않다. 화려한 호놀롤루 시가지. 그리고 내 팔을 붙잡고 있는 절정의 미녀. 이걸 위해서라면 매일 1억도 그리 아깝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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