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80화 (80/198)

# 80

마스터T(2)

나와 탁준기 이사는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대화가 꽤 통했다.

“저는 어떤 주식이든, 그것보다 비싸게 팔 자신이 있습니다. 늘.”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유능한 투자자라는 점. 나는 눈을 내려 깔고 커피 잔에 담긴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늘 이기는 게임만을 하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주식이라는 건 누군가가 나보다 더 비싸게만 사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말이지요.”

그와 나는 ‘어떻게 유능한 투자자’이냐가 꽤나 다른 듯하다. ‘어떻게든’이란 말은 ‘나 작전 칩니다.’라는 말과 같다.

‘그의 곁에 작전 세력이 있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장 부사장의 그 말이 떠오른다. 그와 다를 정확하게 대조하자면, 나는 ‘미래의 주가를 알아보는 투자자’, 그는 ‘미래의 주가를 만드는 투자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금감원 사람들이 들었다면 바로 감방에 직행할만한 말을... 이런 자리에서 대놓고 하는군.’

하지만 그건 자신감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는 수연 그룹사람이니까,

‘정치계와 친해놓으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있을 겁니다.’

수연그룹은 우리나라에서 60년 동안 재계 순위 10위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곳이다. 당연히 정치 쪽과도 수십 년간 쌓인 인맥이 있었을 것이다. 탁준기 이사가 아무리 수연그룹 내에서 ‘내놓은 자식’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알게 모르게 비호를 받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럼 가든 엔비라는 건 그것을 위해서 만드신 겁니까?”

“하하 아닙니다.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유능한 투자자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분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겁니다.”

그 말을 하는데, 평소에 살짝 어투가 다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생각하는 것, 전부를 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한 대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꽤 외로움을 타는 편이거든요. 특히...”

그는 창밖을 두어 번 툭툭 치며 말했다.

“저런 사람들하고는 별로 교감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서요.”

나는 창밖을 보았다. 밖에는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 할어버지, 엄마와 아기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딱히 어떤 집단이라 특정할 수 없는 사람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저런... 사람들이요?”

내 말에 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왜 있지 않습니까.”

그는 양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위에 군림하는 사람과, 아래 지배당하는 사람. 저는 아랫것들하고는 영...”

그 말을 듣는데 조금 섬뜩하다.

‘이 사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살짝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그런 내 얼굴을 보더니

“하하하하하! 역시. 저는 우리가 동류인 것 같았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호탕하게 웃는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벌레들, 개돼지들.”

괴상한 욕을 해댔다.

“저는 그런 천한 것들을 매우 싫어해요. 저는 한 대표와 같이 부유하고 유능한 사람이 좋습니다.”

나는 속으로 꽤 놀랐지만 일부러 커피를 한 번 홀짝이면서 대답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군요.”

그러면서 나는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대충 알 것 같다.

“좋게 볼 수밖에 없지요. 29살에 600억 자산을 모으다니, 그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천재.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요.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다름이 아닙니다. 한 대표가 요새는 가든 엔비에 오지 않으니까. 대신 내가 만나러 온 것이지요. 어쩌다가 같은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지만 한 대표의 판단력과 내 힘이 결합되면... 어쩌면 더욱 큰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 큰일이라...’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두었다.

“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즈음에, 카페 뒤쪽에 있던 거구의 남자가 일어서서 탁준기 이사 옆에 섰다. 탁 이사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더니

“아 알았어. 먼저 가서 기다려.”

그에게 손짓을 했다. 그 거구의 남자는 나를 지나쳐 카페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탁 이사의 비서인 듯하다.

“바쁘신데 이야기가 길어진 것 같군요.”

나는 대화를 마치려고 했다.

‘벌레들, 개돼지들’

방금 전 그 대사를 듣고 나니 이 남자 앞에서 있는 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아닙니다. 그다지 바쁜 일도 아닌데... 멍청한 놈이 낄 데 못 낄 데 구분 못하고.”

그는 개인 비서한테도 그런 험한 말을 했다. 예전에 그런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대기업 회장 비서, 인간 이하의 취급 받아.’

이쯤 되니 나는 그가 매우 싫어졌다. 본성적으로, 인간적으로. 그는 내가 그와 마찬가지로 금수저로 태어나, 처음부터 남들 위에서 서서, 군림하며 살아온 자신과 같은 동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여태까지 살아온 사람이었다.

기연을 만나서 여차저차 남들 위에 서긴 했지만, 그와 같은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엿 먹일 수 있을까?’

가까이에 답이 하나 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카이게임즈 지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카이게임즈요?”

“네”

“아 그렇군요... 사실 저에게도 중국 쪽 친구들과 계획이 있었는데... 한 대표가 오면서 붕 떠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조금 더 홀딩하는 방향으로... 투자의 귀재 한 대표가 주식을 사기도 했으니까요.”

“오 그러시군요. 저는 될 수 있으면 탁 이사님 지분도 매입하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제 지분을요?”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경영에 참여 하려면 중국 쪽 지분만 가지고는 조금... 모자라다 싶어서요.”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으신다고...?”

나는 여기서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라는 거짓말로.

“거짓말입니다. 그건.”

“네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린 아이도 장난감을 쥐어 주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380억짜리 물건을 사놓고 제가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지 못한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되지요. 당연히 경영에 참여 할 겁니다. 게임도 조금 손 보고. 필요 없는 인원은 쳐내고요. 경영 효율화지요 경영 효율화.”

나는 그가 듣기 좋아할 만한 말을 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그는 다시 한 번 웃는다.

“푸하하하 그렇지요. 맞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380억짜리 물건을 사놓고 집에다 앉혀놓을 수 만은 없지요.”

그러다가도 그는 다시 바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제 지분을 사고 싶으시다?”

‘표정변화가 극적인 사람이로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네. 지분율을 50% 가까이 끌어올려서 이사도 바꾸고, 감사도 적당한 사람 앉혀놓고... 그래야 또 주가 부양하기도 쉽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탁 이사님이 가지고 있는 지분도 끌어 오고 싶습니다. 장내 매수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조금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까? 쓸데없이 개미가 꼬이기도 할 테고요.”

그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럼... 얼마를 주고 사고 싶으신지?”

역시나 핵심은 그거다. 나는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냈다.

“저는 288억의 주식을 380억 주고 샀습니다. 30%가까이 되는 프리미엄을 주고 산 것이지요. 탁 이사님 지분도 똑같은 프리미엄을 드리고 사겠습니다.”

내 말에 탁 이사는 꽤 놀란다.

“...똑같은 프리미엄으로?”

“네 그렇습니다.”

그도 그럴 만 할 것이다. 보통 1대주주와 3대주주의 지분은 지분 차이도 있지만 같은 양이라고 해도 같은 가치가 아니다. 1대주주의 지분은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3대주주도 그 지분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를 이렇게 저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걸 똑같은 프리미엄을 주고 산다니. 거의 5~10%정도는 더 가격을 쳐 주는 것이다.

“음... 확실히 나쁘지 않은 가격이로군요.”

그는 진짜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중국 쪽 대주주들과 ‘무슨 계획’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총 5%나 되는 지분을 깔끔하게 30%먹고 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오는 바람에 그 계획도 틀어졌으니 여기서 이 제안을 받고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너무 좋은 조건인데?’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역시 아주 호구는 아니다. ‘너무 좋은 조건’을 보고 한발 뒤로 빼는 것이. 나는 그가 듣기 좋아할만한 말을 한 번 더 꺼냈다.

“탁 이사님이 말한대로, 탁 이사님 그리고 수연그룹의 힘과, 제 힘이 합쳐지면,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겠지요. 이번 제안은... 제가 탁 이사님하고 좋은 인연을 시작하기 위한 계약금조로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그는 어느 때보다도 길게 웃는다. 역시 이런 걸 좋아하는 인간인 것 같다. 힘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고 좌지우지하는 걸 좋아하는 인간.

“좋군요. 그렇다면... 저도 다 그렇게 받을 수는 없고... 20%정도로 프리미엄을 받고 지분을 넘기겠습니다. 좋은 인연이 시작되려면... 저도 성의를 보여야 할 테니까요.”

‘흥 3대주주면 20%도 많은 건데. 생색내기는’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유 감사합니다. 탁 이사님.”

물론 이 가격은 ‘판타지 워 그라운드’의 성공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싼 가격이다. 탁 이사는 방금 호구 계약을 한 줄도 모르고.

“뭘요. 한 대표는 지분 늘리고 저는 돈 벌고 서로 서로 윈-윈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허허 웃었다.

‘흥 윈-루스다 요놈아.’

두 달 뒤 정도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싸게 주식을 팔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악수를 끝마칠 무렵

‘위이잉~’

그의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

“허... 멍청한 놈이...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네 그럼 제안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나는 거기서 대화가 끝나길 바랬다. 볼일 봤으니 이제 꺼저주었으면 하고. 그런데, 탁 이사는 자신의 외투를 입으며 한 마디를 더 하는 게 아닌가.

“아 그나저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무슨?”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놀랍게도

“한 대표가 가지고 있는 다른 회사 말입니다. CKD”

CKD이야기를 꺼냈다. 이름이 바뀐 지 언제인데.

“네”

“요새 사장이 바뀌었나요?”

“네. 사명도 바뀌었습니다. OH엔터테인먼트로.”

그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아~ 그래요오? 그래서 그랬구나?”

그는 내가 알 수 없는 말들을 해댔다. 내가 벙 쪄 있는데 그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조용히 말 한 마디를 더 했다.

“한 대표님 저는 나이고 있고... 그룹 일도 하다 보니 이쪽 이야기도 조금 더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주제넘게 충고를 하나 하자면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그의 입을 주시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그렇게 딱딱하게 운영하면 회사가 조금 어려워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에?”

“제 생각에는 전에 도찬기 대표가 있었을 때가 더 좋았어요. 여러모로.”

나는 고개를 한 번 더 갸웃했다.

“어느 면에서...?”

그런데 그는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다시 한 번 크게 웃더니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다음번에 다시 뵙겠습니다. 한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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