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77화 (77/198)

# 77

에이영(2)

‘뭐야...’

이아영의 집 안은 생각보다 난장판이었다. 소파 위에 겉옷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과자 봉지니, 빵 봉지 같은 게 널브러져 있었다.

‘혼자 도도한 척은 다하더니... 나보다 더 엉망으로 사네...’

하지만 그런 잡동사니보다도 집을 더 어지럽게 만드는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집 안의 그림들. 대개 인물이나 사물, 형이상학적인 현대미술 같은 것도 보인다. 정체가 뭔지, 의도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림들 말이다. 한쪽에는 하얀 캔버스와 유화물감들 있다. 모두 이아영이 그린 듯하다.

‘화가였나 이 아가씨? 아니면 그저... 취미?’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그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게 업혀 있던 이아영이

“으응~”

신음소리를 냈다. 알콜 냄새와 함께, 뜨거운 숨결이 내 귀에 들어온다. 화악 얼굴이 달아오른다.

‘제길’

어쩐지 화가 난다.

‘아니 이 아가씨는 어쩌자고 이렇게 하고 다니지? 다른 남자들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침대를 찾았다. 옆집이다. 우리 집과 구조가 동일했기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침실을 찾았다. 나는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A Yeong are you Okey?”

금발 미녀가 그녀의 이마를 짚으며 묻는다. 그녀는 입고 있던 폴라티가 불편했는지 자꾸만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금발 미녀는 그녀의 폴라티를 붙잡고 옷을 훌러덩 벗겨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그걸 감싸고 있는 진한 녹색의 브라가 드러났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름 매너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데, 마침 침대 반대편에 거울이 있는 게 아닌가. 문화차이인가, 이 백인 아가씨는 남자가 같은 방에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아영의 스커트까지 풀고 그대로 다리 아래로 내버렸다. 검은색 스타킹과 브라와 똑같은 진한 녹색, 화려한 문양이 있는 팬티가 눈에 들어온다.

3초 정도. 무의식적으로 봐버렸지만. 이 이상은 오히려 고문이다. 나는 눈을 감고 거기에 손을 올려버렸다. 그 때 이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으음... 추워...”

내가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백인 여자에게 말했다.

“I’ll go”

그녀는 답했다.

“Ah okey”

나는 눈을 떴다. 눈 감고 침실을 나설 수는 없으니까. 다행이도 백인 아가씨는 이아영의 발끝부터 목까지 이불을 씌워놓았다. 나는 죄책감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아영은 살짝 풀린 눈으로 백인 아가씨를 보더니,

“으음? 제시? 왜? Why are you here? 여기?”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말로 말했다. 끝이 살짝 올라가는, 전형적인 ‘나 취했소’하는 목소리다. 나는 그녀를 보며 한 마디를 더했다.

“...Please take care of her”

그리고 그 말을 남긴 채 침실 문을 나섰다. 그런데, 내 뒤로 이아영의 목소리가 한마디 더 들려오는 게 아닌가.

“으응? 옆집 오빠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뭐라고?’

이래저래 이상한 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태까지.

‘안녕하세요.’

‘새 차 사셨나 봐요?’

‘월세는 이 계좌로 보내주세요.’

같은 도도하게 사무적인 말만 하던 여자애가. 오빠라니. 나는 그 집을 나섰다. 바로 우리 집에 들어와 넥타이를 풀고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했던 말을 따라 해보았다.

“옆집 오빠네? 참 내...”

지금 보니 엄청 허술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다니. 저건 너무 위험한 짓이다. 저런 미녀가. 저렇게 자기 몸을 굴리고 다닌다는 건.

‘누가 나 업고 가세요.’

하는 것과 같다.

‘애가 저러고 다니는데... 저 집 부모님은 뭐하는 거지? 저 나이에 엄청난 부자인데...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살고... 백인 친구가 있고... 그러면... 무슨 검은머리 외국인이라도 되나?’

하여간 특이하긴 하다.

*

다음 날. 나는 HTS를 켜서 쥐고 있던 주식을 정리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100억원치만. 이틀이 지나면 구독료는 내는 날이다.

‘요번 달 성적은...’

350억 정도를 벌었다. 이정도면 기록 갱신이다. 12주 뒤 뉴스에서 두 개 정도 정보를 건진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아마 다음 달 부터는 더욱 더 상승폭은 가팔라 질 것이다. 12주 뒤 뉴스와 함께 12달 뒤 뉴스도 ‘달력 앱’에 재료를 제공해 줄 테니까.

‘좋아. 다음 달 되는 대로 인빅투스 증자해서. 자회사 두 개 더 편입하고 바로 마스터 등급으로 달려가자.’

주식 매매를 마친 나는 다시 메일함으로 돌아왔다. 남은 일을 하기 위해서. 남은 일이란 것은 인물 검색이다. 하루에 딱 두 번. 시간대를 골라서 사람 뉴스를 검색해볼 수 있다. 나는 서 비서가 지난번에 보내준 명단을 다시 보며 12달 뒤 뉴스에 검색어를 써넣어 보았다. 먼저

‘강현우’

23세. 연기자 및 모델. 생기긴 잘 생겼다.

‘하지만... 이름이 너무 흔한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써 넣어보았다.

‘강현우 후반전 슈퍼 세이브’

동명이인 골키퍼가 있으시다. 무명은 이게 문제다. 동명이인 다른 사람에게 뉴스를 뺏긴다. 나는 이어서 다음 프로필을 보았다.

‘은수민’

22세. 아이돌 지망생.

‘지망생이라... 22살에?’

22살이면 아이돌 치고는 살짝 늦은 편이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 써넣었다. 그런데

‘은수민 아이돌매니저 108. 신들린 랩으로 무대 장악’

뉴스가 떴다.

‘오.’

나는 그걸 클릭해보았다.

화제의 프로그램 ‘대국민 아이돌 매니징 프로그램 아이돌매니저 108’에서 은수민(22)이 엄청난 랩 실력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다. 이번 개인 미션에서 그녀는 FutureY의 ‘하얀 행복’을 완벽하게 소화해 심사위원과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이번 공연은 인터넷에서 이달의 클립으로 선정될 정도로 파급을 일으켰으며 이에 그녀의 순위도 수직 상승 7위에 랭크되어...

‘아이돌매니저 108.’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각 소속사 아이돌 지망생들을 모아서 걸그룹으로 데뷔시켜주는 인기 서바이벌 프로그램. 여기서 7등을 했다니 대단하다. 이 순위를 유지하면 프로젝트 걸그룹으로 데뷔를 하게 되며 사실상 성공을 보장받게 된다.

나는 유투브에 ‘OH엔터 은수민’을 검색해보았다. 있다. 영상이. 어느 무대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모습.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파워풀한 목소리와 명확한 발음이 인상 깊다. 댓글도 전부.

와 얘는 언제 데뷔 하냐. 진짜 대단하다.

나오면 가짜 랩하는 애기들 다 씹어 먹을 듯... 엄청나다.

얼굴도 예쁜데... 랩도 잘하네.

칭찬 일색. 나는 기사를 더 읽어보았다.

...랩 파트 선생인 ‘레오’는 은수민의 랩을 극찬하며 ‘솔로 래퍼로 활동해도 무리가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소속사 OH엔터테인먼트를 나온 뒤 개인연습생으로 혼자 연습을 해오던 은수민은 그 칭찬을 받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응? 소속사를 나왔다고?’

나는 더 검색을 해보았다. 아이돌매니저 108 다음 시즌은 내년 초여름에 열린다.

‘그 사이에 나갔어?’

나는 휴대폰을 들어 바로 전화를 걸었다. 권 사장한테. 권 사장은 바로 내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네 사장님 잘 지내셨지요?”

“물론입니다.”

나는 상투적인 인사를 몇 번 주고받은 뒤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연습생 중에 은수민이란 아이 있지 않나요?”

“네 대표님. 아십니까? 연습생인데?”

“네. 개인적으로 관심이 생겨 알아봤습니다. 유투브니 뭐니...를 통해서요.”

“오 그러셨습니까?”

“네. 그런데 이 아이는... 나이가 꽤 있는데 데뷔... 안 시키셨나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실력은 충분한데... 지난번에 데뷔 직전까지 갔다가 프로젝트가 업어지는 바람에... 붕 뜨게 되었습니다. 그게... 2년 정도 되었네요.”

“그래서... 재계약 같은 건 안하시고요?”

“실력만 봤을 땐 저도 재계약 하고 싶은데... 본인이 조금 지친 모양이더라고요. 여기서 연습생만 7년 가까이했는데... 재작년에 데뷔가 무산되니까.”

“음... 저는 얘가 스타성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십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권 사장은 내게 ‘묘한 예지력’같은 게 있다고 믿었다.

“네. 유투브에서 보니까 알겠더군요. 저는 이 아이 조금 더 우리 회사에 잡아두고 싶어요.”

“그러신가요? 대표님이 그렇게 보신다면 저도 그렇게 고려해보겠습니다.”

“네 그래주세요.”

나는 통화를 마치고 다시 12시간 뒤 메일함으로 돌아와 보았다. 다시 한 번 기사를 읽어보려고. 그런데, 메일함에 메일이 하나 더 와 있다. 다름 아닌 정정보도다. 내가 권 사장에게 말 한마 디 한 것 가지고 벌써 미래가 바뀐 모양이다.

‘소속사 OH엔터테인먼트에서 8년간 연습을 해왔던 은수민은 그 칭찬을 받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이고... 이러나 저러나 결국 울긴 우네...’

스토리는 조금 달라도, 맺힌 게 많긴 많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회사 소속으로 7위를 했으니 됐다. 이 아가씨는 OH엔터테인먼트의 차기 스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좋았어. 한 건 올렸고.’

나는 이렇게 인물 검색은 잘 써먹고 있었다. 매일 12달 뒤 뉴스에서 OH엔터테인먼트 소속사 뉴스를 다 찾아보고 있었으니까. 슬롯이 두 개여서 두 달 정도 더 돌리면 소속 아티스트는 다 검색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랭킹뉴스는 조금 계륵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전에 로또를 받은 이후로, 기회가 남아 썼지만 정치에서

‘현직 당대표와 여비서의 섹스 스캔들’

그리고 경제에서

‘정부 9.10대책 발표 새로 선정된 투자과열 지역은?’

클릭수만 많고, 돈이 되지 않는 뉴스를 받고 조금 실망을 했다. 하지만 요번 달은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12달 뒤. 랭킹 뉴스. 12달 내에서 가장 핫한 뉴스라면 뭔가 돈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한 카테고리는 IT/과학이다. 여기서 혹시 무슨 신기술이라도 뜬다면 돈을 긁어모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나온 뉴스는

‘판타지 워 그라운드 게임사의 역사를 새로 쓰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PC게임 2위에 올라.’

세상에. 가장 많이 본 뉴스도 ‘판타지 워 그라운드’이야기다.

‘엄청나게 흥행하긴 했나보다...’

이런 조그만한 회사에서 역대 2위라니. 절대. 절대적으로 인수를 해야 한다.

‘장 부사장 미팅 끝나고 오면 한 번더 당부해야겠다. 반드시 인수를 해야 한다고.’

*

그날 저녁 오후 6시. 기다렸던 대로 장부사장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님 상해입니다. 오늘 첫 미팅 끝냈습니다.”

“오 그러세요? 뭐라던가요?”

“이 녀석들 비싸게 팔고 싶어서 별별 수를 다 쓰더군요. 일단 하루 밀고 나왔습니다. 내일 봐서 다시 당기려고 합니다.”

“잘하셨군요. 하지만... 너무 밀진 마세요. 결국 우리 손으로 들어오게... 당길 땐 강하게 당겨주세요. 저는 꼭 이 회사 사고 싶습니다.”

“네 사장님. 걱정 마십시오.”

거래는 예상대로 잘 될 것 같다. 아무리 비싸게 팔려고 해도, 우리도 그쪽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그쪽도 계속해서 고압적으로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좋아 그러면 여기에 사파이어TV까지... 엔터와 개인방송, 게임 세 개가 합쳐지면 시너지가 꽤 날 거야.’

내가 박수를 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띵~동~’

자주 울리지 않는 우리 집 문 벨이 울렸다.

‘누구지? 택배 시킨 것도 없는데.’

나는 문고리를 잡고 돌릴 때가 돼서야 깨달았다.

‘아... 집주인’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아영이 서있다. 트레이닝 팬츠에 통이 큰 티셔츠. 평소보다 편한 복장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로 어제 흐느적거리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시 절제되고 도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그래도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입을 뗐다.

“저어... 제가 어제 친구한테 듣기로 제가 그쪽에게 업혀 들어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네. 그 백인 친구? 분이 주차장에서 도움을 요청하시기에 댁까지 업어다 드렸습니다.”

“감사해요. 제가 이거...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할지.”

“사례라니요. 괜찮습니다. 이웃끼리 도울 일 있으면 돕고 사는 거지요.”

이아영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감사해서... 사례는 제가 따로 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사례는 필요 없는데...’

하지만 내가 뭐라고 더 하기 전에, 그녀는 그 말을 남긴 뒤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 방금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쪽에게 업혀 들어왔다고...’

어제와는 대단히, 차이가 있는 호칭이다.

‘그쪽? 오빠는 어디가고 그쪽이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을 닫았다. 나는 그녀의 분류 카테고리에, 부자, 미녀, 글래머. 거기다가 추가로 이상함을 하나 더 추가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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