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69화 (69/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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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재회(2)

    노란색, 갈색 머리를 한 남자 아이들 다섯이 일시에 손을 펴 보이며 말한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하트~ 헌터즈입니다.”

    소위 ‘아이돌 식 인사’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것을 이렇게 직접 눈 앞에서 보니 신기하긴 하다.

    “리더 성진입니다. 팀에서 춤과 보컬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프란츠입니다 팀에서 랩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마하입니다. 팀에서 춤을 맡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보이그룹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완전히 처음 보는 것 같다.

    “네 그래요 반가워요.”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지나간 이후로는 발랄하게 생긴 여자애들이 와서 인사를 한다.

    “예쁘게 봐주세요! 업타운걸즈입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그 아이돌 식 인사를 받았다. 보이그룹과 다르게 유명한 걸그룹은 대충 아는 편인데, 이 친구들도 아예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확실히 걸그룹답게, 미모는 출중하다. 강남대로를 걸어 다니면 남자들 시선이 자동으로 따라갈 것 같다. 그녀들은 각자 포즈와 자기 소개가 따로 있었다.

    “비너스 세린”

    “쥬피터 수진”

    “머큐리 하영”

    ‘이 쪽은 세일러 문이 컨셉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들과 악수를 했다.

    “네 반가워요, 잘해주세요.”

    한참 인사를 받던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헤...’

    서 비서는 살짝 입을 벌리고 그 업타운걸즈를 보고 있다.

    “서 비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화들짝 놀라 내게 말했다.

    “네 사장님”

    “이거 끝나고, OH엔터테인먼트 소속 연기자든 가수든 그룹이든, 연예인들... 그리고 연습생까지 모두 이름 조사해서 내게 보내줘.”

    “네 알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한 마디를 더 했다.

    “예명 말고 본명까지.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수 많은 연기자, 배우들, 가수들이 나와 악수를 하고 갔다. 다들 연예인이라고 하는데, 진짜 처음 본다. 어디서 스치듯 본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 투성이다.

    ‘하긴 텔레비전은 성공한 연예인들만 비추기 마련이니까... 요새 걸그룹도 일 년에 백 개가 넘게 나온다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 모습은 잘생기고, 예쁘고, 화려하지만, 거기 안에 드는 사람은 정말 소수다. 대중들은 연예계의 좋은 단면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악수가 끝날 즈음.

    ‘웅성웅성’

    살짝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하는 순간, 꽃미남 청년이 나를 보며 걸어왔다. 여태 별 말 없던 권 사장이 한 마디를 한다.

    “한 대표님 김준형 씨입니다.”

    ‘아 이사람.’

    합병 전 CKD의 에이스 김준형이다. 이 사람은 여러 번 보았다.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그는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김준형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직접 보니 엄청난 조각 미남은 아닌데, 인상이 선하고 밝아 보인다. 서글서글 웃는 게 여자들이 넘어 갈만 하다.

    ‘중국에서 찍었던 작품이 한한령에 막혀서 못나오고 있다고 했지.’

    나는 그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아 그래요. 저도 최근 나왔던 사극 영화 있지요?”

    “아 네. 바람과 파도 말씀이시지요?”

    “아 맞아 바람과 파도. 그 때 세자 역할 하는 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준형과의 인사가 끝나갈 무렵. 다시 한 번 그 웅성임이 들려왔다. 나는 대충 누가 오는 지 감을 잡았다.

    ‘또각 또각 또각’

    구두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오현주다. 명실상부한 OH엔터테인먼트의 에이스.

    “반갑습니다. 대표님”

    “반갑습니다. 오현주 씨.”

    우리는 오히려 짧게 인사만을 주고받았다. ‘그 때 그 일’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일로 되어 있으니까. 다른 사람 눈이 있을 때는 처음 만난 사이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연예인들과 인사를 끝마친 후, 나는 권 사장과 함께 OH엔터테인먼트의 사장실에 들어왔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 대표님”

    “제가 뭘요. 권 사장님이 수고 많으셨지요. 어찌되었든 이걸로 이 쪽 일은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요. 전에 말씀 드렸던 대로, 회사 일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는 않겠습니다. 권 사장님이 알아서 잘 해주세요.”

    “네 대표님”

    “단. 그... 가끔 제가, 사람을 추천하거나, 비추천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추천이나 비추천이요?”

    “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그래서 회사 연예인들 중에... 누군가 잘 될 것 같다. 아니면 조금 문제가 될 것 같다. 싶으면 그 때 가끔 연락드리겠습니다. 자주 드리는 건 아니고 정말 가끔. 하지만 그 때는 제 의견을 한 번쯤 검토해주세요. 면밀하게.”

    권 사장은 빠르게 눈을 껌뻑거리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대표님 말씀이라면 틀림없겠지요.”

    그는 나를 약간 신비스러운 인물로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만 하다. 29살에 자본금 300억 투자회사의 대표라고 하니까. 예전에 참치 전문점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실례지만... 아버님이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게 그렇게 묻기도 했다.

    ‘신비하긴 하지. 매일 오는 메일이.’

    이것으로 공식적인 일은 모두 끝났다. 나는 서 비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아 참. 그... 매니저분.”

    “매니저 분이요?”

    “그 오현주 씨 매니저 분좀 여기로 불러주세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사정은 몰랐겠지만, 권 사장은 두말없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

    문이 열리고, 들어온 남자가 말없이 인사를 한다. 다름 아닌 오현주의 매니저다.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앉으세요.”

    그는 내가 권한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팔걸이를 잡는 손이 살짝 떨린다. 도둑이 제발을 저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제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제가 그때 오현주 씨에게 명함을 건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말이 나오자 그는 바로 의자에서 나오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 때 받은 명함을...”

    나는 그를 무릎을 꿇이려 부른 건 아니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빌었다.

    “그런데 이렇게 거물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본인 생각이 맞다. 그 땐 거물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매니저님을 부른 건 탓하려고 부른 게 아닙니다.”

    “네? 그럼...?”

    “일단 앉으세요. 몇 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의자에 앉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보통 매니저들은 일반인의 접근은 차단하는 게 일이지요?”

    “네. 일단 일반인들의 개인적인 접촉은 제가 컷트합니다. 오현주 씨 본인이 어떻게 하시는 건 몰라도요.”

    그는 단지 매니저의 본분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면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그 때 제 명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현주 씨에게는 뭐라고 했나요?”

    “명함은 버리고, 오현주 씨에게는 다른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요? 오현주 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고... 이상하다고 몇 번이나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도 변명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문자를 보내긴 보냈나 보다. 그것도 여러 번.

    ‘그래 번호 물어봐 놓고 문자 하나 보내지 않았던 건 아니었구나.’

    나는 슬쩍 돌려 물었다.

    “오현주 씨는 남자친구 눈치는 안보시던가요?”

    “오현주 씨는 데뷔 이후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회사도 관리를 하기는 했지만... 본인도 일에 대한 열정이 너무 대단해서요.”

    나는 기뻤지만 일부러 겉으로는 얼굴을 굳혔다. 그걸 듣고 좋아하면, 매니저가 이상한 상상을 할지도 모르니까. 우습게도, 매니저는 굳은 내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그 때는 오현주 씨가 CF 촬영 일자도 잡혀 있고, 영화 오디션도 봐야 해서...”

    나는 그를 만류했다.

    “아아 괜찮습니다. 다 이해 합니다. 저도 회사 생활 해봤습니다. 일단 자기 일은 해야지요. 전후 사정이 어쨌건 간에.”

    내 말에, 매니저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른 걸 물었다.

    “그나저나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서른 넷...”

    생각보다 많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니. 나이보다 꽤 동안이다.

    “결혼은 하셨나요?”

    “네. 아들 둘 딸 하나 해서 자식도 셋 있습니다.”

    그는 마치

    ‘처자식이 있으니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 때문에 물어 본 건 아닌데.’

    “아 네 그러시군요... 그러면 지난 번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넘어가지요. 대신...”

    나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품에서 지갑을 꺼내고, 거기서 다시 한 번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잘 가져다 드리세요.”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대표 한상훈’

    새 명함에는 회사명과 직위가 바뀌어 있다. 명함이 바뀐 대로, 그걸 받는 사람의 태도도 바뀐다. 그는 이번에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내 명함을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오현주 씨에게 그 때는... 매니저님이 번호를 잘못 외우셔서, 문자가 잘 못 갔다... 라는 걸로 해주세요. 슈퍼스타의 문자를 받고도 무시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 점은 제가 적극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요. 그럼 앞으로도,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해주시길. ”

    “네”

    “아 이번 일 때문에 회사 방침을 바꾸거나 하지는 마세요. 그건 원하지 않으니까.”

    매니저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

    “앞으로도 접근하는 일반인들 막아 달라고요. 오현주 씨는 우리 회사의 최고 매출원이니까.”

    그는 그제야 내말을 알아들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

    집으로 오는 길. 내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한상훈 대표님. 오현주예요. 그 때 저희 매니저가 전화번호를 잊어버려서 감사 문자가 못 갔지 뭐에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릴게요. 그 때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씨익 웃으면서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번호를 저장해두었다.

    ‘오현주’

    그걸 마칠 때 즈음. 서 비서가 물었다.

    “사장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그의 질문은 대개 이것이다.

    ‘회사? 아니면 집?’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집. 집으로 가자.”

    “네 사장님”

    서 비서는 나를 태우고 내가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쉬러 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일하러 가는 것이었다. OH엔터테인먼트 인수는 이것으로 성공리에 끝났다. 이제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다시 돈을 버는 일이다. 마스터 등급을 다는데 필요한 것은 지배 회사가 5개. 그것을 달성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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