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46화 (46/198)
  • # 46

    G. E.

    ‘오늘은...’

    나는 턱에 손을 괸 채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국회 파행 언제까지’, ‘난립하는 커피 전문점’, ‘프랑스에서 난민’, ‘멸종 위기의 코뿔소’. 이제 워낙 익숙해져서 키워드 몇 개만 슬쩍슬쩍 봐도 기사가 돈이 될지 안 될지 바로바로 판단이 된다.

    ‘별 게 없네.’

    나는 이어서 이름 검색 창에 커서를 갖다 댔다. 지난번 CKD엔터 사태 때 이후로 딱히 생각 나는 이름이 없어서 나는 요새, 이 사람 저 사람 정재계의 유력자들 이름을 넣어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 이름은 넣어봤으니까... 오늘은... 기획재정부장관 이름이나 넣어볼까’

    기획재정부는 우리나라 행정의 돈줄을 쥐고 있는 부서다. 과기부, 외교부, 법무부, 행안부 등 많은 행정부에서도 가장 힘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이 될 만한 뉴스가 가장 먼저 튀어나올 만한 곳이기도 하고.’

    기재부 장관 이름은 강준석이다. 나는 ‘강준석’을 집어넣어보았다.

    ‘강준석, 10월 컴백 초읽기’

    뜬금없는 컴백 이야기가 나온다.

    ‘뭐야 강준석... 누구지?’

    나는 포탈창에 ‘강준석’을 검색해보았다. 점잖게 생긴 퉁퉁한 아저씨가 먼저 뜬다. 55년생 강준석 현 기획재정부 장관. 내가 찾던 사람은 이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아래로 얄상하게 생긴 미남형 얼굴이 따로 있다. 92년생 강준석 보이그룹 ‘이터널’의 멤버.

    ‘아이돌이었구나...’

    남자 아이돌은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에잉 다 꽝이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 할 일은 없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음 그럼 오늘은... 점심에 뭘 먹을까?’

    예전에는 보고서는 어떻게 넣어야 하나, 학자금대출은 어떻게 갚아야하나, 그런 게 걱정이었다면 요새 점심 뭐 먹을까, 저녁에는 뭘 하고 놀아야할까 그게 고민이다.

    ‘스시나 먹으러 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해야 할 일이 하나 떠올랐다.

    ‘맞아. 오늘은 은행부터 가야지.’

    지난 번 두 번의 매매에서, 나는 깨달았다. 한 계좌로 50억 이상의 돈을 굴리는 건 바보짓이란 것을. 한 계좌에서 너무 많은 매수를 하다 보니 나를 따라서 매매하는 기관, 외국인, 개미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럴 땐 돈을 쪼개서 복수의 계좌로 주식을 사고 팔아야한다. 히어로가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마스크를 쓰고 다니듯, 나도 주식시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1인 2역. 1인 3역을 할 필요가 있다.

    ‘음... 어느 은행에 갈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지난번에 신용카드를 만들었을 때 만났던 김혜숙 과장을 떠올렸다.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정중했다. 나는 지갑을 찾았다. 침대 옆에 내 지갑이 있다. 보테가베네타. 60만원정도 하는 새 지갑. 물론 더 비싼 걸로 살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은 의미를 잘 모르겠어서 내 눈에 가장 예쁜 걸로 샀다. 나는 거기서 명함을 찾아냈다.

    ‘과장 김혜숙’

    나는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

    대기음이 세 번 채 울리기도 전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네 김혜숙 과장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

    “그러니까 저희 은행 증권 계좌를 새로 만드시고 거기에 35억을 이체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김혜숙 과장은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몸을 꼬며 인사를 했다.

    “어휴 정말 감사합니다. 고객님.”

    받는 사람이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장된 인사다.

    ‘이게 이 분 영업 방식인가... 하긴...’

    은행에 취직한 대학 동기가 했던 말이 있다. 다른 회사와 달리 은행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윗선과 닿는 인맥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인맥도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돈 많은 부자들과의 인맥.

    은행업이란 본래 이자를 싸게 주고 돈을 빌려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비싸게 받아 돈을 버는 사업이다. 예금도 많이 하고 대출도 많이 하는 건 모두 부자다. 그래서 실적을 내려면 영업을 할 부자들과의 인맥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이 은행이 있는 청담동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여기랑 여기에 사인만 해주시면, 즉시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인을 하는 와중이었다. 김혜숙 과장이 한 마디를 꺼냈다.

    “저...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제가 좋은 제안을 해도 될까요?”

    나는 사인을 하다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VVIP플랜 말인가? 지난번에 거절했을 땐 얌전히 물러나더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제 재테크는 제가 합니다. 그 VVIP인가 뭔가는...”

    그런데, 그녀는 내 말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은행과 별개로 제 개인적인 제안인데요...”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내 앞에 건넸다. 그건 평범한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의 명함과 달리, 검은색 바탕에 빨간색 글씨가 새겨져 있는 특이한 명함이었다.

    ‘뭐야 이거?’

    나는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

    ‘G   E’

    명함에는 좌상단에 붉은색으로 알파벳 두 글자만이 쓰여 있었다. 아무리 명함을 둘러봐도 그 두 글자 밖에 없다.

    ‘무슨 명함이 이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혜숙 과장이 옆에서 조용하게 속삭였다.

    “여기는 자산이 50억 이상으로 확인된 사람만이 가입 가능한... 일종의 투자자들 사교클럽입니다. 한상훈 고객님처럼 젊은 투자자분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나는 명함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수상해보인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사교클럽이면... 김 과장님도 이곳 소속이신가요?”

    내말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휴 아니요. 저는 그 만큼 부자가 못 돼서 가입은 못하고요. 단지 여기 클럽 회장 되시는 분이 회원 모집중이라고 자산이 일정 이상 되시는 분들에게 안내를 해달라고 하셔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웃고 있다. 정돈된 품행과 친절한 말투,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 살짝 위험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본래 주식이란 위험이 있는 곳에 기회도 있고, 기회가 있는 곳에 위험도 있는 법이다.

    ‘사교 클럽이라면 일단 정보가 오가는 곳. 게다가 자산이 일정 이상인 부자들의 사교클럽이라면 고급 정보가 오갈 가능성이 높다... 누가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한다면, 역으로 사기를 칠 수도 있겠지. 나에게는 12시간 빠른 정보가 있으니까. 그럼 여기서 뭐라고 하는지나 들어 볼까?’

    생각이든 나는 최 과장과 마찬가지로 속마음을 숨기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와 감사합니다. 저도 정보를 공유할 투자자들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오 그러세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명함을 뱅글뱅글 돌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명함으로 뭘 하죠? 알파벳 두 개 말고는 아무것도 쓰여 있는 게 없는데...”

    “아 이 클럽은 초대받은 분들만 가입 가능한 모임이라서요. 호호. 가입 권유를 받고 이에 동의하신 분에게만 효력이 나게 해드리고 있어요. 시간 나실 때, 명함을 붙잡고 3분정도 있어보세요.”

    ‘명함을 잡고 3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녀가 한 마디를 더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제의는 저희 은행과는 전혀 관계없이, 제 개인적인 제안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시겠지요?”

    그녀는 예의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었다. 잘 조각된 미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명함을 집어들었다.

    “걱정마세요. 그나저나 사교 클럽이라... 재밌겠는데요?”

    이 명함이 나를 잡아 먹으려 입을 벌린 이무기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잡아 먹히기로 했다. 그 안에서 녹아내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이무기에게 삼켜진다 한들, 나는 그 안에서 살을 베고 나올 것이다.

    *

    업무를 마치고 은행에서 나온 나는 바로 주머니에서 그 명함을 꺼내보았다.

    ‘3분이랬지.’

    은행 밖으로 나온 나는 그 명함을 꾸겨지지 않게 살짝 쥐었다. 그런 다음 3분 정도 지났을 때 그 명함을 들어보았다. 3분 동안 체온으로 달궈진 명함은 완전히 하얘져, 숨겨져 있던 글씨가 드러났다. G와 E가 있던 장소에는 두 단어가 쓰여 있었다.

    ‘Garden Envy 상위 0.1%투자자들을 위한 정보 공유 클럽’

    ‘가든 엔비? 부러움의 정원 혹은 질투의 정원 정도 되나?’

    그 아래로는 안내 문구가 있다.

    ‘이 명함은 처음 오시는 분에게는 초대장 역할을 합니다. 처음 오실 때 꼭 소지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명함을 뒤로 돌려보았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라는 시간과. 약도가 그려져 있다. 약도에 나온 위치는 청담동에 위치한 빌딩. 이 은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음... 목요일이면 바로 오늘인데?’

    밤에 할 일도 없었는데, 잘됐다. 나는 오늘 밤, 그곳에 찾아가기로 했다.

    *

    “여기 내려주세요.”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약도에 나와 있는 건물은 놀랍게도 대로 앞에 있었다. 1층은 외제차 영업점이 있고, 2층에는 디저트카페가 있고, 3층부터는 안과 내과 한의원 등등이 들어와 있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빌딩이었다.

    ‘이런 데서 비밀 모임을 한다고?’

    나는 건물 9층을 올려다보았다. 비밀 모임이 이뤄지는 곳. 창문에

    ‘임대’

    두 글자가 붙어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 40분. 입장까지 20분이 남았다. 나는 먼저 들어가서 눈치를 보기로 했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을 눌렀다.

    ‘위이이잉’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갑자기 5층에서 멈췄다.

    ‘뭐야?’

    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그 앞에는 온화하게 생긴 아저씨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으로 보인다. 그는 나를 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엉겁결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사이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왔다. 순간 은은한 한약 냄새가 났다. 나는 빌딩 안내를 보았다. 5층. 강남신성한의원.

    ‘여기 원장님이신가?’

    나는 슬쩍 그를 훔쳐보았다. 원장님답게 점잖게 생겼다. 그런데, 그는 문이 닫힐 때까지 다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도 9층에 가?’

    생각해보니 애초에 퇴근하려고 1층이나 지하1층에 가려고 했다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탔을 리가 없다. 엘리베이터는 9층에 도착하고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앞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만이 서 있었다. 키는 나와 비슷한데, 피부가 검고 눈이 예리하다. 거기에 광대가 나와 있어 다부진 인상이다. 그는 나보다 앞서 간 한의사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신 원장님 간만이시네요. 요새 왜 안 오셨어요? 본인 건물에서 하는 행사인데”

    ‘본인 건물?’

    이 빌딩은 저 한의사 소유인듯 하다.

    “하하 요새 퇴근하고 애들이랑 노는 게 좋아서요. 잘 지내시죠?”

    “아 예 지난번에 주신 공진단은 잘 먹었습니다. 경기 전 감량할 때 먹으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하하 그래요. 다음번에 출근할 때, 한의원 먼저 들리세요. 또 몇 개 드릴 테니.”

    “네 원장님. 그럼 들어가시지요.”

    ‘신 원장’이라 불린 남자는 나를 앞서서 건물 안쪽 복도로 들어 가버렸다. 이제 나와 그 남자만이 남았다. 그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내게 말했다.

    “처음 뵙는 분인데... 초대장 있으신가요?”

    나는 지갑에서 그 검은색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그 명함을 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오십시오. 상위 0.1% 투자자들의 정보 공유 클럽. 가든 엔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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