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43화 (43/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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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혹은 거짓

    “띠리리리~”

    알람에, 나는 잠에서 깼다. 눈앞에 낯선 천장이 펼쳐져 있다. 예전에 살던 곳보다 높다. 너무 높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 안은 살짝 썰렁하다. 55평짜리 오피스텔인데, 거기를 채우고 있는 가구 같은 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 뉴스 확인하고 오후에는 다시 쇼핑이나 나가자.’

    나는 주방에 걸어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 다음 커피를 내려서 창가에 다가갔다. 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더를 말아 올리자 창 밖 풍경이 드러난다. 오전 8시 10분. 강남역 주변은 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출근을 하는 사람들,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일주일 전만해도 저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누군가 ‘노동은 신성하다’고 했지만, 얼마 전까지도 그 노동에 시달렸던 나로서는 잘 공감이 가지 않는다. 물론 나라고 해서 일을 하면서 즐거웠던 적이 없었던 것 아니고 보람을 느낀 적 없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이 모두 억지로, 고통을 참아가며 해왔기 때문에, 그 말을 긍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득 예전에 유투브에서 크리스 락의 ‘경력Career’에 관한 동영상을 본 것이 생 난다. 크리스 락은 지금 얼굴만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코메디언이지만, 젊었을 적에는 동네 레스토랑에서 남들이 먹고 남은 접시 청소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닦고 닦고 닦고 닦고’

    하루 종일 닦아서 쥐는 돈은 겨우 백만 원 정도 되는 돈.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접시 닦는 일은 그걸 계속한다고 해서 돈이 더 되는 것도 아니고, 더 능숙해진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밤에는 접시닦이를 하면서도 낮에 코메디언 면접을 봐 성공을 해냈다. 그 이후로 그가 했던 일. 영화나 드라마나 시트콤은 모두 그의 경력에 쌓이게 된 것이다.

    지난 회사에서 버티다 못해 사표를 던지고 나온 나였지만 나 역시 일하는 것 자체가 싫은 사람은 아니었다. 누군들 어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서는 걸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크리스 락처럼 자신의 일에 인생의 열정을 쏟아 부울 만한 일이 있다면, 그래서 남들에게 칭찬받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 역시 평생의 일로 삼고 그걸 하고 싶다.

    ‘노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서 새 일도 알아보자. 경력도 쌓이고 가치도 창출할 수 있는 새 일을 말이야’

    학창 시절에는 돈에 막혀서 창업을 실패했지만, 이제 돈 걱정은 없으니 그런 일에도 도전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도전. 회사 다닐 땐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던 단어인데, 이제 내 오피스텔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다보니 그런 생각도 든다. 지금 이 시간 대에 잠옷 차림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역시 사람이 여유가 있어야 돼. 고맙습니다. 12시간 뒤 기연을 보내주신... 누군지 모를 사람.’

    나는 잠시 어디 존재할지 하지 않을지 모를 그 사람 혹은 그 신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올려보았다. 내 오피스텔 맞은편에는 수성그룹 강남 사옥이 있다. 수성그룹 강남 사옥은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우리나라 제일의 부자 지창우가 출퇴근을 한다는 곳.

    한번 사는 인생이라면, 누구나 이 아래에서 오가는 사람 중 하나가 되기보다는 저 위에 내려다보는 사람이 되길 바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그렇다. 노예로 서의 삶은 이제 끝이다. 흙수저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눈앞의 몇 푼에 허덕이며 살았지만, 이제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나는 나를 묶고 있던 족쇄를 끊어버렸다. 이제 세상의 주인, 세상의 주역이 되어서 살 것이다. 저 빌딩 맨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지창우처럼 말이다.

    ‘올라가자. 저 위로’

    나는 잠시 그 수성건설 사옥을 바라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새로 산 내 책상과 의자가 있다. 의자에 앉으니 푹신하니 좋다. 책상을 만져보면 질감 역시 좋다. 그런데 그 위로는 내 낡은 노트북이 있다. 학창 시절 때 산 과제용 저가형 노트북. 여태 잘 써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주변의 고급 가구들과 영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은 컴퓨터 쇼핑부터 해야겠다....’

    이제 42억을 가지고 주식을 하다보면 1초에 몇 천 만원씩 오가게 될 것이다. 여기서 돈을 아낀다는 건 프로축구 선수가 축구화에 돈을 아낀다는 것과 같다. 침대나 책상 같은 가구 같은 건 사실 내가 어떤 게 좋은 지, 보는 안목도 없고 해서 적당히 쓸 만한 정도면 되지만, 컴퓨터만큼은 최고 사양으로 사야할 것이다.

    ‘일단 메일부터 받아보고 말이지.’

    그렇게 8시 55분이 되었다. 나는 새집에서 처음으로 ‘12시간 뒤’를 받아보았다. 누군가 눈치 볼 동료 사원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다.

    ‘G 12시간 뒤’

    정치 – 정관수 시장후보 - 주성원 시장 지난 4년간 뭘 했나?

    경제 – 세종시 집값 규제에도 들썩들썩

    사회 – 미투 운동에 노벨문학상 선정 취소

    IT/과학 – 코앞에 다가온 4차 산업혁명

    문화/생활 – 커지는 미세먼지 위협

    세계 – 중국 또 대만 위협 비행

    연예 – 예능‘모르는 형님’ 박승기 출연

    스포츠 – 이번 시즌 한화의 돌풍 어디까지인가

    나는 제목을 한번 훑어보았다. 딱히 돈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기사 제목들을 보았다. 기사와 돈의 연결고리를 찾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해야만 하니까.

    ‘중국이 대만을 다시 위협했다고? 그러면... 대만 화폐가 조금 싸지려나? 저녁에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내용도 한번쯤 들춰봐야할 것이다. 거기에 평소에 뉴스를 보는 습관도 길러야겠단 생각이 든다. 정보를 바로바로 돈으로 환전할 수 있게 말이다. 나는 스크롤을 내려 보았다.

    인물검색 – 이름을 입력해주십시오.

    랭킹뉴스 – 지금 사용(0회 가능)

    랭킹 뉴스는 이미 썼고, 인물 검색만이 남아 있다. 골드 등급에서 플래티넘으로 넘어가려면 이 인물검색을 잘 활용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당장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이거랑 어떻게 돈을 연계한다...?’

    내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데, 오전 9시가 다 되어 장이 열려버렸다. 나는 MTS를 켜서 주식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지켜보았다. 딱히 뭐가 있어서 본 건 아니었다. 주가가 변동하는 것을 보면, 반대로 뉴스를 찾아볼 수도 있겠단 생각에서였다.

    나는 우리나라 대표 주식들 수성전자, 미래자동차, LC화학 같은 걸 찾아보다가 별 생각 없이 엔터테인먼트 파트쪽을 보았다. 지우엔터테인먼트 건에서 크게 이득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엔터테인먼트 중에 실시간으로 급속도로 하락하는 주식이 있었다.

    ‘CKD엔터테인먼트 –6%’

    그런데 계속해서 주가는 하락했다. -6%, -7%, -8%. 끝이 없다.

    ‘뭐지? 소속사에서 누가 마약이라도 했나?’

    나는 뉴스를 찾기 위해 노트북으로 포탈사이트를 들어갔다. 그런데 뉴스를 찾아볼 것도 없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가 CKD 도찬기 대표다.

    ‘뭐지?’

    도찬기는 90년대 발라드가 성행하던 시절. 애절한 목소리로 수 많은 발라드 노래를 부른 탑 가수였다. 그는 가수로 성공을 이어가다가 2000년대 들어서 몇몇 가수의 프로듀싱도 했는데, 그게 또 대박이어서 아예 자기 이름을 딴 회사를 차려버렸다. 그게 바로 CKD엔터테인먼트였다. 나는 바로 실시간 검색어를 찍어보았다. 곧 뉴스 하나가 뜬다.

    ‘CKD엔터테인먼트 도찬기 대표, 그는 동성애자다.’

    파격적인 제목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 클릭해볼만한.

    ‘동성애자라고?’

    나 역시 홀리듯 그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도찬기 대표는 동성애자, 즉 게이이고. 지금 하고 있는 결혼은 그것을 숨기기 위한 위장 결혼이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포털 사이트에서 ‘도찬기 결혼’을 검색해보았다. 8년 전 기사가 뜬다. 도찬기 씨는 미모의 모델 김 모씨와 결혼을 했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결혼 한지 8년이 된 사람이 동성애자라고?’

    조금 믿기 힘든 사실이다. 나는 기사 내용을 더 읽어보았다. 기사에서는 도찬기 씨가 동성애자라는 몇 가지 증거를 제시했다. 그에게 대시를 받았다는 연예계 종사자의 이야기, 게이 클럽에서 드나드는 그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 등등. 확증은 없었지만, 기사를 쓴 기자는 확신을 가지고 쓴 모양이다. 나는 MTS와 번갈아가면서 그 기사를 보았다. CKD엔터테인먼트 주가는 –10%를 넘어 -15%로 향하려고 했다.

    ‘동성애자라고... 주가가 하락할 필요까지 있나? 요새는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도 많이 나아진 편인데...’

    하지만 도찬기 대표는 발라드 가수로 사랑노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꽤 많은데, 지금 와서 그가 동성애자라고 밝혀진 다면 조금 불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결혼을 했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그렇게 사랑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위장결혼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 실망하는 팬들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빰을 긁으며 생각했다.

    ‘이게 정말인가...?’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아 인물검색.’

    인물검색으로 12시간 뒤 기사를 찾아보면, 이게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든 나는 메일함으로 돌아와 보았다. 여전히 인물검색 옆에는

    ‘이름을 입력해주십시오.’

    커서가 깜빡이고 있다. 나는 그걸 클릭한 다음 바로 도찬기를 써넣었다. 곧 기사 하나가 튀어나왔다.

    ‘도찬기 대표. 동성애자 아니다. 반박. 헛소문을 낸 언론사 고소할 것.’

    왔다. 나는 바로 그 기사를 클릭해보았다.

    CKD엔터테인먼트 도찬기 대표가 자신의 동성애자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도찬기 대표는 이번 의혹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는 허위 사실이라며 동성애자 클럽에 드나든 것은 동성애자인 작곡가와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해명했다.

    이것만 가지고는 확실하지 않다. 나는 기사를 더 내려 보았다.

    도찬기 대표는 이 루머로 인해 자신과 가족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으며, 회사 주가가 폭락해 CKD엔터 주주들에게도 막심한 금전적 피해를 입혔다며 이 의혹을 처음으로 보도한 키스톤미디어를 고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CKD엔터테인먼트 주가는 오늘 최대 22500원(–25%)하락했다가 도찬기 대표의 반박 인터뷰 이후 29100원(–3%)까지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까지. 기사를 읽던 나는 손가락을 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됐다!’

    이렇게 정확한 가격이 나와 있는 기사가 뜨면 더 볼 게 없다. 이건 마치 뒤에 정답지를 보고 앞에 있는 문제를 푸는 거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HTS를 켰다. 돈을 쓸어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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