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42화 (42/198)

# 42

이사

시원하게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뛰쳐나온 나는 훌훌 나비 날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남역을 향해 걸었다. 미리 봐둔 집을 계약하기 위해서다. 강남역에는 수많은 인파가 오가고 있다. 나는 이 활발함이 좋다.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할 거 없이 어디론가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를 보면, 왠지 모를 밝은 기운, 생명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강남역 사거리에 위치한 한 호화오피스텔 앞에 섰다. 강남의 오피스텔들은 땅값 때문에 대부분 대로 안쪽에 위치해 있지만 이 오피스텔은 강남 사거리 한 귀퉁이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남향에 테헤란로가 보이는, 전망 좋은 오피스텔. 지난 번 이사할 곳을 찾아 강남역을 찾았을 때, 나는 이곳을 점찍어두었다. 나는 오피스텔 1층에 위치한 부동산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띵띵~”

문에 달린 벨이 울리고, 부동산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사람과,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직원. 아저씨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이, 여직원이 일어서서 묻는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오피스텔 보러 왔는데요.”

“네 여기 앉으시겠어요?”

나는 그녀가 권한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잠시 후 녹차 티백이 담긴 종이컵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혹시 선호하는 위치나, 가격대 있으신가요?”

“아 네. 저...”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윗집이요.”

그러자 그녀는 내 말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모으며 말했다.

“오 그러세요오... 여기는 조금 가격이 있는데...”

아무래도 아직 가난한 티를 벗지는 못한 것 같다.

“월세는 보증금 1억하시면 480에서 550. 보증금 5000으로 하시면 600에서 700만원정도 하는데...”

“전세나 매매는 얼마나 하죠?”

내 말에, 여직원은 살짝 경직되더니,

“어... 전세는 10억에서 12억 정도... 매매는 15억에서 20억정도 하는데요...”

전세나 매매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은 듯하다.

‘아 놔... 그냥 확 사 버릴까보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42억인데 그 절반에 가까운 돈을 부동산 사는데 쓸 수는 없다. 부자들이 괜히 월세 놔두고 전세를 거는 데는 다 이유가 다 있다. 부자들은 돈이 묶이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돈이 돈을 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그렇다. 아니 남들보다 12시간 빨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월세로 계약할게요. 보증금은 최대한 적게. 월세는 많게요. 그러니까... 5000에 600에서 700사이 하는 곳으로요.”

“아 네 그러시죠. 일단 집 보시겠어요?”

“네.”

나는 부동산 직원을 따라 위층 오피스텔로 올라가 월세로 나온 방들을 둘러보았다. 올라와보니 역시 좋긴 좋다. 넓고 깨끗하고, 뭣보다 뷰. 뷰가 좋다. 창밖을 내려다보면 강남역 주변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보인다. 마치 성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왕이 된 것만 같다.

‘좋아 이 풍경 보면... 좀 돈 벌 맛이 좀 나겠어.’

생각한 나는 오늘 본 방 세 개 중에서 가장 뷰가 좋은 방을 선택했다. 그만큼 가격이 더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방으로, 계약하죠. 지금 당장.”

“네 그럼 집주인 분 불러드릴게요.”

여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잠시 후,

“네네. 네. 네 계약하시겠다는 분이 오셔서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는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곧 갈게요.”

여직원보다 살짝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젊은 여자?’

“네. 네에~ 그럼 조금 있다가 뵐게요오.”

통화를 마친 여직원은 내게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곧 오신다네요. 내려가서 기다리죠.”

*

나는 부동산 자리에 앉아 여직원이 내준 커피를 홀짝이며 집주인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던 중,

“띠리링 띵”

누군가 문을 열고 나섰다.

‘오...’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젊은 여성이었다. 얼굴을 절반 가까이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질 않았지만, 몸매가 엄청났다.

먼저 짧은 검은색 스커트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무릎 아래로는 얇상한데, 허벅지에는 꽤 살이 있다. 골반이 커서 스커트 옆이 터질 듯 한 반면 허리는 얇다. 아마 골반이 커서 상대적으로 얇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위로 연한 핑크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데, 가슴 부위가 많이 도드라진다. 남자라면, 본능적으로 눈길이 가는 화려한 외모다.

‘B? C?’

내가 알파벳을 세고 있는 사이, 나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중년의 아저씨가 갑자기 빳빳이 기립을 하더니 여자를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네. 계약하시기로 한 분이...”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선글라스 때문에 직접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안광이 비치는 듯하다. 지금 보니 콧대고 높고 피부도 좋은 게 어디 모델 같다.

‘음... 오피스텔 주인이 이런 미녀였다니’

뭐 돈에 주인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내 앞에 앉았다. 중년 아저씨는 마치 공주님을 모시는 내시처럼 그녀 곁에 앉고, 여직원은 따르는 무수리처럼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뭐야? 대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직원에게 물었다.

“계약하시려는 방이 세 방 중 어떤 방이죠?”

“1204호입니다.”

“으음... 아무래도 세 방중에서는 그 방이 뷰가 제일 좋죠?”

중년 남자는 손을 맞잡은 채로 말했다.

“네 그렇지요. 손님분이 안목이 있으시더라고요.”

‘같이 올라가지도 않고선...’

나는 그 아저씨를 째려보았다. 그런데 그 때, 그 여자가 한 마디를 더 했다.

“음... 다른 방은 언제쯤 나가려나...”

‘얼레?’

나는 그 대사를 듣고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 보여준 세 방은 모두 눈앞의 여자가 주인이라는 것을.

‘아니 매매가가 15억에서 20억인데... 그걸 다 가지고 있다고?’

대충 잡아도 45억에서 60억이다. 나보다 살짝 어려 보이는데, 이 여자는 나보다 더 부자다.

“다른 방도 못지않으니 곧 나갈 겁니다. 아시겠지만 요새 비즈니스 차 한국에 거주하시는 중국 분들도 고급 오피스텔을 많이 찾으시거든요.”

부동산 아저씨도 자기 조카뻘 여자애한테 굽신굽신거린다. 뭔가 배경이 있나보다. 금수저. 연예인. 혹은 부잣집 며느리.

“듣기로 중국 사람들은 너무 방을 험하게 쓴다던데...”

“아아 그 점 저희가 알아서 자~알 해드리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나는 살짝 놀라워하며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선이 자꾸만 아래쪽으로 간다. 지금 보니 핑크색 블라우스 맨 위 단추가 열려 있다. 그 사이로 새하얀 살이 살짝 드러나 있는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골이 생겨난다.

“저기요.”

“네?”

나는 깜짝 놀라 시선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계약하실 거죠?”

“네.”

“음...”

그녀는 잠시 나를 보더니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었다. 얼굴도 꽤나 예쁘다. 눈이 크고 눈썹이 위로 뻗쳐 화려한 장미가 떠오르는 인상이다. 살짝 기가 센 것 같기도 하지만. 그녀는 맨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실례지만...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요새 남에게 직업 묻는 건 조금 조심해야 되는데, 그걸 물어본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 지 잠시 생각했다. 방금 사표를 던지고 왔는데, 눈치가 빠른 중년 남자가 옆에서 끼어든다.

“아 별 건 아니고. 이 물건이 월세가 조금 있다 보니까. 저희도 그냥 안전장치 차원에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무직입니다.”

“네?”

“얼마 전까지 회사 다녔는데,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월세 밀리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마세요. 그러라고 보증금이 있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중년 남자와 여직원의 표정이 살짝 얼어붙는다. 공주님한테 뻗대서 그런 걸까. 그런데 반면, 집주인 여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제가 실례했네요. 그럼 계약서 쓰시죠.”

계약을 마시고 부동산을 나온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다음 휴대폰을 들어

‘이아영’

을 써넣었다. 아까 계약서를 쓸 때 본 집주인 이름이다. 일치하는 모델이나 탤런트가 없다. 그럼 어떻게 그 오피스텔을 세 채나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생각해보면 매물로 나온 것만 세 채였으니, 더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15억에서 20억 하는 건물을. 그렇게나 가질 수 있다니.

‘그냥 금수전가? 아니면...’

워낙 미모가 화려하다 보니, 조금 나쁜 상상도 간다. 나는 대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어디로 갈까요?”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논현동 가구거리요.”

*

나는 살짝 매트리스 위에 앉아보았다. 스르르 꺼지는 매트리스가 참 부드럽다. 여기서 잠을 청하면 잠 역시 스르르 올 것만 같다.

“이건 얼마나 하죠?”

내 질문에, 직원은 살짝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건 천연라텍스에 최고급 양모로 만들어진 거라 120만원 정도...”

나는 매트리스가 올려 진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요?”

“이 제품 도 조금 가격이 있으세요. 원목으로 만들어진 거라 300만원. 두 개 다 사시면 20만원 빼서 400으로 해드릴게요. 배송비 포함해서요.”

꽤나 비싸지만 숙면을 위해서 그 정돈 써도 될 것 같다. 나는 매일 아침 8시 55분 전에는 일어나야 한다. 가장 또렷한 정신 상태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 투자다.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투자.

“살게요.”

내가 시원하게 구매를 결정하자 직원은 그제야 환하게 웃는다.

“네에. 고객님.”

논현동 가구거리에 위치한 한 가구매장. 나는 집을 계약하자마자 이곳을 찾았다. 새 집에 걸맞는 새 가구를 채우기 위해서다. 매장을 둘러보다보니 컴퓨터용 의자와 책상이 하나 보인다.

“음 이거는 얼마나 할까요?”

“이 모델은 90만원입니다. 고객님.”

90만원. 꽤나 비싸다. 예전 같았으면 숫자를 듣자마자 도망갔을 가격. 하지만 나는 이제 달라졌다.

“한번 앉아 봐도 될까요?”

“네 그러셔요.”

의자에 앉아보았다. 적당히 푹신하다. 엉덩이와 허리를 완벽하게 감싸준다.

“이 의자는 인체공학적으로 설계 한 의자여서 장기간 앉아있으셔도 허리에 부담이 가지 않아요. 고객님.”

설명을 들으니 더욱 마음에 든다. 이제 쭈욱 자택근무를 할 내게 이런 아이템은 필수다.

“좋아요 이것도 살게요.”

내 말에 직원의 입가가 한 번 더 주욱 찢어진다. 나는 그 이후로도 가게를 좀 더 둘러보았다. 서랍장이랄지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들이 있지만 아직 뭐가 더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필수적인 건 샀으니까... 다음번에 와서 또 사지 뭐.’

생각을 한 나는 계산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난다.

‘둘이 합쳐서 490만원... 아 맞아’

생각해보니 신용카드 한도가 간당간당할 것 같다. 나는 휴대폰 앱을 켜서 신용카드 한도를 확인해보았다. 내 신용카드 한도는 600만원. 직장인 시절 설정해놓은 한계치였다. 쓴 돈을 확인해보니 600만원 중에 40만원을 썼다. 남은 한도는 560만원. 가구를 살 돈은 아직 남아 있다.

‘휘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600이상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쓸 일이 없는 게 아니고 쓸 돈이 없었던 것 같다. 대출 갚겠다고 지하철 타고 다니고, 천원이라도 더 싼 밥 사먹어 가며 돈을 아끼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낑낑 갚던 대출은 신용대출까지 지난번에 일시에 다 갚아버렸다. 2~3천만원 정도는 이제 그리 큰돈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보내드릴 주소 좀 알려주시겠어요?”

“아 네 관악구 솔밭.”

나는 무의식적으로 본래 살던 주소를 말하려다가

“아니 아니다. 서초구 서초대로...”

바뀐 주소를 불러주었다. 직원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네 감사합니다.”

*

“일단 여기다가 놔주세요.”

“네이”

건장한 아저씨 둘이 책상을 놓고 간다. 새 집 안은 어지러웠다. 새로 온 침대에 책상에 의자에 예전 집에서 가져온 잡동사니까지 복잡하다. 하루를 두고 천천히 최적의 배치를 해나가야 될 것 같다. 나는 옷이 들어 있는 박스를 뜯으려다가 집에 가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 집에 있던 잡동사니는 대충 버렸는데 거기에 가위가 있었던 것 같다.

‘아 이런.’

나는 1층에 있는 편의점을 떠올렸다. 거기에 가위를 팔리라.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편의점에 들러 가위를 샀다.

“흠~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엘리베이터 상승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띵동~’

하고 엘리베이터는 내 앞에 와서 선다. 나는 거기 들어가 12층 버튼을 누르고 잠시 서 있었다. 그런데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려는 순간, 다시 문이 열렸다.

‘뭐지?’

하는데, 어제 봤던 바로 그 여자. 집주인 이아영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가위를 보더니 내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 중이신가요?”

“네.”

“네에”

그녀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일까. 다른 세입자를 보러 온 것일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와중 나는 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검은 색 정장에 흰색 와이셔츠 차림이다. 이렇게 보니 완전히 커리어 우먼 같기도 하다. 잘빠진 몸매에 유려한 곡선에 눈길이 가는 걸 참기 어려웠지만 지난 번과 달리 한 공간에 둘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최대한 앞이나 천장을 보려고 노력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는 12층에 멈추었다. 나는 먼저 내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요상하게 그녀도 따라서 내리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녀는 다른 층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녀는 내 앞 바로 옆에, 1204호 옆의 1203호에 섰다. 내가 살짝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는

“아 저는 여기 살아요.”

‘여기 산다고?’

나는 어제 그녀가 했던 대사를 떠올렸다.

‘으음... 아무래도 세 방중에서는 그 방이 뷰가 제일 좋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이사할 때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전화 하세요. 와서 알려드릴 테니까.”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1203호 안으로 들어 가버렸다. 특이한 부자이자 집주인인 그녀는 내 이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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