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중복당첨(2)
나는 마치 합격통보를 받은 공시생처럼. 주먹을 쥔 채 기쁨에 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경각심을 가지고 널뛰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 손에 몇 십 억짜리 정보가 있다. 그리고 터미널 안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터미널 구석에 기둥이 하나 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을 헤치고 그곳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 기둥에 등을 진 채로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랭킹뉴스 – 문화/생활 12시간 뒤 1위 - ‘로또 921회차 당첨 번호는?’
나는 그 기사를 클릭했다.
로또 921화 추첨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1등 당첨번호는 2,6,15,22,36,41. 당첨자는 총 14명으로 각각 12억 8461만 원의 상금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14명에 12억 8천. 나는 가방에서 와이패드를 꺼내 계산을 해보았다. 1등 당첨금 총액은 대략 180억정도. 평균에 비해서 많은 양이다. 이번 주에는 로또를 산 사람이 많다는 말.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당첨자도 조금 많은 수였다 14명.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몇 번이나 1등을 써넣느냐다. 내가 1등을 한 번 쓰면 당첨자수는 15명, 세 번 쓰면 17명, 다섯 번 쓰면 19명이 된다. 나는 각각의 경우를 계산 해보았다.
1번 – 11억9896만
3번 - 31억7374만
5번 – 47억3277만
당첨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1등 당첨금이 줄어들긴 하지만, 그만큼 횟수도 늘어나므로, 많이 당첨될수록 액수가 많아지긴 했다. 대신 더 많아질수록 1회당 당첨금은 준다.
‘한 100번 당첨 시켜버리면...’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총 1등 당첨금 180억에서 무려 157억이 내 돈이 된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바다. 1등 당첨이 100번이 되어버리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인을 보호해주는 시대라고 해도 누군가는 나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입을 놀리면 유명인사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건 싫다. 이번 로또는 단지 ‘12시간 뒤’ 구독료를 내고 주식을 할 기초 자금을 버는 용도로만 쓰면 된다.
‘1번 11억9천도 크긴 큰돈이지만, 밑에 금액에 비하면 적어보이고 3번? 5번? 다른 사람들은 몇 번이나 당첨됐지?’
나는 빠르게 ‘중복검색’으로 지난 기사들을 검색해보았다. 중복당첨이 된 사람들은 대개 2번 정도였다. 그것도 여러 번호를 찍다가 마킹을 헷갈려서 똑같은 번호를 써낸 게 대부분. 진짜 꿈에서 나와서 혹은 좋아하는 번호 조합이라 한 번호로 밀었다가 당첨된 사람은 5번이 최고였다. 나는 5번 당첨되기로 했다. 그보다 많으면 신기록이라 분명 다른 뉴스가 뜰 것이다.
5번사서 당첨되면 타이기록이라 딱히 새로 뉴스가 될 일도 없고 지금 가지고 있는 10억에 50억을 더해 60억 정도 시드머니를 쥐고 시작하면, 괜찮은 시작이 될 것 같다. 가지고 있는 돈이 10억이 아니라 60억이라고 하면 부모님도 압도되어 더 이상 내게 뭐라고 하시지는 못 할 것이다.
‘좋아 그럼 5번으로 하자.’
마음을 먹은 나는 터미널 안에서 로또 판매점을 찾았다. 음식점 사이로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광고판이 보인다. 로또 6/45. 나는 거기 다가갔다. 주인아줌마는 내가 오든 말든 스마트폰으로 뭔가 강의 같은 걸 듣고 있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예레미야 서 말씀입니다.”
나오는 내용이 성경 구절 같다. 어디 목사님이나 신부님 설교를 듣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잘 됐다. 괜히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니, 나는 OMR 용지와 펜을 들고 거기다가 외워온 번호를 마킹했다.
‘2,6,15,22,36,41.’
똑같은 번호를 똑같이 다섯 번. 그런 다음 5000원과 함께 그걸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말했다.
“계산이요.”
성경 강의를 듣고 있던 아줌마는 그제야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왜 똑같은 번호를 다섯 번이나 사? 그럼 당첨될 확률 떨어지는데?’
이라고 물어볼 것에 대비해
‘꿈에서 할아버지가 나와서 불러준 번호에요.’
라고 하려고 했다. 다소 진부하지만 이만한 이야기가 없으니까. 그런데, 그 아줌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건넨 OMR카드 무심하게 받아 그걸 기계에 넣었다. 종종 이런 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긴 있나보다.
‘위이이잉~’
영수증이 뽑혀져 나오고 그녀는 역시나 성경 강의에서 거의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 영수증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이 똑같은 번호가 당첨이 될지 전혀 상상을 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마 나중에 자신의 매장에서 1등을 다섯 번 뽑아간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놀라겠지.’
뭐 어찌되었든 좋다. 이 아줌마조차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좋으니까. 나는 그 똑같은 번호가 다섯 번 써져 있는 요상한 로또 영수증을 들고 뒤로 돌아섰다.
‘이 조그마한 종이 한 장에 47억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살이 떨린다. 나는 그 종이를 지갑에 잘 모셔 두었다. 이제 집에 가는 버스 시간이 되었다.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로또 추첨 방송은 8시 40분경에 이루어진다.
‘보나마나 똑같은 번호가 나오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전에 당첨을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아니... 그전에 12시간 뒤 뉴스가 변했을 거 아냐?’
12시간 뒤 뉴스는 이제 로또 1등 당첨자는 14명이 아니라 19명이 되어 있어야한다. 나는 내 메일함을 확인했다. 역시나, 정정보도가 와 있었다.
‘G 12시간 뒤 정정보도’
보낸 시각을 확인하니 9시 12분. 내가 방금 로또를 산 순간이다. 나는 바로 그 메일을 클릭해 보았다.
*
정정보도
오늘 보내드렸던 기사 ‘로또 921회차 당첨 번호는?’은 독자분의 개입으로 인해, 내용이 수정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수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메일을 내려다보았다. 본래 내용도 짧았기에, 수정된 내용도 짧았다.
로또 921화 추첨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1등 당첨번호는 2,6,15,22,36,41. 당첨자는 총 19명으로 각각 9억 4655만 원의 상금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계산한 그대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갑에 있는 그 로또 영수증을 꺼내보았다. 이제 이 영수증은 진짜 47억짜리가 된 것이다. 나는 그 영수증을 다시 고이 모셔서 주머니에 넣어놓았다. 곧 출발시간이 되었고, 버스는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
오늘 저녁. 네 가족은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싱글벙글이었다.
“모처럼 아들이 와서 좋구나.”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자주 좀 오렴.”
동생 수정이는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소고기 등심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매번 고기 사오면 나도 환영.”
나는 동생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냥 순수하게 환영해주면 안 되겠니 동생아?”
남매는 다시 투닥거릴 준비를 했지만, 그 사이 어머니가 고기를 자르며 말했다.
“얘 고기가 질이 좋다.”
“네 투뿔 등급이에요. 비싼 거”
“왜 그렇게 비싼 거 샀어. 월급도 적다고 맨날 투덜대면서”
나는 뭐라고 답하려다가, 그냥 말을 말았다. 지금은 오후 6시. 아직 로또 추첨을 하기 전이었다.
“그냥 샀어요. 오랜만에 집에 오는데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그래 잘했다. 아들 덕분에 소고기를 다 먹는구나.”
“먹으렴 먹어.”
어머니는 고기를 잘라 나와 수정이 앞에다가 놓아주셨다. 오랜만에 가족식사 대화는 자연스럽게 내 근황으로 옮겨갔다. 소개팅 이야기도 나오고.
“그래서 소개팅은 어땠는데? 이모 말로는 착한 애라고 하던데”
“착한 거 같긴 해요. 그런데 그럭저럭...”
“전에도 그럭저럭이라더니.”
“나쁜 건 아닌데 엄청 끌리진 않아요. 좋은 사람인데 내 짝은 아닌 거 같은 느낌”
“오빠 운명의 상대 같은 건 영화나 소설 속에나 있는 거야. 알지? 서로 어느 정도 맞춰가야...”
“한수정 씨 전 연애상담 신청 한 적 없습니다.”
후에 직장이야기도 나왔다.
“요새 직장은 어때? 여전히 힘들어?”
“네... 요새 업황이 어려워서 성과가 잘 안 나와요. 그래서 그런가 회사 분위기도 안 좋고 상사들도 맨날 야근 시키고 히스테리 부리고... 그런다고 해서 회사가 잘 되면 모르는데... 그것도 아니니까요.”
내 말에 부모님 모두 표정이 좋지 않다. 자기 자식이 힘들다는데 기분 좋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래 요새는 워낙에 경쟁이 치열하니까... 우리 때는 그래도 대학 나오면 먹고는 살았는데... 에휴 나라꼴이 왜 이 모양인지...”
아버지는 나라 탓을 하셨고
“그래 뉴스에서 보니까 요새 청년들 대기업 취직해도 얼마 못다니고 그만두거나 이직한다더라. 너도 정 일이 맞지 않으면 이직도 생각해보렴.”
어머니는 뉴스에서 본 이야기를 하셨다.
“오빠 이직 하려면 일이년 경력 더 쌓고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엄마. 지금 1년 다닌 거 가지고 옮기면 아마 근성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걸요. 최소한 1~2년은 더 다니고 이직 알아봐야지.”
수정이는 얄밉게 현실적인 소리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에 없는 말을 했다.
“네 안 그래도 회사 조금 더 다니면서 여기저기 알아보려고요.”
그리고 그러면서 떡밥을 살짝 뿌려놓았다.
“역시 하고 싶은 건 창업인데... 그건 역시 돈이 드니까...”
나는 그 말을 하면서 부모님 눈치를 살폈다. 부모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예전에 내가 4학년 때, 졸업을 앞두고 창업을 하려다가 비용 때문에 꿈을 접었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두 분 표정을 보다가 막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아 맞아. 그거 말하려고 했는데. 얼마 전에 요상한 일이 있었어요. 왜 꿈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오신 거 있죠?”
아버지가 놀라 묻는다.
“할아버지가?”
“네.”
어머니는 디저트로 배를 깎으시며 말했다.
“뭐라고 하시던?”
나는 준비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뭐라고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말없이 저한테 다가와서 제 손을 잡더니 펜으로 뭔가를 써주시더라고요.”
“뭐라고 쓰셨는데?”
“그래서 뭔가 봤더니 숫자 여섯 개더라고요.”
그 때, 수정이가 끼어들었다.
“숫자 여섯 개? 숫자 여섯 개면 로또 번호 아냐?”
진부한 스토리에 모자란 연기력이었지만, 그럭저럭 넘어간 듯하다.
“그래. 잠에서 깼는데도 그 숫자들이 선명해서 잠에서 깨자마자 번호를 적어두었다가. 오늘 아침에 그대로 사왔어요.”
나는 품에서 지갑을 꺼내. 똑같은 번호 5개가 줄지어 서 있는 영수증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는 숫자를 보지도 않고 내 앞에 배를 갖다 주시며 말씀하셨다.
“그게 됐으면 좋겠구나. 너 회사 그만두고 너 하고 싶은 거 하게.”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할아버지가 생전에 널 엄청 좋아하시긴 했지. 우리 상훈이 우리 상훈이 하면서... 너 기억은 나니?”
솔직히 말하자면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4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다만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에게, 그리고 친척들에게 할아버지가 나를 엄청나게 좋아하셨단 것을 여러 번 들었을 뿐이다. 그 때 그 사이 로또 용지를 주워 든 수정이가 그걸 보며 막 웃었다.
“하하하하 아니 오빠 그래도 똑같은 번호를 5개 사면 어떻게 해? 하나 하나씩이라도 바꾸던가 해야지. 이래가지고 당첨이 되겠어?”
나는 수정이 손에서 그 로또 영수증을 뺏어다가 다시 지갑에 고이 넣으며 생각했다.
‘된다. 이년아... 조금만 있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