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36화 (36/198)

# 36

골드 등급

“너 선 들어왔다 얘.”

엄마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좋은 이야기라더니 또 그이야긴가.’

“됐다니까...”

“아니, 조건 좀 들어봐. 이화여대 나와서 그... ES... 편의점? 기업에 있는데... 그럼 너랑 학벌도 맞고, 직장도 급이 비슷하잖니.”

직장. 직장 오늘 그만둘 뻔했다.

“게다가 집도 괜찮게 산다더라. 물론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은. 엄마가 인생 살아보니까...”

돈. 돈도 내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런 류의 선 같은 것은 더 보기가 싫다. 사람이 서로 조건만 보고 만나서 짝을 지어 결혼한다는 게, 너무 건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사랑을 하고 싶다.

뭐 그러다가 결혼 못한다고들 하지만. 그러다가 못한 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요즘은 혼자 놀기 좋은 시대다. 게임, 드라마, 해외여행. 월급이 조금 적어도 혼자서 즐기고 살기에는 충분하다.

‘아 게다가 난 이제 월급도 필요 없지.’

더 잘됐다. 돈도 많겠다. 이제 누구한테 얽매여서 살 필요는 없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살다가 혹시나 마음 가는 여자가 있으면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만나서 결혼을 하고 싶다.

‘마음 가는 여자...’

그 때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떠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

“상훈아 듣고 있어?”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 생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네네 듣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 번만 만나봐. 이모가 너 생각해서 해주는 건데 거절하기도 미안하잖니? 모레 금요일에 만나고, 집에는 토요일 아침에 와라 응?”

엄마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거부하긴 미안하다. 주말에 나도 말 할게 있으니 이 정도는 엄마 말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알겠어요. 할게요.”

“그래.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만나봐. 만나서 좋으면 더 만나고 싫으면 말면 되지.”

“네네.”

“그래 전화번호는...”

나는 낯선 여자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서 저장을 해두었다. 이후의 레퍼토리는 비슷하다. 문자를 보내서 약속 잡고 얼굴 보고 파스타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지난 번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후로 이런 무의미한 소개팅을 몇 번 정도 해보았다. 나는 일단 그 번호에 문자를 보내놓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로 시작하는 뻔한 문자를. 나는 답장이 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보통 이렇게 문자를 보내면 한 시간 정도 늦게 답장이 오니까. 여자들은 대개 너무 빠르게 답장하면 자기가 싸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안보내면 안 만나면 되지 뭐. 나도 명분 생겨서 좋다. 이거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었다. 길을 걷다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역시 강남이 좋다. 건물은 크고 멋지고, 여자들은 예쁘다. 대로변에는 가장 핫한 브랜드들이 들어와 있고, 골목 안쪽에는 맛 집들이 들어서 있다. 강남에서 일 년정도 회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돈 많은 사람들이 괜히 강남 사는 게 아니다.’

라는 것. 강남은 확실히 시대를, 문화를 선도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여기 들어와 사는 게 의미가 있다. 여기서 살면, 자연스럽게 가장 앞선 트렌드를 접하고 거기 녹아들 수 있으니까. 이제 내 자산은 15억이 넘는다. 나도 슬슬 이쪽으로 와야 할 것만 같다. 15억의 돈을 쓰는 데도, 그걸 불리는 데도 이 강남에서 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쪽으로 이사부터 할까? 차는 당장 사기에는... 조금 아깝지. 돈은 있지만 그래도 몇 천에서 억 단위로 깨지니까...’

생각해보니 확실히, 차는 지금 사기는 조금 아깝다. 적어도 몇 천에서 많게는 억 단위로 들어가니까. 몇 백억 부자가 됐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 돈으로 주식 몇 주를 더 사는 게 훨씬 이득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집은 다르다.

‘사는 건 월세 살면 절대 목돈은 안 들어가지. 월세 백만 원 넘는 오피스텔에 살아도... 어차피 한 달에 수십 배는 벌 테니까...’

월세는 얼마 비싸지 않다. 나는 당장 바로 집에 가는 대신 강남역을 좀 더 둘러보기 시작했다. 비싼 오피스텔이 밀집해 있는 곳 위주로.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강남역 사거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 오피스텔이었다. 대개 오피스텔들은 도로에서 한 블럭 안쪽에 있는데, 그 오피스텔 만큼은 딱 대로가 보이는 곳에 있엇다. 나는 그 오피스텔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살면 후... 살맛나겠는데?’

나는 일단 그 오피스텔을 점찍어 놓았다. 소개팅녀의 문자는 내가 집에 갈 때 즈음 왔다.

‘네 반갑습니다. 한상훈 씨.’

나는 간결한 답장을 보냈다.

‘네 반갑습니다.’

전에는 소개팅 전에 주구좔좔 떠드는 때도 있었지만, 요새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간단히 만날 약속만을 잡고 대화를 끝냈다.

*

목요일 아침.

“흠흠흠~”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들어 MTS를 켰다. 가지고 있는 주식은 한 개도 없었지만, 계좌잔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1,556,832,164. 나는 그 숫자 하나하나를 세며 생각했다.

‘크으... 짜릿해! 늘 새로워! 역시 돈이 최고야!’

나는 최근 들어 이렇게 내 계좌 잔고를 보는 게 중독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가 없다. 볼 때마다 엔돌핀이 나오는 것을. 나는 상상을 해보았다.

‘담배 피는 사람들 기분이 이런 걸까?’

나는 담배는 피지 않지만, 대충 비슷할 거 같다. 얼마 들어 있는지 알면서도, 계속 해서 보게 되고, 안보면 아쉽고, 그래서 다시 찾게 된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담배처럼 건강을 상하게 하지는 않으니까. 술처럼 숙취가 남지도 않는다. 부작용 없는 중독이라면, 조금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그 숫자의 나열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골드 등급 신청 할 수 있네?’

골드 등급으로 승급하는데 들어가는 금액은 10억. 지금 15억이 넘게 있으니 신청이 가능한 상태다. 하지만 조금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청은 가능한 상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10억 집어넣고 나면... 5억 밖에 남지 않으니까...’

지금 당장 시드머니를 줄이고 싶진 않다. 한창 주식이 잘 되고 있으니까. 15억을 두 배로 불리면 30억이지만 5억을 두 배로 불리면 10억 밖에 되지 않는다.

‘최소 20억 이상 모아야... 이번 서울 시장 건 같은 걸로 한 두 건 정도 더 한 다음 업그레이드를 신청하든가 하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55분이되기를 기다렸다.

‘S 12시간 뒤’

왔다.

‘오늘은 무슨 뉴스가 걸리려나...’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걸 클릭했다. 그런데,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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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일이 조금 이상하다. 윗부분은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그 아래 부분. 평소 쓰여 있던 ‘골드 등급 안내’ 밑으로 두 줄이 더 추가 되어 있었다. 이벤트 제공이라는 요란한 문구가. 그 중 몇 가지 단어는 형형색색으로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이게 뭐야... 싼마이 티 나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12시간 뒤를 시작할 때, 주웠던 찌라시도 싼마이 티는 났다. 조금 점잖은 사람이라면 절대 허리를 굽혀보지 않았을 정도.

‘이게 이 쪽 컨셉인가? 그렇다면 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어보기를 클릭했다. 그러자, 더더욱 복잡 요란한 광고문구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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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뭐야? 구독료를 할인 해준다고? 그것도 반값으로?’

내용을 보고 나니, 싸구려 티가 나는 형식 따위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평소보다 반값이라니 아무래도 혹하게 된다. 10억의 반이니 무려 5억이다. 5억.

‘닥치고 해야하나?’

하지만 5억도 지금 가진 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큰돈이긴 하다.

‘아니 시발 골드등급 혜택이 뭐가 있는지 신청하든가 말든가 하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데, 이 메일이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 밑에 몇 줄의 내용이 더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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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에서부터 한줄 씩 읽어보았다. 먼저 모든 카테고리 뉴스 제목 제공이 보인다.

‘카테고리 전부 다 제목을 보여준다는 말이로군. 그러면 이제 굳이 뭘 볼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는데?’

기본적으로 뉴스 제목을 몇 개 더 보여줄 테니 돈을 벌 기회도 늘어 나긴 할 것이다. 이건 좋다 확실히. 하지만 그것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두 번째 줄이다.

‘스킬 포인트를 준다고?’

스킬 포인트라니, 뭔가 게임에서 나오는 무슨 요소 같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도 뭔가 알 수가 없다.

‘무슨 스킬인데?’

하지만 딱히 그것에 대한 설명은 없다. 특전 안내라고 써놓고 사실상 뭐가 뭔지 구체적인 설명은 빠져있다.

‘이 놈들이 누구 놀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로 아래 있는 한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고객센터.

‘고객센터라는 게 존재했단 말야?’

그게 있다면 지금 당장 물어보고 싶다.

‘스킬 포인트 어디다가 쓸 수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한 달 천만 원 짜리 고객은 고객도 아니다 이건가...’

나는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솔직히 이 12시간 뒤 신문은 내게 은인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천만 원 두 번 내고 15억 벌었으니, 뭐라고 하기는 조금 미안하다.

‘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당장 뭐가 뭔지 모를 스킬 포인트보다 이 고객센터라는 건 분명히 당긴다. 너무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실버 다음 골드라니 그 위에도 뭔가 있는 거야?’

‘대체 로또 번호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이거 뉴스 선정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니 그전에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이걸 보내는 너흰 뭐하는 사람들이야? 아니 사람은 맞아? 외계인이라도 되는 거 아냐?’

그게 궁금해서라도 골드 등급을 신청하고 싶다. 나는 그 화면을 빤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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