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32화 (3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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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승역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빠르게 흔든 다음, 손으로 빰을 두어 번 쳤다. 나름 충격에서 제정신을 찾기 위한 물리요법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곁눈질로 시계를 보았다. 8시 56분, 장이 열리기까지 4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12시간 뒤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어제 하루 만에 무명에서 화제의 중심이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주성원 현 서울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미투를 선언했던 전 비서 김수향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그녀가 과거, 이희철 시장후보의 사람과 접촉한 정황증거가 드러나 또 한 번 정치판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의혹을 제기한 것은 다름 아닌 네티즌들입니다. 국내 최대 정치 커뮤니티 중 하나인 ‘주시자들’회원 중 하나가 이희철 후보의 측근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김수향 씨의 옆모습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 사진은 한창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초, 광화문 광장에서 찍힌 사진인데요.

    나는 깜짝 놀랐다. ‘12시간 뒤’최초로 사진 화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뭐야... 사진도 보여준단 말이야?’

    보통 기사에서는 당연한 일인데, 12시간 뒤에서는 처음 보다보니 좀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그 사진을 바라봤다. 사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희철 시장후보다. 그는 파카에 귀마개까지 입은 채로 시민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계절은 겨울. 위로 세종대왕님 모습이 보이는 걸 보니 사진 설명대로 배경은 광화문 광장인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농성이 벌어지는 현장인듯하다. 이희철 시장후보는 많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하듯, 이곳을 찾아 얼굴을 내비치고 사진을 찍으러 온 모양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김수향이 눈에 띄질 않았다. 사진 한 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분간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뭐 월리를 찾아라도 아니고... 김수향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전직 비서, 김수향은 기본적으로 미녀였다. 선이 곱고, 유려한데, 눈 주변이 붉고 속눈썹이 길어 살짝 도화색이 도는 얼굴이었다. 보통 그런 화려한 미녀는 많은 사람 중에서도 눈에 띄기 마련인데, 이 사진에서는 잘 보이질 않는다.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를 더 읽어보았다.

    최초 의혹 제기자인 아이디 ‘연우아빠’를 쓰는 네티즌은 ‘사진 속 좌측 상단에 베이지색 외투에 검은색 목도리를 한 여자’를 김수향 씨로 지목하며, 그녀가 이희철 후보의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기사에 쓰인 대로 사진 좌측상단을 찾아보았다. 단서를 쥐고 찾으니 금방 찾을 수 있다. ‘베이지색 외투에 검은색 목도리를 한’미녀가 하나가 정장에 외투를 입은 두 남자와 나란히 서 있다. 얼굴을 뜯어보니 확실히 닮았다.

    구석에 나오긴 했지만 워낙에 사진 화질이 좋아서 눈코입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 하지만 이것만가지고는 그녀라고 확신하기는 조금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 그 문제조차도 12시간 뒤의 기사에 해결이 되어 있었다.

    닉네임 ‘연우아빠’는 다른 네티즌의 ‘우연히 닮은 사람이다.’라는 반박에 ‘눈 밑의 점 위치가 똑같다’며 재반박을 했습니다.

    ‘눈 밑에 점... 그런 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창을 따로 켜 ‘김수향’을 검색해보았다. 검색을 해보니 진짜다. 그녀는 우측 눈의 가장자리 우하단에 선명한 점이 하나 찍혀 있다. 나는 검색을 해서 나온 사진과 12시간 뒤에 나와 있는 사진 두 개를 쉬지 않고 알트탭을 눌러가며 비교해보았다. 점을 보며 비교를 해보니, 이목구비 모두 똑같아 보인다. 확실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다. 이쯤 되니 살짝 소름이 돋는다.

    ‘작년 초면... 거의 2년 전 사진인데... 아니 시발 이걸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거지?’

    하지만 놀라워할 시간이 없다. 내가 기사를 읽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8시 59분이 되었다. 장이 열리기 1분 전이다. 이제 대응을 해야 한다. 나는 기사의 마지막을 훑었다.

    이 논란에 대해 이희철 시장 캠프와 김수향 씨 양측은 각각‘대응할만한 일이 아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며 모두 확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답을 피한다. 정치인 청문회에서 자주 보았던 광경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있는 건 달랑 사진 한 장, ‘미투를 계획했다는 정황증거’ 일뿐이었으까. 하지만 그래도 주가는 이런 것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일단 엔도바이로닉스는 익절하고 보자.’

    나는 방침을 정했다.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 사실 관계야 어쨌든, 일단 엔도바이로닉스는 팔고. 그런 다음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화장실에 걸어가며 MTS를 켰다. 지난 번 허 과장에게 벽을 치다 들킨 게 생각이나 아예 비어 있는 자리 하나로 들어 가 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아직... 뉴스가 퍼지진 않았겠지...’

    나는 그렇게 빌었다. 혹시나 이 정보가 퍼졌다면 당장 어제 먹은 2억을 그대로 토해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엔도바이로닉스 108,000(+29.8%)

    엔도바이로닉스는 웃기게도, 시작부터 상한가에 걸려 있었다.

    ‘헐...’

    방금 전까지 뜨거운 냄비를 만진 사람처럼 급하게 손가락을 놀리던 나는 잠시 멈춰 그걸 바라보았다. 시작부터 상한가에는 잔량이 쌓이기 시작했다. 만주, 이만주, 삼만주. 10억. 20억. 30억. 쌓이던 금액은 결국 50억이 되었다. 이러면 굳이 급하게 팔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잔고를 살펴보았다.

    엔도바이로닉스 8840주

    매수가 64,300 매입금액 542,692,000

    현재가 108,000 평가금액 954,720,000

    아침대비손익 219,232,000

    총 손익 412,028,000

    어제는 1억9천 벌었는데, 오늘 수익은 2억이 넘어버렸다. 복리의 마법. 수익이 수익을 벌여들었기 때문이다. 거의 2억2천에 가까운 이익. 나는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쾅쾅 화장실 벽을 때리지는 않았다. 어제보다도 더 벌었는데, 왠지 묘한 느낌이다. 사람들의 광기가 이렇게 바보 같고,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느낌이 들 뿐.

    나 역시 오늘 아침 이 기사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침부터 점상에 달려 버린 이 주식을 절대 팔지 않았을 것 같다. 오늘 2억2천 번 것을 자축하며 주말에 신나게 놀다가, 월요일 즈음 매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무섭다. 저 뉴스가 뜨는 순간 이 단단한 50억의 벽은 곧 풀려버릴 것이다.

    나는 매도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상한가에 가격을 입력하고, 수량에 전량매도를 찍는 순간에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상한가에 사려는 금액이 50억 가까이 있다 보니 왠지 손해를 보고 파는 것 같다. 미래를 알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절대, 절대 팔지 않았을 것이다.

    ‘젠장 상한가 같은 건 누가 만들어 놓은 거야. 이정도 금액이면 +30%가 아니라 +50%에도 팔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렇게 속으로 욕을 하면서 매도버튼을 눌렀다.

    ‘나한테 좀 팔아줘! 나한테도 좀!’

    다들 손을 뻗치고 있는 형국이다. 당연히, 내가 가진 9억5천의 주식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매도 체결. 내 계좌에는 626,320,505원이 찍혀 있었다. 6억2천6백.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주먹을 쥐고, 어딜 때리지 않고 그저 허공에 두 번 크게 흔들었다.

    ‘일단 득점은 올렸고...’

    나는 이제 이 불어난 돈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별 변수가 없다면 주성원 현 시장의 재선은 매우 유력했다. 단지 어제 터진 미투의 파괴력이 너무 컸을 뿐. 하지만 이번 미투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그 파괴력이 그대로 반대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부는 엄청난 바람. 역풍. 역풍이 부는 것이다.

    ‘동보건설은 어떻게 됐지...?’

    문득 든 생각에 나는 MTS를 만지작거렸다. ‘동보건설 –22.6%’ 동보건설은 점상을 찍은 엔도바이로닉스와 극명하게 대조되도록, 또 하한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개미들이 피 같은 돈을 말려버리는 푸른 지옥. 개미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끝없이 펼쳐지는 창백한 지옥. 하지만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이게 엄청난 기회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잘 나가던 사람이 망하고 망가지는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그만큼이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 영웅적 스토리에도 환호하기 마련이다. 만약 주성원 시장이 이 논란을 딛고 이겨낸다면. 죽었다 살아나는 피닉스처럼 화려하게 날갯짓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하한가 근처에서 거래되고 있는 동보건설의 주가를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내 계좌에 장전된 금액은 6억2천. 동보건설은 역시 내실이 단단한 기업이라서 40%의 신용 거래를 허용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오늘 판 돈이 계좌 증거금으로 잡히는 화요일 즈음에는 무려 15억 가까운 금액의 주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도 매우 싼 값으로. 제대로만 탄다면 이 기차는 천국으로 가는 기차다. 나는 그 환승역 앞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이거... 갈아 타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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