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26화 (26/198)

# 26

수정된 미래(2)

오현주는 나에게 인사를 마친 다음, 다른 경찰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저 아까 현장에 있으셨던 경관님은...”

“아... 저저저... 접니다.”

아까 나와 있었던 경관은 말을 더듬어 가며 손을 들었다. 오현주는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중년의 경찰관 아저씨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저 녀석 상관 최철용 경사입니다. 무사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오현주 씨.”

“아 예 그러시군요.”

아까만 해도

‘여자가 뭐라고...’

하던 양반이, 입이 헤벌쭉 벌어져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때, 작고 머리가 살짝 까진 아저씨가 내게 다가왔다.

“저... 선생님 잠깐 따로 이야기 좀 해도 되시겠습니까?”

대체 이 사람은 누구고, 하려는 이야기는 뭘까. 내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 하자, 그는 조용히 품 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게 주었다.

“저...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OH엔터테인먼트 사장 권오혁.’

그는 OH엔터테인먼트의 사장님이었다. 범인인 헤어디자이너도, 범행의 대상이었던 오현주도 이 회사 소속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사건의 총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현주가 경찰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사이 은밀하게 내게 말했다.

“잠깐 나가서 이야기를 할 수 없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그를 따라 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내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저희는 이 사건을 좀 조용히, 덮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연예계 쪽 회사는 이미지가 중요한 지라... 배우인 현주 씨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그다지 좋지 않겠지요. 이해하시지요. 선생님?”

맞는 말이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단 저희가 일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 하긴 할 텐데...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선생님에게 기자들이 연락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그는 갑자기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거 받으시고 언론에서는 누설하지 않아주셨으면...”

나는 내민 봉투는 일단 받고 보는 성격이다. 나는 그 안을 바로 들여다보았다. ‘금 천만원 정’이 두 장. 이천만 원.

‘애걔... 겨우 이건가...’

옛날 같았으면 눈이 탁 뜨였을 거액인데, 요새 주식판에서 워낙 큰돈을 만지다보니 그다지 감흥이 없다. 그래도 나는 이걸로 눈을 감아주려고 했다. 어차피 돈 벌려고 한 일도 아니고, 이런 일 때문에 귀찮아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 권사장은 내 눈치를 보면서

“저...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품에서 급하게 똑같은 수표 한 장을 더 꺼내 나한테 주었다. 도합 삼천만원.

‘아니... 그냥 이천만원 가지고 입 닫아주려고 했는데...’

아까 이천 만원을 보고도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것 때문에, 한 장을 더 얹어준 모양이다. 돈을 더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알겠습니다.”

권 사장은 다시 한 번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은밀한 거래가 끝날 즈음. 오현주가 경찰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이대로 그냥 보내드리긴 좀 죄송하고... 혹시 전화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나는 눈을 껌뻑였다.

‘실화인가. 나 지금 오현주에게 전화번호 따이는 건가?’

그런데 실화였다. 그녀는 내게서 번호를 받으려는 듯 자신의 백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잠시 후 그녀는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제가 핸드폰을 차에 놓고 와서...”

“아 잠시만요.”

나는 급히 품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곧 퇴사를 앞둔 나였다. 한동안은 명함을 건네 줄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현주가 내 명함을 받아갈 줄이야. 그런데 그 때였다. 그녀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서서 그녀 대신 내 명함을 받아갔다.

‘뭐야?’

나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남자 역시 낯이 있다. 오늘 현장에서 본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니 매니저. 그 벤츠 밴을 몰던 매니저였다. 매니저가 나서서 내 명함을 받자, 오현주도 가만히 있다. 나는 속으로 납득했다.

‘뭐... 이런 게 연예인의 방식이겠지.’

그러든 저러든, 오현주는 한 번 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네.”

마지막 인사가 끝나고, 오현주와 오현주의 매니저, 그리고 대머리 사장은 예의 그 밴을 타고 경찰서를 떠났다. 나는 잠시 그 밴이 떠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다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예쁜 건 젊을 때 한철’이라던 중년 경찰아저씨가 그녀의 미모를 찬사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게 살짝 올드한 단어로.

“와... 진짜 선녀네 선녀...”

“그렇죠. 경사님? 직접 보니까 다르죠?”

아까 혼이 난 젊은 경찰은 그새 긴장이 풀려 한 마디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중년 경찰마저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게에...”

나는 피식 웃으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시선을 느낀 중년의 경찰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선생님 귀가 하셔야지요? 김 순경. 모셔다 드려.”

*

다음 날, 토요일 아침. 나는 언제나 그랬듯 8시 즈음 일어났다. 어제 꽤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몸이 꽤나 피곤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다보니,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완전히 아침형 인간이 된 것이다.

“하아암...”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어제 일 생각이 난다. 스토커에 살인범에 엄청난 미녀에, 내 인생에서 너무 강렬한 사건이어서 평생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 나는 그래도 두 어번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됐어. 어제 일은 어제 일이고 이제 오늘 일을 해야지.’

나는 이제 주 업무가 된 ‘12시간 뒤 메일 받기’를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시간은 오전 8시 50분. 아직 메일이 오기 5분 전이었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로또 한 번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메일 계정에 접속했다. 그런데, 평소에 보지 못했던, 메일이 와 있는 게 아닌가.

‘12시간 뒤 정정보도’

온 시각은 어제 사건이 있었던 오후 8시 50분이다. 나는 바로 그 메일을 클릭해 보았다.

*

정정보도

어제 보내드렸던 기사 ‘여배우 오현주 강남 추병원 앞에서 괴한에게 흉기로 찔려.’는 독자분의 개입으로 인해, 내용이 수정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수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메일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어제 받은 메일의 내용 대신 내 활약이 쓰여 있었다. ‘ 시민 한 모씨(29)가 범인을 업어치기로 제압하고, 근처에 있던 경관 두 명이 그를 빠르게 체포함으로서 범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디 누가 보는 신문도 아니지만, 내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다니 조금 감회가 새롭다. 나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기사를 끝까지 읽어보았다. 정정 보도는 담담하게 바뀐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정해진 미래는 없고, 내가 내 의지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로군... 좋아 좋은 팁이 되었어.’

앞으로 더 많은 재산을 굴리다보면 12시간 뒤에 나오는 뉴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어제 그랬던 것처럼 미래를 적극적으로 개입을 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후 좋아... 미래를 수정하다라... 이거 왠지 스케일이 커져가는 거 같은데...’

나는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눈을 감으니, 처음에는 검은 눈꺼풀만 보이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확 하고 떠오른다. 살짝 머리를 부딪치고 귀엽게 웃던 오현주의 얼굴이.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어우... 한상훈 정신 좀 차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 꿈을 꾸는 것만 같다. 하지만 어제 그녀가 내 번호를 가져갔던 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오현주가 먼저 전화를 해 올지도 몰라. 생명을 구해준 보답으로 밥을 한 번 사겠다고... 그러면... 어쩌지?’

나는 피식 피식 웃으면서 그런 망상을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아니야. 그런 탑 여배우가 자기 한 번 구해줬다고 해서 나 같은 일반인을 만나려고 하겠어? 그건 말도 안 돼.’

그런 부정적인 생각도 든다. 나는 잠시 홀로 꽃잎을 꺾는 소녀처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긍정과 부정의 생각을 반복하다가, 제 3의 결론을 내렸다.

‘에이... 됐고. 돈. 돈이나 벌자. 뭐가 어떻게 되건, 탑 여배우에 걸 맞는 능력 있는 남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모니터에 고개를 돌렸다.

‘좋아 오늘은 무슨 뉴스가 나올까...’

그런데 그 때였다. 원룸 밖에서 커다란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시의 새 시장이 될 사람 누굽니까아?”

그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희철! 이희철! 이희철!”

나는 짜증이 확 솟구쳤다.

‘하 나... 주말 아침부터 시끄럽게... 이희철이라고? 내가 뽑아주나 봐라... 아니 아니지 경쟁자가 누구지? 그 사람 뽑아버려야겠다.’

나는 지난 번 선관위에서 보낸 우편물을 찾았다. 치맥 먹는답시고 아무렇게나 던져둔 그 책자를. 바야흐로, 지방 선거 시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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