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수정된 미래
나는 내 손을 보며 폈다가 오므렸다가, 두어 번 허공을 쥐어보았다. 아직도 그 장발 미치광이를 메칠 때 감각이 선명하다.
‘이게... 아직도 되네...’
도복을 벗은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 혼나가며 수천 수 만 번 해본 기본기는 몸에 남아 있었던 듯하다. 그 때 경찰 하나가 내게 녹차티백이 담겨 있는 종이컵을 건넸다.
“긴장 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선생님은 단순히 참고인 자격으로 오신 것이니까요.”
뒤에 있던 중년의 경찰관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게 아니라 잘만하면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타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네...”
나는 눈을 두어 번 껌뻑였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그럼 먼저... 신고를 하신 경위에 대해서 말인데...”
나는 경찰관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경찰관은 기본적으로 나를 경찰 대신 습격자를 물리친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내 답변에 토를 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어찌되었든 특이한 상황이었습니다. 스토커에... 살인마가 한 자리에 있었다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12시간 뒤’에 나온 180cm살인마는 그 거한이 아니라 장발의 빼빼마른 남자였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경찰들 말을 듣건대, 그 장발은 오현주가 소속된 OH엔터테인먼트의 헤어 디자이너였다고 한다.
오현주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그는, 그녀에게 여러 번 대시를 했지만 대시를 한 횟수만큼 고대로 까여 앙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준비한 흉기도 긴 가위를 반으로 쪼갠 것 중 하나. 나름 손에 익숙한 걸 들고 온 모양이었다. 뒤에 있던 중년의 경찰관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휴 미친 새끼... 여자가 뭐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던 젊은 경찰 하나가 끼어든다.
“근데... 예쁘긴 진짜 예쁘더라고요...”
그는 현장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범인을 메친 사이, 수갑을 채운 사람 중 한명. 그 말을 듣자, 중년의 경찰관이 한 마디를 한다.
“흥 그래봐야 다 젊은 시절 한철이지...”
“경사님이 직접 못 봐서 그래요. 진짜 직접 보니까... 경국지색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옛날에 왕이 걔를 봤으면... 진짜 걔 때문에 산 밀어 궁궐 짓고, 맨땅 파서 호수 만들 거 같더라니까요.”
그 말에 중년의 경찰관이 짜증을 낸다.
“너 임마 헛소리 그만해. 따지고 보면 네가 일 제대로 못해서 선생님이 여기까지 오신 거 아냐. 응? 어떻게 경찰이란 놈이 일반인 보다 반응이 늦냐? 응? 너 굳이 따지면 시말서에 요번 달 감봉 감이야. 알아 들어?”
상사가 ‘시말서’와 ‘감봉’을 가지고 후배를 혼내는 건 여기도 비슷한가보다. 혼이 난 경찰관은 급하게 나와 중년의 경찰 쪽에게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옛날 내 생각이 나서 그를 만류했다.
“아아 괜찮습니다. 그래도 대응을 빠르게 해주신 덕에 범인 잡았는걸요.”
내 중재에 중년의 경찰관은 한 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흠... 아닙니다. 선생님의 용기가 대단하셨지요. 일반인이 그렇게 흉기를 든 범죄자를 잡아다 메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저 녀석은 선생님 뒤치다꺼리만 한 거지요.”
나는 문득 든 생각에 경찰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 분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누구...?”
“그 스토커 분이요.”
“아... 그분이요. 아까 병원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흉기에 옆구리를 찔리긴 했는데 허리에 두툼한 지방질이 있어서 덕분에 장기에는 손상이 없었답니다.”
과연, 살집이 꽤 있는 편이더라니, 그것 때문에 그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 듯하다. 나이든 경찰이 한 마디를 했다.
“네 뭐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그거와는 별개로... 두 번째로 스토킹이 걸려서 잘 못하면 실형을 살긴 할 테지만요.”
“실형이요?”
“네 지난번에도 몰래 사진을 찍다가 한 번 걸리셨거든요. 똑같이. 지난번엔 그냥 훈방으로 끝나긴 했는데... 두 번째 걸린 거라... 그래도 소속사에서 선처를 바란다는 요청이 왔고. 지적 장애도 가지고 있는 걸로 해서... 저희도 어찌될지 모르겠네요. 이번 일 때문에 최대한 봐드리고 싶긴 한데 말이지요.”
나는 한쪽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지적 장애가 있었다고요?”
“네 아주 심한 건 아니고 조금 모자란 정돈데... 왜 그 선생님이 지적하신 수상한 점 중에... 바람막이 있지 않습니까”
“네.”
경찰관은 살짝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 분은 퍽퍽 찌는 한여름에도 그 바람막이를 입고 다닌답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옛 동네에 그런 사람들이 한 둘 있긴 하다.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나쁘진 않은 형들. 아까 빛나는 흉기를 보고도 바로 범인에게 돌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바보 같음 덕분일지도 모른다.
‘왠지... 오현주 볼 때 그 표정이 너무 해맑더라...’
일단 이것으로 이번 일은 모두 일단락 된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온다.
“휴우... 그럼 저는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중년의 경찰관이 일어나며 말한다.
“아 네 물론입니다. 혹시 사시는 곳이 어디지요?”
그런 건 왜 묻는 걸까 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아... 낙성대역 근처인데...”
내 말에 그는 손짓하며 말했다.
“그 정도면 가깝군요. 이 봐 김 순경. 선생님 자택까지 모셔드려.”
“네 경사님.”
좋다. 늦은 밤 강남에서 어떻게 택시 잡나 했는데, 경찰차 타고 갈 수 있다니 잘 됐다. 그런데 그 때였다.
‘띠링 띵’
뒤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서에 있던 경찰관 전원이 기립했다. 나는
‘뭐야 누구 높으신 분이라도 왔나?’
하는 생각에 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늘 벌써 세 번째로 ‘그걸’ 경험했다. 타임 스탑. 내가 굳어 있는 사이,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선 오현주가 서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저... 아까 절 구해주신 분이 여기...”
그러던 중, 그녀는 나와 딱 눈이 마주치자, 내게 다가와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거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할지...”
그러면서 내 손을 잡는데, 그 부드러운 감촉이 말할 수 없이 좋다. 마치 큰 아기 손을 만지는 것 같다. 나는 자칫하면
‘제가 더 감사합니다.’
라고 할 뻔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성의 끈을 잡고 덤덤한 척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딱딱한 말투였다. 표정도 굳은 상태. 하지만 그걸 풀면 바보 같아 보일까봐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고요?”
‘지금 제 마음이...’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헛소리 대신 최대한 침착을 유지한 채로 담백한 말을 내뱉었다.
“네. 다친 데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정말.”
그녀는 탑스타 답지 않게 내 손을 잡은 채로 고개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왠지 손을 잡은 상대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니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녀가 머리를 드는 걸 보고,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런데 그 때,
“감사드려요.”
그녀가 바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바람에.
‘탁’
우리는 서로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코.”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붙잡으며 활짝 웃는다. 한밤중의 경찰서는 방금 전까지도 조금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그녀의 그 웃음에 서 안이 전부 환해지는 듯했다. 그녀의 그 미소에,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이 가치가 있음을 느꼈다. 오늘 내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여기서 웃고 있는 대신 추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있었을 테니까.
‘나쁜 일이 아니었어. 스토커를 쫓고 경찰에 신고를 하고, 살인미수범 업어치기를 하고 했던 것들. 그 모두가.’
그녀의 그 미소 하나면 모두 보상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