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꺾여버린 꽃(2)
나는 준비된 보고서를 허 과장에게 넘겼다. 허 과장은 나와 보고서를 번 갈아서 쳐다보았다. 나는 살짝 입술을 우물거렸다.
‘뭐라고 하기만 해봐라... 내가 너 들이 받고 회사 때려 친다. 웬만하면 한두 달 뒤에 조용히, 내가 내 발로 걸어서 나가고 싶으니까 그냥 오케이 해라.’
허 과장은 내 생각을 텔레파시로 읽기라도 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가봐.”
나는 시계를 보았다. 7시 50분. 오늘은 공식적인 야근은 아니었지만, 일이 조금 남아 잔업을 하게 되었다. 정시퇴근시간 5시보다 3시간 가까이 늦은 퇴근. 뭐 회사 다니면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내가 내 자리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하는데, 최 사원이 와서 말했다.
“어이 한 사원 불금인데 한잔 하러 가자”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제안이 매우 당겼다. 소주에 삼겹살, 전에 막걸리, 소맥에 골뱅이무침까지. 저녁식사도 아직 하지 못한 시점이라, 안주와 술들이 순간 머리 위를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최 사원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려다가 갑자기 입술을 모으더니 내게 말했다.
“오 그렇지. 미안 미안 가봐. 가봐.”
아무래도 여전히,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 편이 아무래도 내게 더 편했으니까. 회사를 빠져나온 나는 오늘 곧바로 오늘 범죄가 일어날 언주역 앞 추병원을 향해 걸었다.
처음에는 112에 신고전화만 하고 밤에 TV나 인터넷으로 확인을 할까도 했지만, 나는 마음을 바꿨다. ‘12시간 뒤’에 알려주는 일이 뭐가 어찌 되도 벌어지는 확정된 사실인지, 아니면 다른 변수에 의해 변경될 수 있는 일인지 내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일은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내 자산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것은 분명했다. 돈이 곧 힘이 된 세상, 많은 돈은 많은 힘을 가져올 것이고, 앞으로는 내 결정이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도 분명하다.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말이 뉴스에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현실에는 ‘뉴스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이니 수석비서니 여당대표니 하는 정계의 거물들, 어디 그룹 회장님 사장님 이사님과 같은 재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위치한 사람들. 본인들의 결정 하나하나가 뉴스에 나가고 실현이 되는 사람들 말이다.
나 역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다보면, 결국 그 자리에 올라앉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안은 확실히 확인을 해두어야 한다. ‘12시간 뒤’에서 알려주는 뉴스를 누군가의 개입으로 바꿀 수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성적인 생각과 별개로, 오현주의 팬으로서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무도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무명 시절 때부터 그녀의 미모를 알아보고 그녀를 좋아했던 나다. 이제 막 주목을 받아 인기가 생기려고 하는데, 그런 사고를 당한다니,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일이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운명에 조금이라도 저항하고 싶다.
예상대로, 회사 앞에서 추병원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대략 10여분, 강남 추병원 앞에 까지 걷고 보니
‘꼬르르’
배가 고팠다. 나는 오늘 저녁도 못 먹고 잔업을 했으니까. 시계를 보니 정각 8시였다. 범죄가 일어나기 까지 1시간여 남은 상황. 아직 여유가 있다. 나는 근처에 눈에 띄는 ‘하이웨이 샌드위치’에 들렀다. 저녁 시간을 살짝 넘긴 탓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나는 점원에게 다가가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허니오트에 베이컨, 치즈 추가해주시고요 채소는 양상추 위주로, 거기에 할라피뇨 조금 넣어주세요. 소스는 스위트어니언에 마요네즈 반반 사이드 메뉴는 쿠키로 할게요.”
나는 주문한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바깥 추 병원이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나는 잠시 거기 앉아 추 병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추 병원이 앞으로 언주역 6번 출구에서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논현로 위로 수많은 차들이 오가고 있다. 평범한 강남 풍경.
‘저기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저기서 한 시간 뒤 누군가 누군가를 찌르는 범죄가 일어난다니 조금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12시간 뒤’가 내게 보내준 기사는 매우 명확했다.
‘그래... 그런 일은 막아야만 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숫자를 눌렀다. 1, 1, 2. 번호는 매우 쉽고 간단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이후가 문제다. 나는 화면에 112만 띄워놓은 채 통화 버튼을 앞두고 잠시 주저했다.
‘경찰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한 시간 뒤에 괴한이 나타나 오현주에게 칼을 찌르려고 한다고?’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다. 그건 너무 구체적이다. 한 시간 뒤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신고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경찰이 그런 신고를 받는다면, 첫째로 허위 신고인지 의심할 것이며, 둘째로 신고가 진짜라 생각한다 해도 신고자가 범죄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최소한 그 범인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112에다가 전화하면... 내 전화기록이 남겠지? 그렇게 되면 너무 피곤해지는데... 아무리 신고자라고 해도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최악의 경우 공범으로 몰릴지도 몰라.’
그건 별로 좋지 않다. 나는 일단 휴대폰에 써놓은 112를 일단 지운 다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가서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그것도 어렵다. 요새 어디든 CCTV가 있고 차 블랙박스가 있어서 대로변에 위치한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한다는 것은 내가 내 번호로 전화를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으며 고민을 계속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계를 보니 이제 막 8시 10분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40분. 범죄를 막으려면 지금 뭐든 해야만 한다.
‘어쩌지?’
그런데 그 때였다. 내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내가 앉아 있는 샌드위치 가게 앞으로 누군가 한 사람이 지나갔다. 키는 180cm에, 모자를 눌러 쓰고 검은 마스크를 한 거구 한 명. 그를 본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