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21화 (2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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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꺾여버린 꽃

    금요일 아침. 나는 평소처럼 씻고 출근할 준비를 마쳤다. 구두를 신고 현관 밖으로 나가기 전,

    ‘아 참’

    나는 마치 잊어버린 일이 있다는 듯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을 들어서 내가 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MTS를 켜서 계좌 잔고를 확인한 것이었다.

    계좌잔고 187,156,665

    1억8천7만 원. 지금 내 연봉은 3000. 연봉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감안해도 거의 6~7년은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모아야 겨우 모을 수 있는 돈이다. 현실적으로 10년은 모아야 벌 수 있는 거금. 그것을 단 2주 만에 벌었다.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계좌에 찍혀 있는 숫자는 진짜였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을 나섰다. 기분이 좋다.

    *

    나는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 정시 출근 시간까지 30분 남았지만, 회사는 횅하다. 다들 시간에 맞춰서 오기 때문.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사람의 체력이고 정신력이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짜내 이윤을 창출하려는 이 회사에 누가 일 분 일 초라도 일찍 오고 싶을까. 그런데 반대로, 나는 요즘에는 오히려 회사를 다닐 만했다.

    ‘여기가 아니면 안 돼’라고 생각 할 때는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더니, ‘언제든 떠나도 좋다’라고 생각하니 회사 일이 왠지 게임의 퀘스트처럼 느껴졌다. 나를 언제나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허과장의 시선도, 이제 즐기게 되었다.

    ‘뭐 임마, 불만 있냐? 불만 있으면 말하던가. 회사의 노예는 너지 내가 아니거든.’

    계좌가 배가 부르다 보니 살짝 관대한 생각도 든다.

    ‘그래 허 과장도 여기서 개처럼 10년 넘게 구르다 보니까 저런 개 같은 성격이 됐겠지...’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잠깐.

    ‘아니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그럴수록 후배들에게 잘 해줄 수도 있잖아?’

    국내 중고등학교, 대학교 팀을 거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성장한 선수 P도 학교 다닐 때 너무 맞고 축구를 해서, 자기는 후배들에게 절대 손 하나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허 과장이라고 해서 ‘상사가 후배 쥐어짜는 악습은 내가 이대에서 끊겠다.’ 하면서 실행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는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자기가 위에서 전무니 이사니 하는 것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는 대로, 그걸 후임들에게 똑같이 풀었다. 결국 사람의 그릇이 그 정도란 소리다

    ‘흥 그러니까 만년과장으로 저러고 있겠지.’

    역시 사람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다른 사람한테 잘하고 봐야 한다. 그가 만약 내게

    ‘한 사원. 조금 힘들더라도 힘내게. 자네는 젊고 장래가 있어.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분명 빛을 볼 거야.’

    그렇게 평소 잘해주고, 멘토의 역할을 해줬다면. 그래서 내가 최소한 그를 존경하지는 못하더라도 좋아하기라도 했다면, 퇴사하기 전에 좋은 정보 하나 찔러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장님 이거 지우엔터테인먼트... 오늘 9시 10분 이전에 좀 사두시죠.’

    라고 말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허 과장이 출근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저 놈은 요새 왜 저렇게 일찍 다니지?’

    하는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보고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직장 생활을 끝낼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는 오늘도 발로 차 버렸다. 후지산 대폭발 슛으로. 바이바이, 짜이찌엔, 사요나라. 내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8시 54분. 메일 올 때가 다 되었다. 나는 손가락 깎지를 만들었다가 피면서 살짝 스트레칭을 해두었다. 어제 돈을 번 건 번 것이고, 오늘 벌 것은 따로 벌어야하니까. 55분 메일이 오고 나는 그걸 확인했다.

    ‘구독기간 11일 남음.’

    먼저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남아 있는 구독기간이다. 11일. 조금 있으면 연장을 해야 한다. 천만 원을 내고. 이제와 아주 큰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아깝긴 하다. 지금 천만원은 나중에 일억. 십억, 백억이 될 수도 있는 돈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더 불려야겠어. 천만 원이 아깝지 않게... 아 참 골드 등급도 빨리 얻어야지.’

    골드 등급은 구독료는 자그마치 10억이다. 10억을 내려면 최소 30억이나 그 이상은 있어야 구독을 생각해볼 수 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정보를 쥐고 자본금이 없다면 손가락만 빨아야 할 테니까.

    ‘그래 최소 20억에서 30억은 있어야... 골드 등급이 가능하다. 골드 등급이 되도 뭐가 좋은 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경제’를 클릭했다. 나온 기사는

    ‘국세청. 직장인 절반, 월급 200만 원 이하, 상위 1% 2천만 원’

    경제 분석 기사였다.

    ‘오 그래? 절반이 200만 원 이하라고?’

    나는 한 바터면 그걸 클릭해서 볼 뻔했다. 돈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관심을 끄는 기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목만 보고 말았다. 저런 기사는 12시간 뒤에, 다른 언론이 써 주면 그 때 읽어보면 될 것이다. 이 메일에서는 미래 가치가 있는 기사만 읽어볼만 하다. 나는 이어서 ‘IT/과학’을 클릭했다.

    ‘며칠 뒤, 거대한 달 슈퍼 문 떠올라. 지구촌 사람들 관심.’

    나는 살짝 실망한 눈초리로 그 기사를 보았다. IT/과학. 뭔가가 뜰 것 같은데, ‘지우엔터테인먼트 피인수’처럼 뭔가 대박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영 뭔가 나오질 않았다.

    ‘여태 거의 2주? 넘게 계속 클릭 했는데... 성과를 못 내내...’

    이렇게 성과를 못 낸다면 다를 카테고리를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정치나, 사회, 세계 등등에서도 뭔가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연예’기사를 클릭했다. 지우엔터테인먼트 건으로 맛을 본 내게 당연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연예 쪽 기사가 내 눈길을 끌었다.

    ‘여배우 오현주 강남 추병원 앞에서 괴한에게 흉기로 찔려.’

    ‘응?’

    돈이 되는 기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 나온 이름. 오현주. 그것이 내 눈길을 끌었다.

    ‘오현주가 흉기에 찔렸다고?’

    오현주.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 1순위를 다투는 여배우였다. 계란형 얼굴에 정갈한 눈매, 오똑한 코와 살짝 얇고 긴 입술을 가진 그녀는 눈부신 미모에도 불구하고 데뷔 이후 몇 년째 뜨지 못했는데, 최근 드라마 ‘나와 너의 아저씨’에서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주며 인지도가 급상승.

    그 후 화려한 미모까지 재발견 되어 최근 CF 여러 개를 차지하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럴 때 흉기에 찔리다니. 갓 피기 시작한 꽃이 꺾여버린 것과 같았다.

    ‘뭐야 대체...’

    어차피 오늘은 돈 되는 기사가 없다. 나는 그걸 클릭해보았다.

    오늘 오후 8시 50분 경. 강남 추병원 앞에서 배우 오현주 씨가 괴한의 흉기에 급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날 추병원에 지인의 병문안을 갔었던 오현주 씨는 병문안을 마치고 매니저의 차량이 기다리는 논현로 길가에 나섰다가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괴한에게 급습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범인은 180cm 크기의 남성으로 마스크를 쓴 채 오현주 씨에게 접근하여 날카로운 흉기로 그녀의 상복부를 두세 번 찌른 후 그대로 달아났습니다. CCTV를 확인한 경찰은 그가 범행 이전에 언주역 근처를 서성인 점. 매니저 차량이 논현로 길가에 도착한 것을 보고 범행에 나선 점등을 들어 주변 지인의 계획적인 범죄로 보고 수사에 나섰습니다.

    ‘상복부를 두세 번 찔렸다고? 그녀는 괜찮은가?’

    그 이야기는 아래쪽 기사에 있었다.

    범행을 당한 그녀는, 그녀를 기다리던 매니저와, 근처 길을 지나가던 시민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병문안을 갔다 온 추병원 응급실에 곧바로 실려 갔지만, 출혈이 워낙 심하고, 상처를 입은 부위가 치명적인 곳이여서 생명이 위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헐...”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우리나라 여배우가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다니, 거기에 생명이 위급하다니, 오현주의 오랜 팬인 나로서는 꽤나 충격적인 기사였다. 나는 기사를 위에서 아래로 두세 번 더 읽어보았다.

    ‘헐... 어떤 미친 새끼가... 이거 진짜...’

    나는 기사의 내용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12시간 뒤’이 이 메일이 보내주는 기사는 모두 진짜였다. 쓴 사람도, 보낸 사람도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사실이 아닌 기사를 내보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직하고, 분명했다.

    ‘하아... 어쩌다가...’

    그런데 그 때였다. 한숨을 내쉬며 그 기사를 읽던 중 문득 묘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잠깐... 근데... 그럼... 내가 이 범행을 막아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범행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범행은 그야말로 12시간 뒤에 일어나는 미래의 일. 하지만 내가 여기에 관여한다면, 어쩌면 미래는 달라질 수도 있다.

    ‘범행 전에 112에 전화 한통이라도 때리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강남 추병원이라면, 언주역 바로 앞이다. 역삼역 근처에 있는 우리 회사와는 바로 한블럭 차이. 매우 가깝다. 걸어가도 5분이면 가는 거리. 그 때였다. 회사 내 누군가가 소리쳤다.

    “자자 오늘도 힘 냅시다.”

    “파이팅!”

    “파이팅~”

    업무 시작이다. 더 이상 메일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기사에 나와 있는 범행 시각을 확인했다.

    ‘저녁 8시 50분.’

    나는 그것만을 다시 한 번 확인 한 뒤 메일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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