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5화 (15/198)

# 15

밑밥

“오셨어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래. 우리 아들. 잘 지냈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안았고.

“세상에 집안 꼴이 이게 뭐야.”

어머니는 나에게 눈길을 한 번 줬는지 안줬는지 들고 온 물건을 내려놓고 집안 정리에 나섰다. 나는 어머니를 만류했다.

“아 엄마 내버려 둬요. 내가 알아서 할게.”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를 말리는 내 등짝을 한 번 크게

‘파악!’

때리고는

“뭘 알아서 해. 알아서 하는 놈이 이러고 살아?”

책상 위의 먹다 만 과자봉지, 의자에 걸려 있던 속옷 등을 수거하고 나섰다.

“아니 왜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때리고 그래...”

나는 따끈따끈한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보나마나 내 등에는 어머니의 손바닥 자국이 붉게 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들어온 여동생마저도 한 마디를 했다.

“어째 오빠는 서른이 다 되었어도 철이 안 드냐...”

나는 여동생 수정이를 보고 한 마디를 했다.

“뭐야 너도 왔냐?”

“응 겸사겸사 쇼핑 좀 하고 내려가려고.”

혼자 살 때는 몰랐는데, 내 작은 원룸에 네 가족이 모두 들어오니 조금 좁아 보인다. 나는 바삐 왔다 갔다하며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미안해, 청소에 동참했다.

*

“그래서 너는 선영이 돌잔치 안 간다고?”

“네 너무 피곤해요. 어제도 야근했거든요. 이모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그래도 가족 행사인데... 가야지 않겠니?”

어머니는 다시 한 번 권했지만, 아버지가 그걸 제지하고 나섰다.

“됐어. 상훈이 회사에서 힘들다잖아. 하루 정돈 쉬게 내버려둬야지. 그리고, 돌잔치 가면 처제들이나 조카들이 가만히 있겠어?”

아버지는 슬쩍 나를 보았다.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아버지 밖에 없다. 나는 아버지가 할 말을 이어서 말했다.

“돌 잔치 가면, 이모들, 사촌들 모두 모여서 나 결혼 안하냐고 언제 할 거냐고 물어볼 거 아니에요.”

사실 피곤한 것보다도 그게 더 큰 이유였다. 친척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그런 질문은 내게 불편했다. 돌을 맞은 선영이와 사촌형 내외를 축하해주고는 싶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까지 축하해주고 싶진 않다. 어머니는 잠시 나를 지켜보다가, 말을 꺼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요새는 여자 없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 때 아버지가 눈치 없이 말했다.

“왜 그 때 만나던 그 예쁜 간호사 아가씨는...”

그 말에, 나는 물론이고 어머니고 동생이고 아버지를 째려본다. 그제야 눈치를 챈 아버지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 헤어졌었나? 미안 미안.”

아버지는 악의는 없었던 것 같지만, 나는 잠시 그녀를 떠올려야만했다.

‘나쁜 년’

엄마가 이럴 땐 내편이다.

“됐어. 걔는 내가 봐도 별로였어. 딱 봐도 너무 여우 같더라. 얘 상훈아 그런 애는 잊어버리고 얼른 새 여자 만나. 너 요새 소개팅은 안 하니?”

“요새는 소개팅 할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왜 없어? 주말에 만나면 되지.”

“주말에는 피곤해서 쉬어야 되요.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야근하면 그게 쌓여서... 토요일 저녁까지 쉬어도 피로가 안 풀린단 말이에요.”

나는 슬그머니 직장이야기를 꺼냈다. 봐서 퇴사 이야기를 끼어 넣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때 여동생이 끼어들었다.

“아직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 그래 오빠. 진짜 좋아하면 피곤하고 자시고 달려들 텐데.”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동생에게 말했다.

“네가 회사에서 야근을 안 해봐서 그래.”

“왜 우리도 야근해. 얼마 전에 운동회 때 내가 얼마나 학교에 붙어 있었는 줄 알아?”

나는 동생을 쏘아붙였다.

“그건 회사 야근에 비해서는 일하는 게 아니고 노는 거야. 그걸 상사한테 쪼여 봐야 알지...”

여동생은 옛날부터 나한테 한마디 지는 법이 없었다.

“우리도 쪼여. 요즘에는 학부모가 상사야 상사 수십 명이 나한테 우리 아이는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어찌나 쪼는데...”

“학부모... 학부모는 너한테 그래도 존댓말이라도 쓰잖아. 나는 반말에 쌍욕을 먹는 단 말야.”

“그만들 해. 원래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제일 힘든 법이야.”

남매간의 언쟁을 듣던 아버지가 중재를 하고 나섰다. 우리 남매는 서로 입을 닫았다. 그 사이 어머니가 슬그머니 한 마디를 꺼냈다.

“너 그러다가 네 동생이 먼저 시집갈지도 모른다.”

나는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뭐야 너 아직도 사귀냐? 그... 의사?”

“그 사람이 뭐야. 매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사귀었지? 2년? 3년?”

“이제 4년이야. 오빠는 왜 그렇게 동생에 관심이 없어?”

“너는 나한테 관심 있냐.”

돈 깨나 번다는 의사양반이 뭐가 좋아서 우리 동생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사귄 지 꽤 됐다. 매제가 될지도 모른단 말이 헛말은 아닌 듯하다. 나는 부모님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동생이 먼저 가도... 요새는 그런 거 따지는 시대도 아니고 갈 수 있는 사람 가는 게 맞죠.”

그 말에,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왜 너도 갈 수 있어. 좋은 대학에 번듯한 직장까지 있는데.”

직장. 결국 그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이번에는 돈 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직장은 있는데 돈이 없잖아요. 모아놓은 돈은 없고 빚만 남았는데 뭐...”

어머니가 한 마디를 했다.

“돈이 무슨 상관이야 사람만 좋으면 됐지.”

“요즘 여자들은 돈 많은 남자를 사람 좋다고 생각해요.”

말하고 나니 갑자기 ‘나도 이제 인기 많겠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혀를 찬다.

“요즘 애들은 돈 돈... 우리 땐 빈손으로 시작해서 아파트 사고 다 했는데...”

“그거 아버지 때고요. 요샌 그렇잖아요. 근 십 년 쉬지 않고 일해야 아파트 방 한 칸 살 수 있는 거”

나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준비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퇴직을 위한 명분으로.

“그래서 말인데... 회사 다니다가 기회를 봐서 창업을 하고 싶어요. 월급쟁이 인생으로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힘들어요. 아무래도 내 사업을 해야...”

내가 창업 소릴 하니 어머니 눈이 커진다.

“창업? 너 또 그러니? 그거 한다고 취업 1년 늦어 진거 기억 안나?”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때 취직 준비를 한다고 하다가 잠시, 창업을 한답시고 외도를 했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부모님도 응원을 해주셨지만, 결국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구직이 늦어서 가까스로 지금 회사에 입사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 때 네가 네 스스로 말했잖니 이 나라에서는 창업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어렵다고.”

나는 조용히 한 마디를 했다.

“알아요 그런데... 혹시 모르죠. 로또라도 될지... 어쩌다 목돈이 생기면...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요. 창업에.”

“흥 그놈의 로또 잘도 되겠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회사나 잘 다녀. 요새 청년실업이 몇 십만인데. 너 배부른 소리하는 거다 얘.”

*

“그럼 가세요.”

“또 오마.”

“청소 좀 하고 살아.”

“그래. 맞아 집이 그렇게 지저분하니까 여자가 안 생기는 거야”

“헛소리 하지 말고 가라...”

나는 그렇게 가족을 보냈다. 뭐 이런 저런 언쟁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대놓고 이야기가 나오진 않았지만. ‘돈이 있으면 창업을 해도 된다.’는 대화가 오가긴 했으니까. 이런 식으로 운을 몇 번 더 띄우다가 부모님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몇 억의 계좌 인증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님도 깜짝 놀라시겠지. 그 땐 또 어떻게 말해야하나... 나 이제... 평범하게 살기는 글러 먹은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건 그 때 걱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우선은 부자가 되는 게 우선이다.

‘아 맞아 오늘 로또 기사 나왔는지 확인하려고 했지.’

나는 문득 든 생각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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