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9화 (9/198)
  • # 9

    목줄이 풀린 사자

    나는 지하철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다시 돌아온 회사 앞 횡단보도. 여기만 오면 아무래도 뭔가 떨어트린 사람처럼 땅을 훑어보게 된다.

    ‘최대 2000만원 당일 대출’

    ‘백마 24시간 출격 대기 중’

    ‘8282 대리운전 지금 전화하세요!’

    하지만 역시나, 내가 봤던 찌라시는 없다.

    ‘역시 그건... 선택받은 소수만 받아 볼 수 있는 기연이 틀림없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주말에 푹 쉬고 놀다가 월요일 아침에 이 도로를 건널 때면 정말 지옥으로 가는 삼도천을 건너는 것처럼 죽을 것 같았는데,

    ‘흥 이 짓도 얼마 안 남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오늘은 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한 달 정도만 더 일 한 다음 사표를 낼 생각이었으니까.

    ‘삐빅’

    회사에 사증을 찍고 들어와 보니 사무실은 한산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8시 30분. 오늘은 평소보다 10~20분 일찍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가 갑자기 더 좋아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내게 회사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바로 8시 55분에 오는 메일.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업무시간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다른 사람이 볼까 업무용 화면 하나를 띄워놓고 다른 창을 켜 메일계좌에 들어갔다. 메일함에는 여전히 스팸메일만 999통이 들어 있다.

    “후우...”

    나는 마치 경기에 들어가기 전 운동선수처럼 손을 깍지를 껴 길게 스트레칭을 하며 심호흡을 했다.

    ‘무슨 정보가 들어오건 간에 빠르게 분석한 다음 돈을 벌 최적의 방법을 찾아낸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나는 살짝 발을 떨며 메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 한상훈 오늘 일찍 왔네?”

    입사 동기 최 사원도 오고

    “흠흠.”

    밉상인 허과장도 출근했다. 그러다보니 드디어 8시 55분.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 나는 다소 초조하게 메일함을 새로 고침했다. 그리고 잠시 후, 메일이 왔다.

    ‘S. 12시간 뒤’

    그런데 조금 달라진 게 있다. 앞에 붙어 있는 S.

    ‘이건 뭘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메일을 클릭했다. 그러자 곧 궁금증은 풀렸다.

    ‘Silver 등급 회원 메일’

    아 실버의 S였구나. 나는 메일을 내려 보았다.

    *

    Silver 등급 회원 메일 구독기간 30일 남음

    ‘정치’ ‘경제’ ‘사회’ ‘생활/문화’ ‘세계’ ‘IT/과학’ ‘연예’ ‘스포츠’

    하루에 세 가지 카테고리를 골라 제목을 클릭해

    한 개의 뉴스만 구독해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카테고리를 선택해주세요.

    Gold 등급 회원 신청 가능합니다. 안내 열어보기

    *

    상기의 내용은 안내를 받은 대로였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카테고리 옆에 네모난 칸으로 체크하는 곳이 생겼다는 점. 이걸 클릭해서 세 개를 고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고르기 전에 아래 쪽. 골드 등급 안내에 호기심이 먼저 갔다.

    ‘골드 등급은 뭐가 더 좋지?’

    하는 생각에 나는 ‘열어보기’를 클릭했다. 그러자 닫혀있던 내용이 열리며 안내가 나왔다.

    *

    N은행 계좌 777-7777-7777-77 예금주 777으로

    금 1,000,000,000원을 입금하시면

    즉시 월정액 서비스가 갱신되며

    골드 등급 회원 서비스를 업그레이드 받게 됩니다.

    후회하지 않을 서비스로 보답하겠습니다.

    *

    ‘에?’

    나는 일단 써져 있는 금액의 0숫자부터 세 보았다.

    ‘일십백천만십만...’

    십억이다.

    ‘십억?’

    턱 하고 숨이 막히는 금액이다. 계좌에 200만원 들어 있는 지금 당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 실버등급에서 몇 달을 부지런히 모아야 신청을 해볼 만 할 것이다.

    ‘그나저나... 골드 등급의 혜택은 뭔데? 왜 안 알려주는 거야? 10억을 주면 뭘 해줄지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0억을 넣으란 건가?’

    그런 의문이 들지만 뒤에 있는 문구. ‘후회하지 않을 서비스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눈에 걸린다. 사실 저런 말은 인터넷 가입을 유도할 때든, 휴대폰 서비스를 팔 때든 의례 하는 말이라서 보고도 듣고도 그냥 넘기는 말이지만, 이 메일에 써져 있다 보니 왠지 강력한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왠지 10억 넣으면 100억, 1000억짜리 효과가 있을 것만 같다.

    ‘좋아 그럼 금방 실버 등급에서 10억을 모아서 가겠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골드등급 안내를 접고 위에 기사 쪽으로 돌아왔다.

    ‘세 개를 제목을 먼저 볼 수 있다 이거지?’

    나는 먼저 경제 옆에 있는 박스를 클릭해보았다. 그러자, 그 아래로 한 줄의 제목이 떴다.

    경제 – 마리오 드라카 총재. 경기 침체 시 양적완화 재고

    확실히 사이즈가 어마어마하다.

    ‘마리오 드라카라면... 유럽중앙은행 총재 아냐?’

    세계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사람 중 한명이다. 말 한마디에 세계 경제가 왔다갔다하는. EU의 경제 수장. 양적완화도 대단히 중요한 뉴스일 것이다. 하지만 당장 통장에 200만원있는 내가 굳이 이 기사를 읽어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어서 생활/문화를 클릭했다.

    생활 – 내일 전국에 비. 우산 챙겨가세요.

    ‘아 이건...’

    굳이 전문을 읽어보지 않아도 제목만 가지고 모든 소식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내심 로또 번호가 당첨되길 바랐는데.

    ‘아니 생각해보니 뉴스가 나오려면... 추첨을 먼저 해야 할 거 아냐?’

    그랬다. 로또 추첨은 토요일 밤에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그걸 노리려거든 토요일 낮에만 생활문화를 선택해야할 것 같다. 나는 이마를 한 대 쳤다.

    ‘좀 더 생각하고 고를걸...’

    하지만 이번에 교훈을 얻었으면 됐다. 나는 마지막으로 스포츠를 클릭했다.

    ‘제발. 이건 걸려줘야 되는데...’

    하면서.

    스포츠 – 유타 재즈, LA레이커즈를 꺾고 리그 3위로 껑충

    ‘떴다.’

    나는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역시 가능성 있는 한방은 이거다. 유타 재즈와 LA레이커스. 야구, 축구에 이어 이번엔 농구. 분명 프로토 OMR카드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이 둘이 전력차가 어떻게 되는지 배당은 얼마나 되는지는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것 하나만 해도... 꽤 벌수 있다.’

    나는 그런 생각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그 때, 허 과장이 나를 불렀다.

    “아 한 사원. 어제 보낸 포트폴리오 때문에 그런데... 잠깐 와봐.”

    “아 네.”

    또 무슨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이거... 글씨가 너무 작잖아.”

    내용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고. 또 조그만한 거 가지고 꼬투리다.

    ‘아니 글씨가 작으면 자기가 키우면 될 거 아냐 그것도 못하나.’

    하지만 그는 그걸 가지고 나를 나무랐다.

    “요즘 장 이사님 노안 오셔서 글씨 크게 해야 한다고 했어 안했어? 응?”

    이 아저씨는 완전 나를 스트레스 푸는 대상으로 여기는 듯하다. 내가 ‘네 네’하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려는 거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지난주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딱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 그래요? 다음번엔 더 잘해오겠습니다.”

    “뭐?”

    내 당당한 반응에 그는 오히려 놀란다. 놀랐을 것이다. 내가 여태 반항 한번 한적 없으니. 그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야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인사고과에 반영한다?”

    또 나왔다. 인사고과. 그는 그게 나를 죄는 목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게 잘못 들어가면 연봉이 까이고 승진에도 영향이 가니까.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오히려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뭐???”

    두 번이나 엿을 먹으니, 허 과장은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이제 내 쥐꼬리만한 연봉 에도, 이 망할 회사 승진에도 별로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흥 나는 이제 목줄에 메달린 개가 아니라 사자다. 날개 달린 사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허 과장에게 말했다.

    “저는 그럼 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더 다른 필요한 일 있으시면 부르세요.”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허 과장은 멍 하니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한번 피식 웃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