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4화 (4/198)

# 4

12시간 뒤(3)

내 메일 창에는 A4한장정도 되는 분량의 기사가 떴다. 나는 손에 턱을 괸 채로 그걸 읽기 시작했다.

[롯데 자이언츠가 한화 이글스와의 맞대결에서 극적인 드라마를 그리며 승리했다. 경기 초반 계속된 실책으로 2대0으로 리드 당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9회말 원아웃 상황에서 4번 타자 정성훈의 1루타에 이어 5번 타자 강용진의 2루타로 한화 이글스를 턱 밑까지 추격했다. 주자를 2루와 3루에 둔 한화의 투수 최용욱은 볼 두 개를 던진 뒤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실투. 6번 타자 권혁준에게 끝내기 홈런을 내주면서...]

기사를 읽어본 나는 결과를 빠르게 요약했다.

‘...음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롯데가 0:2으로 지다가 마지막에 3:2로 역전했다 이거군. 그런데 이건 언제 하는 경기지?’

나는 그 메일 창을 남겨둔 채로 포털사이트의 스포츠 중계사이트에 들렀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야구 경기 일정/결과’를 찾을 수 있었다. 오늘 밤에는 늘 그렇듯 여러 야구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넥센, SK, LG, 삼성. 많은 야구팀들 중에서 나는 롯데와 한화를 찾았다.

‘롯데와 한화 롯데와 한화... 있다.’

거기에는 ‘경기 중’이라는 빨간 불이 들어와 있다. 지금은 9회 초. 그리고 스코어는.

‘한화2 대 롯데0’

나는 눈을 의심했다. 기사에 쓰여 있는 그대로다.

‘이 기사대로라면... 이제 역전...’

나는 다시 스포츠 사이트로 돌아와 ‘문자 중계’에 들어왔다.

[원 아웃 상황 4번 타자 정성훈 타석에 들어옵니다.]

나는 알트탭을 해가면서 현재 상황과 비교를 해보았다. 기사에 쓰인 대로다. 살짝 몸이 떨린다.

‘이거 정말 그대로 이루어지는 건가?’

제 1구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 볼입니다.

제 2구 급격히 떨어지는 공. 역시 볼입니다. 공을 잘 고르는 정성훈.

제 3구 맞았습니다. 맞았습니다. 1루타입니다.

역시 위기 상황에서 한 건 해줍니다. 4번 타자 정성훈.

기사에 쓰여 있는 그대로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5번 타자 강용진 타석에 들어옵니다. 과연 마지막 추격의 불씨를 살릴 수 있을지.

제 1구 아 맞았습니다. 큽니다. 큽니다. 담장 넘기느냐. 넘기느냐.

‘넘기진 않아.’

펜스 맞고 나오는 볼. 외야수가 급히 잡아 송구합니다.

정성훈 3루까지만 뛰고 뛰지 않습니다. 2루타입니다.

주자 2루, 3루.

나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이제 5번 타자가 끝내기 홈런을 치면 이 기사는, 이 예언은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그런데 그 때였다.

“이게 진짜?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너무 놀라 보고 있던 창을 닫아버렸다. 뒤에는 허 과장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

회사를 빠져나온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네가 그러니까 실적이 그 모냥 아니냐? 응?’

허 과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왕창 깨졌다. 업무 중에 야구 중계나 보고 있다고. 평소 없던 흠집도 꼬투리 잡아 나를 괴롭히는 허 과장인데, 이번 건 제대로 물었으니 한 한달 간은 괴롭힘 당할 것이다.

“휴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짓을 늙어서 은퇴하기 까지 해야 하나? 쥐꼬리만한 월급 타면서, 좆같은 상사와 부비부비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바보 같은 일을?’

이건 노예다. 노예. 누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했을까. 돈 없으면 자발적으로 노예 짓을 해야 하는데.

‘빚만 없어도 확 때려 치고 싶은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보시죠!”

회사 앞 횡단보도 앞에서 대머리 아저씨가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걸 보고

‘아 맞아. 야구 결과 어떻게 됐지?’

아까 보다만 야구 결과를 떠올렸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능숙하게 스포츠 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한화와 롯데의 경기 결과를 찾아보았다.

‘경기 종료. 롯데3 : 한화2’

나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

나는 경기 상세 까지 읽어보았다. 아까 보았던 9회말 상황 뒤로

6번 타자 권혁준 타석에 들어옵니다.

제 1구 바깥쪽 멀리 벗어나는 골. 볼입니다. 최용욱 선수 흔들리나요.

제 2구 몸 가까운 쪽. 스트라이크인가요? 아 볼이군요. 심판이 볼을 선언했습니다.

제 3구 맞았습니다. 쭉쭉 뻗어나가는 볼. 홈런. 홈런입니다. 권혁준 선수의 끝내기 홈런!

기사에 나왔던 그대로, 실현되어 있었다.

‘이거 대체 뭐야?’

나는 혼란스러웠다. 다시 쓰지 않던 메일함에 가서 메일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메일은 메일함에서 사라져 있었다.

[지금 클릭하시면 70% 대 할인]

[라식? 라섹? 고민하지 마세요!]

단지 쓸데없는 광고들만이 메일함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뿐이다.

‘이게 대체...’

지난번에는 숙취가 심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번엔 아니다. 분명히 그 메일은 미래의 일을 12시간 뒤 일을 알려서 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 찌라시는 뭐지?’

갑자기 든 생각에 나는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그 찌라시. 어제 오늘 똑같은 바지를 입었는데, 대체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버렸나?’

그 때 마침

‘띠리리, 띠리리’

회사 앞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나는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면 바로 지하철역 앞이다. 그 때, 지각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찌라시를 주웠던 바로 그 자리. 길을 건넌 나는 거기서 지난 번에 봤던 그 찌라시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100% 당일 대출’

‘미녀 24시간 항시대기’

와 같은 것만 보일 뿐. 내가 봤던 그 찌라시

‘오늘은 지각해도 혼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찾을 수 없었다.

‘뭐였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이게 정말 무협소설에서나 나오는 기연이란 것일까.

‘그럼 내일도... 그 메일이 오는 건가? 8시 55분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 역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지하철 역 앞의 노점 간판이 왠지 모르게 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출퇴근을 하면서 수백 번 스쳐갔던 가게인데, 그게 여기 있다고 ‘인지’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로또 2등 당첨 명당. 토토, 프로토 판매’

나는 그 반짝이는 불빛을 잠시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노예생활... 끝낼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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