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3화 (3/198)

# 3

12시간 뒤(2)

나는 입을 닦으면서 그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았다.

[별명 ‘나이트’로 더 유명한 미국 가수 로저 잭슨이 오늘 미국 현지 시간 오전 10시경 사망한 채로 발견 되었다. 당국 검사관에 따르면 사인은 마약류 진통제 남용으로...]

어제 읽어본 기사랑 몇 가지 단어만 다를 뿐 거의 똑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몇 개의 기사를 더 읽어보았다. 역시나 표현만 다를 뿐 유사한 내용으로 쓰여 있다. 나는 기사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보았다.

우리나라에 로저 잭슨 사망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오후 8시경. <속보>로 맨 처음 나온 기사는 정확히 8시 12분에 올라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쓰림 따위는 지금 중요치가 않았다. 나는 방 한 구석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가져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켜서 바로 메일함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어제 봤던 메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지? 난 지운 적 없는데?’

나는 메일함을 더 뒤져보았다. 앞으로 뒤로, 혹시나 해서 휴지통까지도. 하지만 어제 봤던 메일은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쯤 되니 귀신에 홀린 것 같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아니다. 술과는 상관없다. 어제 메일을 본 건 회사에서의 일. 술은 퇴근 후에 마신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이게 대체...’

마치 귀신이나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그런데 그 때였다.

“띠리리리”

손에 들린 핸드폰이 한 번 더 울렸다. 두 번 째 알람이다. 지금 씻고 나가지 않으면 지각을 하게 된다. 괴물 같은 허 과장은 맹장으로 입원한지 하루 만에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일단 그 요상한 이메일 일은 제쳐두고 출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어제 나 없어서 좋았지?”

허 과장은 입을 실룩실룩 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응? 아주 병원에서 평생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지?”

마음 같아서는 그 비열한 면상에다가

‘그래 이 새끼야’

그대로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회사 다니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나는 머리를 숙인 채로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래? 아닌 녀석이 보고서를 이 따위로 써?”

허 과장은 내가 어제 써서 낸 보고서를 쥔 채로 내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너는 어떻게 된 게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제대로 일을 안 하냐? 응?”

허 과장은 동기들 하나 둘 승진 할 때 승진 못하고 천년만년 과장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돌고 돌다가 우리 팀 과장으로 꽂혔다. 나이를 생각하면 사실상 좌천. 그런데 그는 그 스트레스를 부하 직원에게 풀었다. 나는 옴짝달짝 못하고 그 갈굼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자기가 무능력해서 그런 걸 나한테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딴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숙인 채 무기력하게 대답을 해야만 했다.

“...네”

허 과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가 봐”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내 자리로 돌아왔다. 회사 들어온 지 일 년 반. 청년실업 백만 시대 겨우 취업난을 뚫고 지금 회사에 입사했지만 좋은 건 첫 한두 달 정도였다. 매일 같은 야근에 연봉은 쥐꼬리요. 매일 상사에, 실적에 쥐어 짜였다. 나는 매일 같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우 진짜 그만두고 싶다 시발’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혼잣말을 하곤 했지만, 그럴 수 가 없었다. 나는 소위 흙수저였으니까. 한 학기 등록금 오백만원이 넘는 사립대학교를 4년이나 다녔고, 졸업을 하고도 수입 없이 몇 년이나 구직생활을 해야만 했다.

모아둔 돈은커녕 아직 내게 못 다 갚은 학자금 대출이 천만원이 남아 있었다. 일을 그만둔다면 당장 월세부터 걱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일이 안 맞아도, 상사가 악마 같고 회사가 지옥 같아도 그만 둘 수 없다.

*

‘아 눈 빠지겠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던 나는 눈을 깜빡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연스레 사무실 시계가 내 눈에 들어온다. 금요일 저녁 여덟 시. 소위 불금이라 불리는 금요일 밤이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 팀은 전체 야근이기 때문이다. 주말에도 불러서 일을 시키는 우리 회사 특성상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허 과장이 한 마디를 한다.

“자자 오늘 다 끝내자고. 그래야 휴일에 푹 쉬지.”

“예~”

“옙”

그 말은 오늘 제대로 하지 않으면 주말에도 부르겠단 협박과도 같다. TV에서는 근로기준법이 강화됐다느니 뭐니 맨날 떠드는데 우리 회사는 그런 건 가볍게 무시하고 사원들을 갈아 넣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표출할 순 없다. 그런 짓을 했다간 내부고발자로 낙인 찍혀 우리 회사는 물론 다른 회사에서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은 멀고 상사는 가깝단 말이지... 이거 순 조폭이나 다를 바가 없다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끄으...’

그 때,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진다. 허 과장이 있는 자리. 나는 용수철처럼 바로 키보드와 마우스에 손을 복귀시켰다.

‘젠장.’

회사에서는 일일일. 일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야근을 한다고 해서 딱히 생산성이 늘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놈의 회사는 회사원을 갈아 넣어야만 성과가 더 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집에서 맥주한잔 하면서 TV나 봤으면... 그럼 내일 일을 더 잘 할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모니터를 보았다. 그런데 문득, 머릿속에

‘그 메일’

오늘 아침 본 메일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느라 잊고 있었는데, 정말 이상한 메일이었다. 마치 미래를 보고 와서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없어졌지.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난 지운 적이 없었는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한, 허 과장은 내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내 메일계정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12시간 뒤]

다시 한 번. 그 메일이 와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아까는... 오류였나?’

그런데 이번 메일은 읽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보낸 시간을 보았다.

‘7월 25일 8시 55분’

어제 본 메일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온 메일이다.

‘새로 온 메일이잖아?’

나는 그 메일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잠시 왼쪽 버튼을 누를지 말지 망설였다. 바이러스 검사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꺼림칙했으니까.

[‘정치’ ‘경제’ ‘사회’ ‘생활/문화’ ‘세계’ ‘IT/과학’ ‘연예’ ‘스포츠’]

[하루에 한 뉴스만 구독해 볼 수 있습니다.]

내 시선은 다시 한 번 ‘하루에 한 뉴스만 구독해 볼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에 갔다. 지난번에는 읽었을 때는 ‘하나만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집중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하루에 하나’는 보내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음... 바이러스는 분명 아니었지. 그럼... 이번엔 뭘 봐볼까...’

아무래도 좌측의 정치나 경제 같은 딱딱한 뉴스보단 우측의 연예나 스포츠의 말랑말랑한 뉴스에 손길이 간다. 나는 마우스 커서를 한 바퀴 빙글빙글 돌리다가 이번엔 ‘스포츠’면을 찍어보았다. 곧 창 하나가 떴다.

[롯데, 한화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2연패 탈출]

롯데, 한화. 모두 야구팀이다.

‘야구 뉴스인가?’

나는 그 창을 클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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