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FA협상
“잠이 꿀맛이지? 행복하지? 마누라없이 딴여자들하고 노니까 하늘을 나는것같지?”
우승파티를 하고 천국에서 정신이 끊어진 것 같은데 전화기가 울린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던 정신이 수화기에서 들리는 루다의 목소리에 한번에 돌아온다.
“그냥 춤만 췄어 춤만”
“내가 들은 얘기가 많은데 1년에 하루니까 묻어두겠어. 조심해 내가 다 보고 있다”
무슨 얘기를 들었을까…. 조각조각 생각나는 것들만 모아도…. 나…. 소박맞겠는데…. 무섭다…. 심지어 어제 같이 놀았던 사람들 다 루다가 불러준 사람들인데…. 우승했다는 기분에 미쳐서…. 하…. 어질어질하다.
“그건 그거고. 이제 백수가 됐는데 기분이 어때?”
“어? 백수?”
그러네…. 우승했으니…. 백수네….
갑자기 허탈감 같은 알 수 없는 기분이 몰려온다.
내가 한 거라고는 랩터스 소속으로 치고 달린 것밖에 없는데 나에게 더 이상 랩터스가 없어졌다.
“내가 우리 신랑한테 미안하네. 조금만 기다려 멋진 직장 잡아줄 테니까 나만 믿어”
그래 야구 어디에서 하든 다 똑같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허탈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루다와의 전화를 끊고 냉수 한잔을 먹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택시를 타고 잠실로 향했다.
텅 빈 훈련장.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닌데 오늘은 더 썰렁해 보인다. 집중이 잘 안 되긴 하지만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혼자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그래 여기가 내 집이다. 여기만큼 마음 편한 곳이 없다.
* * *
“조 단장 어제 술 안 먹었어? 새벽부터 여기서 뭐 해?”
“그러는 구단주님은. 여기서 뭐 하시죠? 몰골을 보아하니 씻지도 않고 나온 것 같은데요?”
“씻지도 않고 나오다니. 난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한심하게 쳐다보는 여자와 거지꼴을 하고는 당당한 남자의 대화가 실내훈련장이 보이는 복도에서 시작된다.
“팀이 이 꼴인데 침대에서 쉴 수 있겠어요. 우리 팀 리빌딩할 생각이 나왔어요.”
“그런 게 생각한다고 되나. 돈을 써야지. 구단에 돈 많잖아.”
“많으면 뭐 하나요? 사치세 때문에 쓸 수가 없는데.”
랩터스의 구단주와 단장이 우승한 다음 날부터 치열하게 다음 시즌을 구상한다.
“김소전을 한 명으로 메꿀 수는 없지만, FA를 쓸어오면 좀 커버되지 않겠어?”
“김소전도 김소전인데 김호영은 어째요?”
“아…. 호영이도 양키스로 가지.”
“자…. 잠깐. 양키스? 김호영 양키스?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는 김호영은 포스팅인데 돈 많이 쓰는 데가 데려가는 거고 양키스가 제일 많이 쓸 거니까 거기 가야지.”
어젯밤 좋은 술 먹고 기분이 좋았던 랩터스 단장의 얼굴이 급격히 찌그러진다.
“양키스에 이시윤이 있는데 김호영을 또 데려간다고?”
“조 단장이 무시하는 현민이가 큰일을 했지. 이시윤이 있어 김호영이 적응도 쉽고 둘 사이 오랜 친구라 시너지 효과도 있을 거라고 약을 잘 쳤어. 양키가 물 거야.”
“안된다고. 둘이 스타일이 겹쳐서 안 된다고! 지금 구성의 양키스에 김호영은 선발로 자리 못 잡는다고! 당장 계약 돌려놔!”
“어허.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핀 스프라이트를 입어보는 게 꿈이라고. 그 꿈을 지켜줘.”
“어디 얼어 죽을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안돼! 안된다고!”
어젯밤의 술이 안 깬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데 어디선가 배팅 소리가 들려온다.
“자….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훈련하나 본데? 누구야?”
단장에게 제압당하기 직전의 구단주가 평소라면 무시했을 만한 배팅 소리를 기적처럼 듣고는 반응을 한다.
구단주에게 승리를 거두기 직전이었던 단장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훈련장이 보이는 창문으로 향한다.
“쟤는 이제 우리 소속도 아닌데 왜 와있어.”
“김소전이니까요!”
“쟤는 이제 미국 가면 어디서 훈련하려나. 그것도 고민이네.”
“그걸 왜 걱정해요? 데려가는 팀에서 걱정해야지.”
매몰찬 단장의 말에 날 선 목소리를 내는 구단주.
“사람이 말이야 그러면 안 돼. 그래도 우리 팀에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뛰던 선수였는데.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돼.”
구단주에게 한 소리 들으면서도 훈련하는 선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단장.
“내가 다른 건 다 걱정해도 김소전이 야구하는 건 걱정을 안 해요. 훈련할 데가 없으면 주차장에서라도 훈련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평소 캐릭터답지 않게 나긋나긋하게 말을 건네는 단장의 말에 구단주가 당황을 한다.
“그…. 그렇지 뭐. 루다가 알아서 잘 챙기겠지. 뭐….”
* * *
“루다야. 진짜 네가 상대할 거야?”
“내가 해야지요. 내가 이 회사 주인인데. 우리 회사 최고의 물건은 내가 팔아야 하지 않겠어요?”
한국에서 선수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는 가운데 미국에 있는 선수의 대리인들은 전쟁터로 향한다.
“루다야. 네가 진짜 원하는 데가 여기 맞지? 아직 안 늦었어. 우리 뉴욕을 갈 수도 있고 LA를 갈 수도 있어. 아니면 텍사스도 있고 너 좋아하는 마이애미도 갈 수 있어.”
“삼촌. 이제 저도 어린애 아니잖아요? 놀 것만 생각하면 다른 데를 선택했겠지만 자리 잡고 살려면 여기만 한 데가 없어요.”
걱정이 한가득한 채로 운전하는 바지사장님의 차가 목적지에 도착한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펫코파크의 주인 헬로원입니다.”
“루다앤H의 이루다에요.”
베일에 가려져 외부활동을 안 한다던 샌디에이고의 구단주가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 영입을 위해 직접 나타났다. 메이저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베테랑 에이전트도 메이저의 구단주가 직접 나올 거라는 건 생각도 못 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회사의 언더커버 보스가 직접 전면에 나선다.
“저희에게 선수를 파시겠다고요?”
“샌디에이고에 딱 필요한 선수니까요.”
“글쎄요. 김소전 선수가 좋은 선수이긴 하지만 저희가 꼭 필요할까요? 잘 모르겠네요.”
손님 불러 놓고 괜히 딴소리를 늘어놓는 집주인. 손님들의 표정이 안 좋아진다.
“샌디에이고가 계속 하위권에서 나갈 생각이 없으면 그래도 돼요.”
자기가 가진 최고의 물건이자 남편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 기분이 확 상한 루다가 샌디에이고의 현실을 이야기해 준다.
“말이 꽤 맵네요. 선수를 팔러오신 분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샌디에이고가 김소전을 절실히 원한다는 걸 알고 있는걸요.”
자기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선수 대리인에 기분이 상한 구단주의 눈빛이 사납게 변한다.
“우리는 내야수는 그리 필요치 않아요. 우리는 드넓은 외야를 책임져줄 선수가 필요해요”.
“샌디에이고 스카우트팀부터 손을 보셔야겠어요. 김소전 선수 내야에서도 핵이었던 유격수를 보던 선수예요. 그리고 데뷔는 외야수로 데뷔했던 선수고요. 팀에서 원하는 역할이 있으면 어디든 나갈 겁니다. 그 정도 워크에식은 차고 넘치거든요.”
샌디에이고의 홈구장 펫코파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한 대리인에게 친절한 구단주가 설명을 시작한다.
“아직 펫코파크를 못 보신 것 같은데 메이저에서 손꼽히는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 여기예요.”
“크다고 해봐야 센터 121미터에 좌우중간 119미터 아닌가요?”
“하하. 아직 드넓은 외야에 안 나가보셔서 그러신 것 같은데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
마음에도 없는 친절한척하는 구단주에게 루다가 반격에 나선다.
“센터 125미터 좌우중간 120미터.”
“네?”
“김소전이 뛰던 잠실구장의 사이즈에요.”
“믿을 수 없네요. 한국에도 고산지대가 있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생각으로 그런 구장을 지은 겁니까?”
샌디에이고 구단주의 물음에 답할 생각이 없는 루다가 오히려 자기가 질문을 던진다.
“그 큰 구장에서 김소전이 홈런을 몇 개나 쳤을 것 같아요?”
질문을 받은 샌디에이고의 구단주가 주위에 도움을 구하려는 눈빛을 보내자 루다가 먼저 치고 들어온다.
“7시즌 동안 홈런을 250개를 쳤어요. 심지어 데뷔 시즌에 홈런 두 개만 쳤던걸 감안하면 6시즌 동안 쳐낸 거죠. 샌디에이고에 이런 선수를 가져본 적이. 있었나요? 250은커녕 200개나 친선수가 있던가요? 지금이 기회에요. 샌디에이고가 진짜 거포를 가질 기회에요”
반박할 말은 한가득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야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구단 역사상 그 누구도 기록하지 못했던 200홈런을 실제로 이뤄줄 수 있을 만한 선수가 눈앞에 나타나자 슬슬 속마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래봐야 하위리그에서 기록한 성적이에요.”
“올림픽, WBC 안 보셨어요? 국제대회에서도 4할 타율에 대회당 3개 이상의 홈런을 뽑아내는 선수예요. 김소전에게 홈런 맞은 메이저리거들 불러드려요?”
구단주 옆에 배석한 기록원들이 동의의 표시를 전하자 구단주의 포커페이스가 살짝 흔들린다.
“그래요. 좋은 선수란 걸 인정하죠. 인정은 하는데 구단에 사소한 문제가 있어요.”
“문제요?”
뭔가 일이 잘 돼 가는 듯해 기분이 좋아지려던 루다가 문제라는 단어에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김소전 선수의 연봉 얼마를 생각하시나요?”
“저희의 제시액은….”
숨을 크게 들이쉰 루다가 곧바로 제시액을 부른다.
“14년 계약에 560M입니다.”
순간 주위에 정적이 흐른다.
“제가 잘 못 들었나요? 14년 계약에 얼마요?”
“연평균 4천만 달러씩 14년 계약. 총액 5억6천만 달러입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렇죠. 더 받아야 하는데 염가봉사죠.”
샌디에이고 구단의 인사들이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어하며 제안을 무시하려는데 끝까지 앉아있던 구단주가 루다에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샌디에이고는 빅마켓이 아니에요. 그런 터무니 없는 제안은 양키스나 다저스에 해야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면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구단주에게 루다의 반격이 시작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샌디에이고가 정말 스몰 마켓이에요?”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있어요. 샌디에이고에 정착한 프로팀도 거의 없어요. 여긴 프로스포츠가 살아남기 힘든 지역이에요. 그런 우리에게 5억6천만 불짜리 계약이라니 터무니없습니다.”
이정도는 준비가 된 루다가 해결책을 제시한다.
“샌디에이고가 스몰마켓이라는건 어불성설이에요. 북미 10대 도시가 스몰 마켓이면 다른 구단들은 전부 문 닫아야지요. 그리고 여기는 멕시코까지 배후로 둔 도시에요. 그들까지 생각하면 어디에도 밀리지 않을 팬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아니요 할 수 있어요.”
루다의 땡깡에 구단주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안 해봤겠습니까? 지금까지 빅마켓으로 키우기 위한 모든 방법이 실패했어요. 그런데 한 선수에게 560M짜리 계약이라니…. 이건 터무니없어요.”
“지금까지 실패했으니까 지금이 다른 방법을 쓸 때에요”
“뭐라고요?”
샌디에이고에 꼭 자리를 잡고 싶은 루다가 적극적인 구단컨설팅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샌디에이고는 전국구 스타라고 불릴만한 선수들이 없었어요. 하지만 김소전은 아니죠. 야구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화려한 선수예요. 메이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사랑받는 선수가 될 게 확실하다고요. 그리고.”
“그리고?”
“세게 그룹에서 멕시코와 샌디에이고에 반도체공장을 짓고 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상관이죠. 그 세계그룹의 메인 광고모델이 김소전이니까요.”
“그게 무슨.”
루다의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샌디에이고 구단주가 당황해한다.
“반도체 회사가 야구선수를 왜 광고모델로 쓰는지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거랑 팬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줄도 잘 모르겠어요.”
“세계그룹의 역량을 다 쏟아부어서 벌이는 큰 프로젝트에요. 그것도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프로젝트지요. 그래서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 모두 좋아하는 야구로 동질감을 같게 하려는 계획이에요.
한국에서 미국에 진출한 세계그룹처럼 한국에서 미국야구에 진출한 김소전을 광고모델로 써서 동질감을 느끼게 하려는 거에요.”
루다의 설명을 들은 샌디에이고의 구단주가 깊은 생각에 잠긴다.
“우리 이 이야기 조금 더 진지하게 해볼까요?”
성공적인 계약의 실마리를 잡은 루다의 얼굴이 밝게 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