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WBC (3)
- 주심과 투수의 말이 길어집니다.
- 주심이 투수의 여기저기를 검사하고 있어요. 부정투구 같죠.
투수 놈들. 사기꾼 XX들. 너희들은 믿을 수가 없지. 직구 같은 포크볼을 던지고 이중 키킹을 하면서 타이밍을 뺏는 사기꾼들.
그래도 그건 규정안에서 일어나는 사기고, 이건 좀 아니지. 공이 끈적끈적하도록 뭘 발라대면 안 되는 거다. 나쁜 놈아.
- 이번 대회 공인구는 메이저리그 공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메이저리그 공인구가 좀 미끄러워요. 그래서 공에 진흙을 도포해서 사용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미끄러운 건 사실이에요.
마운드에서 시간이 길어져 불펜을 바라보자 우리 팀 선발투수는 상대 팀 선발이 모자를 벗고 벨트를 풀거나 말거나 투수코치하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아저씨. 또 기술적인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경기에 집중 좀 합시다.
- 주심 그냥 내려옵니다.
-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나요?
뭐…. 뭐지…. 심판 아저씨 호기롭게 마운드에 올라갔으면 저 사기꾼을 퇴장시키고 오셔야지 왜 그냥 와요?
- 주심 오히려 김소전선수에게 다가갑니다.
“배트 체크”
뭐야? 지금 왜 나한테 오는 건데
- 주심이 김소전선수의 배트를 살피고 있습니다.
- 무슨 일이죠? 김소전선수가 평균보다는 조금 긴 배트를 사용하는 거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부정배트를 사용하진 않는데요. 이미 여러 번 증명이 됐어요.
- 어떤 식으로 증명이 됐을까요?
- 김소전선수 약점이 몸쪽 높은 공이다 보니 몸쪽공을 치다 배트가 종종 부러지거든요. 지금까지 수많은 배트가 부러지는 걸 봤는데 이상한 걸 본 적이 없어요. 저건 좀 악의적이네요.
나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내 배트를 가져간 주심. 어처구니없어하는 나를 앞에 두고 포수와 같이 내 배트를 감상한다.
포수 놈과 주심이 한참 동안 내 배트에 관한 감상을 늘어놓는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긴 걸 쓰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특별할 건 없는 배트를 쓰는데 왜 이러는 거야
주심과 포수가 협의가 안 되니 포수가 내 배트를 가져가더니 여기저기 만져본다. 그러더니….
- 주심이 김소전선수에게도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무슨 일이죠? 김소전선수 화가 난 것 같은데요?
“타자. 배트에 파인 타르를 너무 많이 발랐어.”
“뭐? 뭐라고요?”
이놈들이 정신계 스킬을 쓰나?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주심이 갑자기 왜 미친 거지?
“심판님. 설명 좀 해주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여기. 여기 윗부분까지 타르가 묻어있잖아. 배트의 타르는 이렇게 위에까지 묻히면 안 된다고.”
어이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장비 관리에 지적을 받다니. 내가 야구를 못 한다고 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어도 장비 관리를 못한다는 거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가는 소리다.
“타르가 어디에 묻었다는 겁니까? 여기 만져보세요. 손잡이에만 강하게 묻혔을 뿐이라고요”
“그 부분하고 이 위쪽. 번트 시 쥐는 곳에도 묻었잖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나요?
“어디요? 저는 거기 타르 스틱을 쓴 적이 없는데요?”
“여기가 끈적거리잖아”
미치겠다. 내가 바르지도 않은 타르가 거기 왜 묻어있…. 잠깐…. 너 이XX
주심의 헛소리에 어이가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데 포수 놈이 주심에게 날 퇴장시키라면 깐족댄다. 그 깐족대는 표정이 영락없는 경준이가 내 치킨에서 날개 훔쳐먹고 안 먹은 척 오리발 내미는 표정이다.
“이거 내가 그런 게 아니라 포수가 아까 배트 잡으면서 묻힌 거예요.”
“뭐야! 너 말조심해!”
주심을 앞에 두고 포수와 마주 섰다. 키는 비슷한데 옆으로 나보다 세배는 큰 덩어리.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지만…. 억지로 최대한 쫙 펴본다.
“투수가 아니면 포수가 사기꾼이지.”
“원숭이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뭐? 이XX가. 죽으려고. 확 패버릴…. 수는 없겠고…. 주심한테 일러야지.
“인종차별 해도 돼요? 이거 나 제소할 거예요.”
“자. 다들 진정해”
- 상황이 길어집니다. 캐나다 감독이 나오고 있어요.
- 너무 길어지는 거 좋지 않아요.
- 아. 기인환 감독도 나옵니다.
- 기인환 감독까지 올라올 필요는 없는데요.
저쪽에서 그리즐리 같은 곰이 느릿느릿 나오자 우리 쪽에서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아줌마 팬들을 끌고 다니는 로맨스 영화 주인공이 나온다.
선수들을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리는 감독들끼리의 아가리 파이트. 난 말싸움은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로 싸우는 게 최고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어로 쌈박질 하는 것도 이렇게 쫀득쫀득하고 재미있는 줄 처음 알았다.
감독님한테 개기지 말아야지. 한국말 할 때는 안 그러시더니 영어로 저런 잔인무도한 패드립을…. 잠깐…. 나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 경기 정리됩니다. 김소전선수 배트를 바꿔 나옵니다.
- 처음엔 투수의 부정투구가 문제 아니었나요? 이거 왜 김소전 선수가 배트를 바꿔 나오죠? 이러면 안 돼요.
“소전아. 타르 안 쓰고 칠 수 있냐?”
“칠 수야…. 있지만…. 제가 왜….”
“오늘은 타르 안 쓴 거로 쳐라. 가서 바꿔와”
주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감독님이 내 배트를 바꿔오라고 시킨다. 억울하지만…. 어쩌겠어. 우리 팀 감독이 졌는데…. 이런….
대기타석으로 가서 멍때리고 있는 경준이의 테이핑이 잘 되어있는 배트를 뺏어 들고나왔다. 갑자기 배트를 강탈당한 경준이가 뒤통수에 대가 뭐라고 하는 것 같지만…. 우선 경기를 해야 하니…. 씹어주고 타석에 들어간다.
그때까지 주심하고 파이트를 하던 감독님이 타석에 들어오는 나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무조건 쳐라. 그래놓고 죽여버리자.”
어이가 없어서 감독님을 바라보지만, 그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상대하고 싸우다 지고는 나한테만 이래….
속에서 불만이 하늘을 찌르지만, 경기중에 뭘 더 할 수도 없고, 조용히 타석에 들어간다.
- 볼카운튼 2-2에서 다시 경기 속개됩니다.
- 경기 시작부터 정신이 없네요.
나는 약 올라 죽을 것 같은데 비릿한 눈으로 나를 보는 투수 놈. 아무리 생각해도 공에 타르를 묻힌 게 확실한데 주심이 올라가서 벨트까지 검사하고 못 잡아낸다니…. KBO 심판님이 동태라고 놀린 거 반성한다. 그냥 심판 XX들은 봉사였어….
- 5구. 볼. 원바운드로 들어오는 볼이었습니다.
- 양팀 감독들까지 나오면서 투수가 쉬는 시간이 좀 길었죠. 공에 힘이 들어갔어요.
저딴 공을 던져놓고 투수의 표정이 편안하다. 이거…. 제구가 안 된 것 같지 않은데.
원바운드 된공을 유니폼에 쓱쓱 닦고는 투수에게 되돌려주는 포수. 잠깐…. 그럼 안되지
“심판님. 공 바꿔주세요. ”
타석에서 나오면서 주심에게 공을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심판이 나에게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 우리 팀 덕아웃에서 감독님이 또다시 나오려는 모습을 보이자 투수에게 공을 바꿀 것을 지시한다.
불만 가득한 표정의 투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공을 주심에게 던진다.
공을 받은 주심이 공을 버리려고 하기 직전. 내가 타임을 부르고 동시에 우리 팀 감독님이 뛰어나온다.
“그거 잘 만져보세요. 지금도 끈적거릴 것 같은데요”
“그러네! ”
다시 중지된 경기. 관중들은 이게 얼마나 꿀잼일까? 야구 보러 왔다가 말싸움경기도 보고…. 인터넷에서 이런장면 나오면 욕하고 그러지만 진짜 마음은 안 그럴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건 입장료 두 배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 주심 다시 마운드로 오릅니다.
- 지금도 이물질이 묻었다는 것 같거든요. 퇴장시켜야죠.
아 이 갑갑한 심판 놈아. 감독이 얘기하는 거 못 들었어? 투수가 아니라 포수 놈이 타르 쓴다고 얘기했잖아. 감독님이 너무 동부 발음이라 못 알아들은 거야? 스패니쉬로 해야 알아듣겠어?
- 주심 다시 투수를 조사합니다만 특이점을 찾지 못하고 그냥 내려옵니다.
- 허허. 증거는 있는데 한사람이 없네요. 이런…. 허허
“원숭이들 그만하지. 쓸데없이 신경전 하지 말고 야구를 잘해. 아. 야구 하는 법을 못 배워서 그런가?”
이 XXX가….
어이가 없어 내가 먼저 포수에게 뭐라고 하려고 하는데 감독님이 먼저 포수에게 다가가 귀에다 대고 몇 마디를 던진다.
무슨 말을 했는지 포수 놈의 눈이 시뻘게 지면서 몸을 부르르 떤다.
포수 멘탈이 나간 사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주심. 감독에게 자기가 공 잘 확인하겠다는 공수표를 날리고는 경기를 속행시킨다.
더 시간 끌어봐야 뭘 할 수도 없는 감독이 주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덕아웃으로 들어간다.
쳇…. 뭐야.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 다시 속개되는 경기. 3-2 풀카운트. 타석에는 김소전입니다.
- 투수가 확실히 이물질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잡아내지 못하고 있거든요. 김소전 선수가 이걸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자신감이 꺾이거나 그러면 안될 텐데요.
주심이 방금전의 공은 버리고 새 공을 직접 투수에게 던져주고는 플레이볼을 외친다.
진흙을 발랐음에도 미끄러운 새 공을 받아든 투수가 뭐가 불만스러운지 연신 공을 손으로 닦아내며 공을 들인다. 그러다 건조한지 마운드에서 내려와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는 유니폼에 슬쩍 닦고? 닦는 척? 하여간 유니폼에 슬쩍 손을 댔다가 다시 공을 잡고 마운드를 올라온다.
추잡한 놈. 적당히 해라.
- 김소전! 잡아당긴 타구! 좌측! 좌측! 좌측담장! 담장을 넘어갑니다. 1회 말 선두타자 홈런을 기록하는 김소전. 대한민국이 본선 2라운드에 와서도 화끈한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실력이에요. 실력이 다르거든요. 캐나다의 로버트 선수 잡기술로 버텨보려고 했는데 안 되네요. 김소전 정말 좋은 선수예요.
공에 침 바르는 더러운 짓. 이미 경준이랑 연습할 때 다 겪어본 거다. 밤에 경준이랑 둘이 야구하다보면 저 악랄한 악마가 공에 침도 바르고 바셀린도 바르고 치킨 기름도 발라서 던진다.
시험을 보는데 기출문제에서 나왔으면 뭐…. 맞춰야지.
마운드에 사기꾼을 세워놓고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와서는 아빠한테 네모를 그리고 홈플레이트 뒤에서 기다리는 경준이와 하이 파이브를 나눈다.
“형. 공 어때요?”
“어? 침 발라서 던져.”
“이런…. 그런 더러운 짓을…. 형보다 더해요?”
“아니 나만큼은 안 되지.”
“그럼 쉽네요. OK”
경준이와의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고 덕아웃에 들어와서는 감독님과 하이 파이브를 나눈다.
“감독님 아까 포수에게 무슨 말씀하신 거예요? 포수 숨소리가 거칠어지던데요?”
“아. 까불길래 부모님과 조부모님 안부 좀 물어봤다. 생긴 건 곰처럼 생긴 게 멘탈은 벼룩만도 못하네. 저런 멘탈로 게임하면 평생 브론즈에서 벗어날지 모르겠다.”
아…. 부모님 안부를 물었구나…. 부모님 많이 사랑하는 선수였구나. 살살 다뤄줄 걸 그랬네….
- 2:8 대한민국이 캐나다를 꺾으며 본선 2라운드 성공적인 첫 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 캐나다가 우승권 전력은 아니라고 하지만 메이저리그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거든요. 그런데도 우리 선수들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우리 선수들 칭찬해주고 싶네요.
- 경기 내내 캐나다 선수들의 부정투구 시비가 있었음에도 완승을 거둔 대한민국입니다.
- 마지막에 포수의 스파이크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었죠. 캐나다는 여러모로 패배한 경기예요. 반칙을 했음에도 우리 선수들에게 완패를 당했어요. 반면 우리 선수들은 반칙을 하는 팀을 이기면서 자신감이 더 생겼을 거예요.
치사한 짓을 하는 캐나다를 깨고 나니 선수들의 자신감이 뿜뿜한다. 그 자신감을 가져다 다음 상대 팀인 쿠바와 일본에 퍼붓는다.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상대 팀들. 속절없이 무너진다.
- 게임 끝. 도쿄돔에서 대한민국이 또다시 일본을 무너트립니다.
- 오늘 임수검 선수의 투구가 빛이 났어요. 일본의 타선을 완전히 잠재웠어요. 선발이 이렇게 던져주면 상대 팀을 할 게 없죠.
이시윤과 임수검의 공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야구란 게임 참 불공평하다. 내가 저공을 상대 안 하는 것만으로도 난 어드벤티지를 가지고 경기를 하는 거다. 저공 절대 상대하고 싶지 않다.
- 2차 라운드까지 마친 대한민국 이제 다시 한번 세계의 정상에 서기 위해 미국으로 향합니다.
- 2차 라운드 1, 2위 팀들끼리 LA에서 준결승전과 결승전을 치르게 되죠.
- 그렇습니다. 우리는 B조의 2등 도미니카와 준결승을 치르고 A조 2등 일본은 미국과 준결승을 치르고 승리 팀끼리 결승에서 만나게 됩니다.
- 도미니카의 전력도 상당하거든요. 우리 선수들 준결승전 준비 잘해야겠습니다.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됐다고 미국을 또 가야 하네…. 그래도 이번엔 루다가 안 따라가니까…. 휴…. 좀 편하게 잘 수 있겠지?
흠…. 일본에서 혼자 자다 보니…. 잘 때 손이 좀…. 허전하긴 한데…. 곰 인형이라도 사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