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해결사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국룰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절이 떠난 중을 쫓아오면? 그건…. 교과서에 없는 신유형이다….
“왜 왔어!”
“뭐야. 사랑스러운 마누라를 보자마자 왜 왔어? 요즘 안 맞으니까 사랑이 식었구나. 여기 좋은 배트도 많은데 오늘 좀 맞자.”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면 방학을 가지듯 한 시즌 동안 마누라한테 시달렸으면 최소한 스프링캠프 기간은 보장을 해줘야지…. 내가 맘 편하게 있는 꼴을 못 보고 여기까지 쫓아왔다.
“나 없는 데서 바람이라도 피나 감시하려는 것도 있지만 그건 이따 확인할 거고 여기 막내 둘. 그 선수들 인터뷰하러 왔는데. 어딨어. 당장 데려와.”
어렵다. 나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내 앞의 양아치를 가족으로 봐야 하는 건지 기레기로 봐야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선다.
“걔들 이미 멘탈이 무너졌어. 당분간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까 애들은 괴롭히지 마라.”
“그래서 내가 일정을 길게 짜왔다. 오늘 못 보면 내일 봐도 되고 내일 못 보면 모레 봐도 되지. 정 안 되면 한국 돌아가는 비행기 같이 타고 가도 되고.”
야…. 야…. 진짜 진짜 한국 돌아갈 때까지 있으려고? 그건…. 좀….
“선수들 훈련하는데 너 돌아다니면 집중 못 해.”
“그건 좀…. 그렇지…. 내가 좀 매력이 있어야지.”
누가…. 누가 널 그렇게 생각한다고.
“유부녀한테 무슨 매력이야?”
“모르는구나. 남의 여자가 되니까 더 매력적인 거야. 긴장해~.”
뭐? 이게 무슨 X 소리야. 긴장은 무슨…. 잠깐…. 저 저놈 왜 루다를 보는 눈빛이 저렇지? 어 저 선배는 언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거야…. 이거…. 여기 이상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그건 그렇고 넌 왜 옷을 이렇게 입고 다녀! 치마도 왜 이렇게 짧고!”
“헤~ 더워서~ 단추 하나 더 풀까? 내일은 고민한 뒤에 더 짧은 거 입고 와야겠다~ 헤~.”
말을 아무리 해봐야 안될 거고 저 짐승들이 쳐다보는 걸 막으려면 얘한테 딱 붙어 다녀야겠다…. 방송국 바쁘다더니 다 사기였어.
야구판 최고의 인싸답게 스프링캠프장을 누비고 다니기 시작하는 루다. 덥다고 자꾸 단추를 풀려는 루다를 제지하기 위해 딱 달라붙어 같이 움직인다.
“우혁 오빠~ 승혜 언니 안 보고 싶어요?”
“루다 언제 왔어? 승혜가 루다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믿지 말라고 이미 얘기했다.”
“진짜요? 승혜 언니 요즘 저랑 클럽 다니는 거 얘기 안 해요?”
“루다야. 안 통한다. 너 요즘 배구선수들하고 노느라 자기랑 안 놀아준다고 뾰로통한데 그런 말을 해.”
“쳇. 그건 승혜 언니가 다른 남자 안 만나려고 하니까 그렇죠. 스포츠 아나운서면 저처럼 이 남자 저 남자 다 친하게 지내야 승진하는데.”
자…. 잠깐…. 이 남자 저 남자? 너 방송국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정안이 오빠~ 나 안 보고 싶었어~.”
“루다야~ 난 항상 루다가 보고 싶지~.”
“그런데 왜 전화 안 해~ 나 막 화나려고 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편이 우리 팀 주장인데 전처럼 막 이 얘기 저 얘기 할 수 있냐?”
“와~ 이 오빠 보소. 나에 대한 사랑이 식었네. 오빠~ 내가 얘한테 안 걸리게 할 테니까 비밀방으로 얘기해~.”
“흐흐. 하여간 루다는 못 말린다니까.”
넌…. 내가 옆에 있는데도 그런 말이 술술 나오냐? 너 잘 때 핸드폰 패턴 풀고 만다.
“더운데 왜 자꾸 달라붙어?”
“다…. 달라붙긴…. 너 여기 잘 모를까 봐 알려주려고 다니는 거지.”
“나 몇 번 와봐서 여기 잘 아는데?”
“여기 엄청 커 구석구석 다니다 너 길 잃어.”
“구석구석? 구석구석 가서 뭐 하려고? 이렇게 딱 달라붙어서?”
너…. 왜 그렇게 쳐다보냐…. 왜…. 왜 이래….
“나 보니까 막 떨리고 그래? 머리가 하얘지고? 밤까지 못 기다리고 막 그래?”
무….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
“난 구석까지 안 가도 됐는데? 잠깐 둘만의 시간을 가져볼까?”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갑자기 내 손을 잡는 루다. 난 너무 무서워 그 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주장 어디 가세요.”
“어…. 어… 루다… 이루다다….”
너…. 너희들 고맙다.
“어? 송한규 선수하고 공인진 선수? 안녕~ 루다야~.”
“아…. 안녕하세요.”
“여신님. 화보보다 실물이 훨씬 더 예쁘세요.”
“당연하지. 카메라는 내 미모를 담을 수 없어.”
“와…. 개 멋있어.”
이게 무슨 처음 본 사람들과의 대화인가. 도대체 사람들은 루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 누나가 말 편하게 해도 되지?”
“그럼요. 여신님과 말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누나. 저는 누나 한번 보고 싶어서 야구 죽어라 했어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너…. 꿈이 참 소박했구나.
“그래? 랩터스에 이런 인재가 들어오다니. 앞으로 랩터스 잘되겠네.”
“누나만 볼 수 있으면 열심히 할게요.”
“그렇지.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지. 누나는 팬 가린다. 누나는 잘생기거나 야구를 잘해야 예뻐해.”
아…. 그래서 나랑 결혼한 거구나…. 잘생겨서….
“누나~ 저는 잘생겨서 야구 좀 못해도 되겠네요.”
“어? 넌…. 김소정만큼 야구 해야 할 거 같은데?”
“누…. 누나… 흐흑….”
갑자기 어디론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한규…. 너. 왜 우냐….
“누나. 한규한테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뭐가?”
“아무리 그래도 김소전만큼이라니요. 그건 너무 하잖아요.”
“야구를 하기로 했으면 그 정도는 야구 해야지.”
“그게 아니고요. 얼굴이 김소전급아리는 거잖아요. 그건 너무 반인륜적인 발언 아닌가요?”
뭐. 뭐라는 거야. 내가 앞에 있는데 그런 식으로 얘기해도 되냐?
“이것들이 진짜. 아무리 그래도 내가 데리고 사는 남편인데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못생겼다고 까도 내가까는 거지 어린놈의 자슥들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오…. 박력. 카리스마. 갑자기 좀 든든해지는데.
“너네 따라와. 나랑 면담좀 해야겠다. 따라와.”
너희들… 이제 죽었다.
버르장머리 없이 팀의 주장을 놀리던 신인 두 명을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루다. 이런 구경을 놓칠 수 없는 내가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방을 하나 찾아 자리를 만들었다.
“넌 좀 나가 있어?”
“어?”
“나가 있으라고.”
“나…. 주장인데.”
“당사자가 앞에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못하잖아. 나가 있어.”
“어….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고…. 신인이잖아. 잘 몰라서 그랬을 거야”
“나가! 내가 오늘 이놈들 정신상태를 뜯어 고쳐줄 테니까.”
슬며시 문을 닫고 나왔다. 가만히 있어도 올라가는 입꼬리. 사람들이 이런 든든한 맛 때문에 결혼하나 보다. 우리 마누라. 멋있네.
복도에서 선생님께 탈탈 털리는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방안에서 큰소리가 났다 웃는 소리가 났다 우는 소리가 난다.
그러다 또 큰소리가 나고 서로 웃다가 울다가 나만 빼고 뭘 하는지 자기들끼리만 신났다.
머리를 빼꼼 들어 방안을 들여다보니 한 놈은 소매로 눈물을 찍고 있고 한 놈은 루다랑 웃느라 정신이 없다.
역시…. 학교 다닐 때도 진짜 좋은 선생님을 혼내고 풀어주고를 잘하셨지. 루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했어야 하나…. 아니지. 그랬으면…. 어휴…. 애들의 미래가 답이 없지.
“너 여태 뭐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안을 궁금해 하며 복도에 쪼그려 있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한규야. 누나 스프링캠프 끝날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니까 자주 보자. 애가 속이 다 썩었네.”
“아니에요. 누나한테 다 털어놓으니까 좀 살 것 같아요.”
“너 이래 놓고 나보다 우주 친구가 더 예쁘다고 하고 돌아다니면 죽는다.”
“누나! 세상에서 누나가 제일 예뻐요.”
“아이고 예뻐. 내새끼.”
미쳤나…. 너희들 저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뭐해? 가자.”
“어딜?”
“나 피곤해 방으로 가게.”
“어느 방?”
“어느 방?”
난 진짜 몰라서 묻는 데 나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루다. 에효…. 운영팀 가서 루다숙소 어디냐고 물어봐야 하나….
“우리 숙소 1인 1실인데….”
“그게 뭐?”
“아니 좁아서.”
“감독님이 방 바꿔주신다는데 바꿔와?”
“야! 그게 말이 돼?”
“왜? 너 감독님이랑 안 친해? 난 친한데. 내가 가서 바꿔 달라고 할까?”
“아니다. 왜 그러냐.”
도대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개념을 안드로로 보내버린 루다를 데리고 내 숙소에서 함께 지내게 됐다.
왜 외부인을 선수단 숙소에 머물게 하는지, 그리고 같이 데려온 SBC 스텝들은 외부에 좋은 숙소를 따로 잡았는데…. 얘만…. 왜 얘만…. 결혼했다는 이유로 한방을 배정해주는지….
랩터스 운영지침에 가족은 구단의 허락이 있으면 훈련장에 머물 수 있다는 한 줄을 어디서 찾아서 적용했다고 하는데…. 이건…. 좀.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적용하는 거야….
“너 거기서 자게?”
“침대가 1인용이잖아.”
“이거 슈퍼싱글은 되는 거 같은데? 내가 아담하니까 같이 누워도 되지 않을까?”
키가 170은 되는 애가 아담이라니…. 그리고 너 잠버릇 험해서 너랑 같이 거기 누우면 자다가 나 낙상한다.
“오늘 비행기 타고 오느라 힘들었잖아. 편히 자”
“진짜 안 와? 그럼 내가 내려가?”
왜 내려와? 무섭게….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럼 빨리 올라와. 나 화내기 전에.”
루다랑 한방을 쓰라고 할 때부터 슬픈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 그런 건 틀린 적이 없어….
* * *
“최강훈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 XX는 자기가 직접 어린애들한테 주사기를 꽂았으니까 나랏밥 먹겠죠.”
비시즌에 할 일이 더 많은 랩터스 단장이 구단주에게 최근의 상황에 대해 보고를 한다.
“직접은 안 했다며. 최강훈이 그렇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증언 확보했어요. CCTV 기록 복원이 문젠데 검찰이 잘하겠죠.”
“검찰이 무슨 그런 기술이 있다고. 지검장님 좀 만나봐야겠네.”
츤데레 구단주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이렇게라도 해주자 단장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건 그렇고 우리 팀 그 둘은 진짜 안 한 거 맞아?”
“우선 증거가 없어요. 그리고 최강훈도 얘들은 피지컬이 문제가 아니고 스킬이 문제니까 관리 안 한 것 같아요. 사실 고등학교 성적 보면 이 선수들을 뽑을 이유가 없죠.”
“없긴 왜 없어. 야구 피지컬로 하는 거야. 언더사이즈 선수는 결국 한계가 있다고.”
“워호스 최창현, 폭스 이인성, 울브스 김준희, 우리 팀 루카스도 외국인치고는 언더사이즈고….”
“예외! 예외는 있는 거고! 야구는 씨름부가 잘하는 거라고!”
구단주의 독특한 야구관에 몸서리를 치던 단장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계속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점점 조용해 질 거에요.”
“그렇겠지. 당장 WBC가 눈앞이니까.”
“그렇죠. 여기서 더 불붙이면 야구판 다 죽으니까요.”
둘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동의의 표시를 한다.
“그럼 우리 선수들은?”
“기자들 입단속 확실히 시켰어요. 처음 기사 이후로는 우리 선수들 이름 안 나오고 있어요.”
“처음 기사에 거기서 과외받은 신인선수들 이름나왔었는데 어떻게 뺀 거야?”
“우리 선수들은 증거가 없으니까요. KADA 결과도 깨끗하고. 그래서 우리 선수들 이름나오면 허위사실유포로 무조건 소송하고 광고 빼버린다고 얘기하니까 말 알아듣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A 구단 B, C 선수로 나오는구나….”
“C 구단, D 구단도 있으니 그 정도는 봐줘야죠.”
단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구단주가 내심 불안함을 표현한다.
“그 정도로 될까? 그래도 팬들이 계속 우리 선수들 의심할 텐데.”
“그래서 SBC랑 우리 스프링캠프 다큐찍고 있잖아요. 이루다가 이번에 엮인 선수들 만나면서 그 부분 잘 포장해서 내보낼 거예요.”
단장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든 구단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조 단장 잘했어. 올해도 고생하자고.”
“고생은 무슨. 랩터스만 우승하면 됐죠.”
언제나처럼 검은 옷을 입고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업무보고를 받은 구단주가 회의를 마치기 전에 생각났다는 듯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한다.
“아. 스프링캠프에서 들어온 민원이 있는데….”
“민원이요? 우리 캠프 잘 돌아가고 있는데요. 무슨 민원이에요?”
“그게… 김소전이….”
“주장이? 주장이 민원 넣었어요?”
“아니. 소전이가 민원 넣은 게 아니고”
“그럼 김소전이 문제인 거예요? 주장이 인터뷰만 안 하면 캠프에서 뭐 사고치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민원이 있다고 하면서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구단주.
그게 답답한 단장이 재촉하기 시작한다.
“뭔데요? 말을 해줘야 해결을 하지요”
“저… 김소전 옆방에서 들어온 민원인데…. 밤에…. 옆방 소음이 너무 크다고…. 잠을 잘 못 자겠다네…. 신혼이라 이해는 하는데…. 좀 심한 거 아니냐고…. 직접 말하기가…. 그렇다네…. 밤새 TV를 너무 크게 틀어놓고 지나 봐….”
그 말을 듣고 있던 랩터스 단장이 커피잔을 잡고 부르르 떨면서 소리를 친다.
“이것들이 신성한 야구장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조용한 카페에 울려 퍼진 사자후. 카페안 손님들의 시선이 구석 자리로 쏠리고, 카페 사장님은 평온한 표정으로 정수기에서 물 한잔 받아 알 수 없는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