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결심
멕시코의 칸쿤. 날씨와 뷰가 열일을 하는 동네.
도시가 열 일을 하는 만큼 나도…. 열 일을 한다….
“우리 신랑~ 잘하고 있었어?”
“야! 넌 옷차림이 그게 뭐야! 결혼한 유부녀가 그렇게 입고 다녀도 되냐!”
“헤헤~ 예쁘지? 안 그래도 독일 애들이 계속 쳐다보더라고. 내가 가서 꼬셔올까?”
꼬셔오긴 뭘 꼬셔…. 욕하기도 아깝다.
“밥 먹자. 여기 밥은 맛있더라.”
“먹어야지. 아침부터 배 탔더니 힘들다. 여기 밥 맛있지? 내가 신혼여행 장소는 기가 막히게 잡지 않았냐?”
밥은 맛있다만…. 나한테는 굳이 여기를 와야 하나 싶다….
“오후에는 타격훈련지?”
“어. 다른 사람들은 몸 만들 때는 배트 놓기도 하지만 난 계속 움직여줘야 컨디션이 더 좋더라고. 그래서.”
“그렇지, 좋은 자세야. 본인에게 맞는 훈련법. 잘하고 있어. 내 신랑.”
음…. 칭찬이다…. 결혼하고 나서 칭찬이 많아졌어…. 무섭게….
“아 배부르다~ 난 소화시키러 다이빙 좀 하고 올 테니까 운동 잘하고 있어~ 빠~.”
또…. 또 어딜 가냐….
일정이 이럴 거면 그냥 라타코치님 보러 가도 되는데…. 차라리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여긴…. 너무 힘들다….
“밥 먹자~ 신랑아~.”
“벌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런데…. 넌 옷은 안 입고 다니냐?”
“왜? 이게 얼마나 예쁜 옷인데? 아…. 내가 너무 예뻐서 옷은 안 보이지?”
몸에 걸친 거 다 합쳐도 한 뼘이 안 될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저래서야 시집이나 가려는지…. 아…. 시집갔지…. 하…. 내 인생이 뭐 이러냐….
“점심에 너무 놀아서 그런가? 밥 맛있다. 그치?”
“그러게 여기 밥은 맛있다.”
나도 오늘 공이 좀 맞아 나가서 신나게 쳤더니 밥이 맛있다.
“오늘은 저녁에 상체 하는 날이지? 난 클럽 가서 소화 좀 시키고 올 테니까 열심히 하고 이따 봐~.”
“또 어디가?”
“너 훈련하는데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잔소리해야 하니까 안보려고 하는 거지. 조강지처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봐 주는구나!”
모르긴…. 유부녀가…. 매일 밤 술집을 전전하는 걸 보는 남편의 마음을 넌 아냐….
“훈련 잘하고 깨끗이 씻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이따 봐~.”
“언제 올 건데? 안 오면 나 먼저 잔다.”
“자기만 해! 죽을라고…. 아니다. 내가 알아서 깨우면 돼지 뭐. 어쨌든 나 간다. 점심때 본 독일 애들이랑 놀아줘야 해서 바쁘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바쁘다. 에효.”
어지럽다. 멀쩡한 신랑을 두고…. 독일 애들은 또 뭐야…. 쫓아가서 요절을 내야 하나 생각을 하다가도 그랬다간 지금부터 루다랑 놀아줘야 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하다.
차라리 그냥 혼자 놀아라. 나는 운동이나 하련다.
“뭐. 뭐야…. 야! 뭐해?”
“헤헤. 가만있어봐. 술을 먹다 말아서 기분이 좋다 말았으니까.”
“야! 저리 가. 술 먹고 와서 뭐 하는 거야!”
“어허. 가만있어. 부부가 한 이불 덮고 자는 게 뭐가 어때서. 얌전히 있어.”
얌전히는 무슨.
“저리 가 가라고! 씻기라고 하고 와! 술 냄새 나는것 좀 봐! 씻고 오라고! 가!”
“불타는 신혼에 그런 게 어딨어. 가만히 좀 있어 보라고.”
“야! 뭐 하는 거야. 이런 거 불법이야! 내가 고소할 거야.”
“고소는 알아서 하시고요. 난 지금 내 장난감이 꿈틀거려서 바쁘거든? 헤헤. 얌전히. 가만있어.”
“아! 야! 살살하라고! 아파! 이런 거 불법이야!”
“한국법은 한국 가서 따지시고 여기는 멕시코거든요? 가만히 좀 있어 봐. 자꾸 힘쓰게 만들고 있어.”
아 진짜. 씻지도 않고. 끈적거리게. 얘를 어떻게 데리고 살지…. 눈물이 나려고 한다.
“헤헤. 얌전히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자~ 이제부터 누나가 선물을 줄게~ 헤헤.”
웃음이 나오냐? 내일 눈뜨면 멕시코법 공부한다. 강제로 이러는 건 전 세계 공통으로 범죄라고! 우선 오늘 밤은 잘 보내보고…. 이 눈치도 없는 몸뚱이는 왜 머리에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막 움직이는 거야….
“서방님~ 일어나세요.”
“으…. 응….”
끈적거리는 연체동물에게 밤새 시달리고 눈붙인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아침이다.
“밥 먹자.”
“와…. 난 삭신이 쑤시는데 넌 괜찮냐?”
“쯧쯧. 운동선수라는 게 이렇게 부실해서야. 조식 말고 다른 거 먹을까? 아침부터 하는 식당은 별로 없을 테고…. 룸서비스 불러 먹을까?”
아니 아침을 공짜로 주는데 왜 나가서 먹어? 경제 관념이 저래서야….
“아니 내려가서 먹어야지. 여기 조식 괜찮은데.”
“아이. 아깝네.”
“뭐가?”
“룸서비스 시키고 아침 일정 하나 더 하려고 했는데.”
“아침 일정? 오늘은 아침부터 낚시하러 간다며?”
“그러니까 오늘은 점심때도 우리 신랑 못 보니까 가기 전에 밥 올 때까지라도 잠깐 놀까~ 그랬지.”
야…. 너 눈빛이 왜 그래…. 왜 날 사냥감 보듯 보는 거야….
“밤새 괴롭히고도 모자라냐?”
“모자라지. 내 생각보다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자질은 괜찮아 보여. 내가 열심히 키워줄게. 잘 배우자.”
그…. 그런 더러운 눈빛 치워줄래? 생각만 해도 무섭거든요.
“내…. 내려가자. 밥 먹어야지. 배고프다.”
“헤헤. 난 다른 거 먹어도 괜찮은데~.”
“다…. 다른 거…. 방안에 과자부스러기 먹어봐야 헛배 부르고 소용없어. 따라와.”
이 방에서 더 있어 봐야 험한 꼴 당할 거 같아 무조건 끌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 우리 신랑~ 박력 있게 팔짱도 팍~ 멋있어~ 오늘 밤에는 무슨 선물을 줘야 하나~.”
“됐다. 배고프다 빨리 가자.”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배고프다…. 밤새도록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고…. 밥 먹어서 연료를 채워야 운동을 하지….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바로 낚시하러 가니까 오늘도 시간 잘 보내~ 쪽~.”
우이씨.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뭐 하는 짓이야….
“이는 닦고 가야지. 옷도 그렇게 입고 간다고? 잠옷 입고 어딜 가?”
“헤헤~ 잠옷 아니거든? 외출복이거든. 그리고 안에는 수영복이지롱~ 신랑~ 잘하고 있어~ 밤에 봐~.”
밤에 뭐…. 뭘 봐…. 무섭게….
“따라갈까?”
“어딜?”
“LA”
“거길 왜?”
“신혼이니까?”
왜…. 왜…. 난 드디어 해방인데….
“괘…. 괜찮아. 나 혼자 잘할 수 있어.”
“너 어제는 코피도 흘렸잖아. 내가 가서 봐줘야 하나 싶어서 그렇지.”
글쎄다…. 너만 없으면…. 나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야. 멕시코가 건조해서 그래…. LA 가면 괜찮을 거야.”
“칸쿤이 바닷간데?”
“아. 우리 방. 우리 방이 건조해서 그랬나 봐. LA 숙소는 몇 년 써보니까 웃풍도 있고 안 건조해 좋아.”
“후…. 그래…. 같이 가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나한테 왜 그러니…. 나 그냥 라타 코치님하고 야구만 하고 싶다. 너랑 있으면 밤마다 너랑 몸으로 놀아줘야 하잖아. 살면서 이렇게 체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진짜….
“그래! 내가 벌여놓은 일이 많으니까 그것만 정리하고 사표 내고 다시 올게. 훈련 잘하고 있어. 누나 금방 올게.”
잠깐. 내가 뭘 잘 못 들었나?
“아…. 아니야! 왜! 요즘 누가 결혼했다고 일을 그만두고 그래! 안돼! 우리 형편에 맞…. 맞벌이해야지. 그래. 둘이 벌어야지. 요즘 세상이 얼마나 살기 힘든데. 회사 그만두면 안 돼.”
절대 안 된다. 절대. 너 시즌 중에는 정신없이 바쁘잖아. 그래야 나한테 놀아달라는 얘기를 안 하지. 그만두는 건 절대 안 된다.
“내가 너 하나 못 먹여 살릴까 봐. 걱정 마. 누나가 회사를 그만둬도 네 입에 하루 세끼는 꼬박꼬박 넣어줄 테니까. 어쨌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닌 거 같은데…. 왜 진심이 느껴지냐….
“비행기 왔다. 어여 타러 가. 신랑~ 훈련 잘하고~ 내 생각나도 허벅지 꼬집으면서 참아~ 쪽~.”
이게 또. 사람들 많은 데서 이런 남사스러운 짓을….
“어. 나간다. 너 절대 회사 그만두면 안 돼. 난 일하는 여자 좋아해. ‘꼭’이야. 사표 내면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
“쳇. 알았다. 가라. 멋대가리 하나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밤에 말고는 쓸데가 없어.”
장기출장가는 남편에게 막말을 하는 부인을 두고 멕시코에서 LA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해방이다…. 이제…. 쉬자….
“소전! 이게 무슨 일이야!”
루다를 버리고 이제는 집처럼 편한 라타코치의 훈련장에 도착하자 라타코치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잘 지내셨죠? 올해 결혼하고 오느라고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도 신혼여행 하면서 훈련프로그램 앞부분은 다 수행했으니까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아니고…. 이래서야….”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라타코치…. 왜요?
“지난 시즌에 성적이 좋더니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사람 얼굴이 반쪽이 됐어…. 이래서야 훈련이 아니라 병원부터 가야 할 것 같아….”
지난 시즌 무리는 아니고…. 이번 겨울이 좀 힘들어서 그랬어요….
“괜찮습니다. 한 시즌 멀쩡히 잘 보냈는데요. 바로 훈련할까요?”
“이… 이봐…. 코피 나잖아. 안 되겠네. 우선 병원부터 가보자.”
아…. 진짜…. 칸쿤 다 좋은데 건조해. 호텔 방이 너무 건조해서 그래.
“시간이 짧으니까 아쉬워.”
“저도요. 몸을 만들어서 훈련에 들어왔어야 하는데 몸 만드는데 시간을 너무 써서…. 기술훈련도 얼마 못하고. 코치님께 면목이 없어요.”
“무슨 그런 말을 하나. 신혼인데 그럴 수 있지. 허허. 좋을 때야.”
좋기는요…. LA오면 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빳다를 돌려야 제맛인데…. 이번엔 체력보강만 절반을 넘게 했는데…. 이러려고 라타코치님 보러오는 게 아닌데…. 전 일분일초가 아쉬웠다고요….
“소전. 자네가 야구에 몰두하는 것도 좋은데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져봐. 야구가 세상 전부는 아니야. 자네를 사랑하는 아내 생겼으니 아내에게도 야구처럼 몰두하고 시간을 가져봐.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야.”
코…. 코치님…. 코치님은 아무래도 야구만 하셔야겠어요. 루다에게 몰두를 하라고요? 신혼여행 2주 만에 남편을 이 꼴로 만든 서큐버스에게 몰두하면 전…. 해골이 될 거예요….
라타코치님의 악담을 듣고 랩터스의 스프링캠프가 차려진 애리조나로 향했다.
결혼을 하면서 까먹은 시간이 많아 그런지 이번 시즌은 시작부터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다. 아…. 중간에 계획에 없던 체력훈련이 들어가서 더 바빴구나….
“형~ 몸이 좀…. 바뀐 것 같아요.”
“결혼을 해서 그런가…. 형…. 어딘지 좀 달라 보여요~.”
“몸은 더 탄탄해지고 얼굴 살은 쏙 빠진 게 사람이 더 강인해 보여요.”
“형…. 동네 바보형은 어디 가고…. 그냥 바보형이 돼서 나타났나요?”
스프링캠프에 도착해 선수들과 인사를 하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고 좋다.
“경준이 넌 왜 라타코치님한테 안 온 거야?”
“에이 형도 없는데 가봐야 코치님하고 싸우기나 하지요.”
“나 금방 갔잖아.”
“형 없이도 적응해야죠…. 이제…. 그래야 하잖아요….”
뭐냐…. 너. 왜 그래….
“내가 어디 가냐? 뭘 적응을 해.”
“형 내년에 미국 간다고 다 소문났는데 왜 그래요.”
“내가 미국 간다고? 내가? 언제?”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경준이.
“형 올해 끝나면 포스팅이잖아요. 그리고 WBC 우승하면 FA고. 이번 시즌 구단에서 저한테 주는 압박이 장난이 아니에요. 형 미국 안 가면 안 돼요?”
헐…. 미국…. 잠깐…. 나는 미국… 루다는 한국의 방송국 아나운서…. 그러면 우리는 기러기 생활을…. 이런…. 이건 무조건이다. 포스팅보다는 FA가 무조건 유리하겠지.
그깟 WBC. 세상이 무너져도 우승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