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안갯속
성적은 랩터스가 좋아지는데 기사는 최강훈의 아카데미 기사가 늘어난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놈은 야구가 아니라 사업을 했으면 대성했을 것 같다. 아…. 그래서 지금 사장님 됐지….
어쨌든 그놈이 쫙 차려입고 나온 기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 기분을 그대로 가지고 경기장에 나선다.
- 시즌이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랩터스와 가을야구를 향한 치열한 순위 다툼을 하는 드래곤스가 만났습니다. 양 팀의 승부 지금 시작됩니다.
- 랩터스는 큰 이변이 없는 한 1위를 지킬 거 같아요. 문제는 드래곤스죠. 5위 자리를 놓고 워호스와 한 게임 차거든요. 힘들지만 버텨내야 해요.
경기장에 나와 내 훈련하고 코치님하고 이야기하고, 전력분석팀이랑 이야기하고, 매니저 형한테 루카스가 어제 여자친구하고 싸웠다는 이야기 듣고, 출근한 선수들 훈련 봐주고, 단체훈련하고 다시 팀미팅하고, 루카스 연애 상담해주고, 박동수 선배가 허벅지 뒤 근육이 올라와 급하게 경기 출장이 불가능하다는 소리까지 듣고 타석에 들어가니 경기 시작도 않했는데 지쳤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최강훈 기사를 봐서 기분도 더러운데 몸에 기운도 없고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 원아웃. 2번 타자 김소전이 타석에 들어옵니다.
- 김소전이 2번에 들어가니까 확실히 랩터스의 생산성이 좋아졌죠. 김소전 선수도 출루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그런지 장타력이 더 살아났어요.
- 김소전 선수 이번 시즌 1번과 2번 타순으로 나오면서 벌써 홈런을 39개째 때려내고 있습니다.
- 페이스만 보면 50개는 훌쩍 넘을 페이스에요.
- 김소전 선수 기록을 보면 아시안게임을 다녀왔음에도 시즌 내내 기복 없이 꾸준한 모습입니다.
- 김소전 선수 칭찬할 것이야 많지만 그중 가장 대단한 점이 꾸준하다는 점이에요. 김민중 감독은 야구 참 쉽게 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피곤하다. 대충 비슷한 거 들어오면 치고 후딱 들어오고 싶다.
- 초구 볼. 조금 빠졌습니다.
- 아무래도 김소전에게 좋은 공 주기 힘들죠.
어지간하면 치겠다니까 저딴 공을 던지고 있어. 적당히 가운데 비슷하게만 던지라고
- 볼이 연속으로 들어옵니다.
- 드래곤스 배터리 신중하죠. 김소전 선수 타격 스타일을 보면 안타를 치면서 점점 더 타격감을 찾아가거든요. 그러다 보니 경기 초반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요.
이게 뭐냐. 이럴 거면 그냥 고의사구로 보내주던가. 진짜 화나려고 하네.
- 김소전 낮은 공을 퍼 올립니다. 쭉쭉 뻗어가는 타구~ 중견수 따라가기를 포기합니다.
- 이건 아니죠. 뺄 거면 확실히 뺐어야 해요.
- 1회, 선취점을 김소전의 솔로홈런으로 가져오는 랩터스. 오늘도 랩터스의 질주는 계속됩니다.
- 드래곤스 배터리의 선택이 아쉬워요. 쓰리볼에서 지금 던진 공도 볼이거든요. 지금 같은 어정쩡한 목적 없는 공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힘들어요.
- 반면에 김소전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시즌 40번째 홈런을 기록하는 김소전. 홈런 2위와의 격차를 더욱 벌립니다.
쓰리볼에서 낮게 깔려오는 공. 던지는 순간 볼이라는 직감이 들긴 했지만 힘없어 보이는 공에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
좀 피곤해서 그런지 힘이 살짝 덜 들어간 상태로 회전하는 배트. 낮게 들어오는 공을 힘 빼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맞는 순간 기분 좋은 느낌. 힘을 빼고 휘둘렀는데도 정타로 맞아서 그런지 타구가 아름답게 떠서 날아간다.
이거…. 좀…. 좋은데…. 힘도 덜 들고…. 앞으로 힘을 더 빼고 배트를 돌려볼까….
[김소전 40홈런. 홈런 1위 질주]
[김소전의 몰아치기. 홈런왕 정조준]
[찬바람과 함께 터지는 김소전의 홈런 본능]
쓸데없이 주장을 맡아서 늘어난 잡일 때문인지, 시즌이 계속되면서 피곤함이 가중된다. 점점 더 타석에서 흐느적거리게 되고 몸에 힘이 빠지는 만큼…. 스윙이 부드러워진다.
- 김소전의 타구! 우측! 우측담장을 넘깁니다! 역전 투런! 6회 기어이 역전에 성공하는 랩터스.
- 9월의 마지막 날 기어이 50개를 채우네요.
- 시즌 50호 홈런을 역전 투런으로 장식하는 김소전. 랩터스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 김소전 선수. 잠실을 쓰는 랩터스 선수란 말이에요. 잠실을 쓰는 선수가 홈런을 50개나 때린다.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대단합니다.
알 수가 없다. 시즌 끝을 보면서 내 몸은 만신창이에 숟가락 들 힘도 없는데 맞아 나가는 공이 자꾸 담장을 넘어간다. 역시 지금까지는 내가 훈련을 열심히 안 해서 이런 걸 몰랐나 보다. 나도 피곤해야 잘하는 스타일이었어…. 내년부터는 훈련량을 더 늘려보자…. 오늘은 좀. 일찍 자고…. 죽겠다.
- 랩터스가 1위를 거의 확정지은 가운데 랩터스 팬들의 관심은 팀의 성적보다 이 선수의 성적에 쏠려있습니다. 잠실에서 전인미답의 50홈런을 치고 있는 김소전. 남은 16경기에서 홈런을 몇 개나 더 뽑아낼 수 있을지 오늘부터 확인해 보겠습니다.
경기전 수많은 일정에 일정이 더 추가되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 홈런 개수야 경기에 계속 나오다 보면 늘어나는 건데 49개든 50개든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다고 나를 괴롭히는데…. 5분만 시간이 있어도 그냥 자고 싶은데….
“김소전 선수. 전문가들 사이에선 김소전선수의 몰아치기로 56홈런을 넘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소전 선수 자신 있습니까?”
“김소전 선수, 팀 순위보다 홈런에 신경을 더 써야 한다는 팬들의 바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9월 이후 홈런에만 신경을 쓰는 바람에 도루 개수가 줄고 있습니다. 다시 50도루에 도전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미친놈들이다. 내가 딱히 홈런을 노리고 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 56개지. 몸에 기운도 없는데 남은 경기에서 6개를 더치라니…. 내 맘대로 될 것 같으면 왜 100개를 치라고 그러지….
“팬들의 응원해 주시면 우주의 기운이 몰려와서 모든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응원 많이 해주세요.”
- 주자 1루. 타석에 이 선수가 등장합니다.
- 요즘 랩터스 팬들은 이 선수 보는 즐거움에 살아가죠.
- 타격 1위, 홈런 1위, 최다안타 1위, 타점 1위, 볼넷 1위,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 도루 2위의 김소전입니다.
타석에 들어서니 경기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평소보다 두 배는 크게 들려오는 내 응원가. 그저 144경기 중에 1경기일 뿐인데…. 오늘은 왜 유난이지? 몸도 피곤한데 귀까지 피곤해지니 더 빨리 치고 들어오고 싶네….
- 김소전의 배트 돌았습니다! 원바운드로 담장을 맞추는 김소전! 1루 주자 루카스 3루 돌아서 홈으로 타자주자는 2루까지! 타점을 하나 더 추가하는 김소전입니다.
- 김소전의 타격자세가 컨택에 유리한 자세는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저런 컨택을 보여준다는 건 경이롭네요.
아깝다. 너무 잘 맞았다. 살짝 밑을 때리면서 들어올려야 했는데 너무 정타로 맞았네….
[김소전 홈런 추가 실패. 아쉬운 2루타만 두 개]
[3경기 만에 홈런포 김소전! 남은 홈런은 5개!]
[홈런 없이 안타만 추가한 김소전. 2년 연속 200안타 정조준]
[김소전의 몰아치기! 홈런 포함 3안타 경기! 4할이 보인다.]
[4할, 200안타, 56홈런? 김소전은 욕심쟁이]
집과 운동장 밖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지하철에서 팬들 사인해주다 출근하는데 2시간 걸린 이후로 매니저 형이 집까지 와서 매일 출퇴근을 시켜준다.
경기장에 와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기레기님들이 개인 훈련 시간까지 따라다니면서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것도 모자라 구단 훈련장에 잠입하는 유튜버들. 구단 보안요원들이 보일 때마다 잡아서 끌고 나가지만 야구파크사이트에 마사지베드에서 침 흘리고 자는 사진까지 올라가는 걸 보고는 외부인 말고 내부에서도 첩자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
할 일도 많은데 라커에서도 편히 쉬기 힘들어진다.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사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저 추한 사진들이 올라가는 건…. 좀…. 그렇잖아.
“어디냐?”
“훈련장이지.”
“뭐하는데?”
“훈련하지, 뭐하긴.”
“야. 지금도 좀비 같은 게 무슨 훈련을 하고 있어. 나와.”
“너 오늘 잠실 왔냐?”
“누나가 너 때문에 현장 나오셨다. 입구 바로 앞에 차댈 테니까 바로 나와서 타.”
요즘 방송국 프로그램 절반은 책임지느라 스튜디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루다가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나오셨다. 바쁘고 힘들다고 징징대고 싶지만 루다의 스케쥴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냈다가는…. 귀에서 피날 수도 있다.
검은 옷에 검은 모자, 검은 신발로 신분을 위장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한다. 출구 밖으로 보안요원의 항의에도 아랑곳 앉고 길 막을 하는 내 차가 보인다. 발걸음을 더욱 빨리 놀리면서 차로 뛰어든다.
“김소전이다!”
“와~ 김소전이다~ 사인해주세요~.”
“우리 애 사인해주세요~.”
“어이~ 김소전이~ 와서 사진 좀 찍고 가~.”
검은 옷으로 꽁꽁 싸맸는데도 어떻게 알아보고 소리를 지르는 팬들.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고는 차로 뛰어들었다.
내가 타자마자 총알처럼 튀어 나가는 내차. 몇 번 타보지 못했지만 차 좋네. 이 좋은 차를 인터넷에선 왜 욕을 하는 거야….
“아이고, 김소전 선수 스타야 스타. 연애인 병에 걸리셨나. 그렇게 광고를 하면서 움직여야겠냐?”
뭐라는 거야.
“야. 내가 이렇게 신분을 위장하고 다니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보는 걸 어떡하냐? 다 내가 잘나서 그렇다.”
“그렇게 랩터스 블랙에디션으로 입었는데 신분 위장이야? 아니다 네 패션센스에 이상한 사복 입고 다니느니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내 패션센스가 어때서. 내가 학교 다닐 때 옷 제일 잘 입던 사람이야. 왜 이래.
“그런데 어디 가냐? 경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가까운데 간다.”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해주고 신호를 건너 반대쪽 건물지하로 들어가는 차. 그리고는 자장가 같은 노래를 튼다.
“여긴 어디냐? 너 뭐하냐?”
지하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대는 루다. 멈춘 차에서 운전석 시트를 뒤로 끝까지 눕힌다. 무섭게….
“너도 누워.”
“뭐….”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누워? 왜 이래…. 무섭게….
“자라고. 너 요즘 경기장에서 편하게 쉬지도 못하잖아. 여기서 좀 자다 가라고.”
“자라고? 여기서?”
“누나가 이렇게 자상하다. 구단에는 나랑 인터뷰한다고 시간 뺐으니까 좀 자다가.”
아니…. 나는. 그게 아니고….
“그게…. 좀…. 불편해서….”
“안 해봐서 그런가 본데 한두 번 해보면 여기서 잠깐씩 눈붙이면 좋아. 내가 가끔 불러줄 테니까. 조금만 자.”
아니…. 그게 아니라고….
“그게…. 불편해서….”
“처음만 그렇다고! 시간 없어. 눈감고 누워.”
“아니…. 차가 아니고….”
“차가 아니고?”
“네가 불편해서….”
“이XX가 죽을라고! 너 안 누워? 지금 곱게 안 누우면 내가 확 덮친다!”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곱게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꼭 소리가 나오게 해. 눈뜨면 죽어. 내가 깨울 때까지 눈뜨지 마.”
이게 쉬라고 데려온 거냐…. 무서워서 어떻게 쉬냐….
“일어나.”
뭐야. 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눈감자마자 일어나래.
“자라며….”
“너 두 시간 잤어.”
“어? 뭐? 두 시간?”
“눈감자마자 곯아떨어지면서 불편하긴 무슨. 가자. 경기 늦겠다.”
아…. 망했다. 경기전 루틴 깨졌네. 루틴 중에 뭐 뭐를 빼야 하지….
- 랩터스 13:2로 승리했습니다. 오늘 경기 김소전이 말 그대로 날아다녔습니다.
- 최근 자제하던 도루까지 성공시키고 있어요. 시즌이 끝나가니까 욕심을 내보는 것 같은데요.
- KBO리그 전대미문의 기록을 향해 달려가는 김소전. 남은 경기에서 어떤 기록을 내어줄지 기대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자야 한다. 잠깐 눈붙인 것만으로도 기운이 좀 든다. 진짜 가끔 루다한테 와달라고 해야하나….
* * *
“조 단장! 이거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소리 지르지 마요. 상황 파악 중이니까”
“상황 파악은 무슨! 이게 말이나 돼!”
“소리 지르지 말라고요. 젊은 남녀가 그럴 수도 있지 무슨 큰일이라고”
“이게 큰일이 아니야! 세계그룹 주가가 흔들리고 있어!”
최근 좋은 팀 성적 때문에 사이가 좋았던 구단주와 단장이 아침 조간신문을 놓고 크게 싸운다.
[세계그룹 외동딸 SBC 아나운서 이루다, 랩터스 김소전과 자동차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