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숙제
- 일본의 기타가와 선수가 깜짝 활약을 보인다면 우리는 검증된 선발 김호영이 있습니다.
- 기타가와 선수가 깜짝 활약은 아니고 전문가들은 다 알고 있었죠.
- 리그 최고의 에이스 김호영이 일본의 강력한 타선을 잠재우는 모습이 시작됩니다.
- 일본 타선이 강력하지는 않고요. 이번 대회 투수력이 더 돋보이고 있어요
- 김호영 초구 던집니다.
덥다. 그라운드는 확실히 덥다. 해도 없는데 서 있기만 해도 정신이 어질어질해온다. 정신줄 놓지않으려 투수의 1구 1구에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면서 정신을 환기해본다.
- 유격수 땅볼. 간단한 게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어내는 대한민국입니다.
- 김호영 선수가 가능하면 길게 끌고 가주면 좋겠지만 여전히 날씨가 너무 덥거든요. 김호영의 교체타이밍을 잘 잡아줘야 할 것 같아요.
호영 선배가 체력이 약하진 않지만 언제나 더위에는 좀 약한 모습을 보이는데 지난 경기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다고 생각보다 공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이럴 때는 타자들이 점수 차를 벌려주면서 투수가 쉽게 던질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 숙명의 라이벌 한일전. 경기 초반 양 팀의 승부가 팽팽하게 이어집니다.
- 1회 양 팀의 선발투수들이 강력한 구위로 간단한 게 이닝을 막아냈어요. 1회를 보면 오늘 경기 많은 점수가 날 것 같진 않아요.
몇 번 해봤지만 2회 초에 첫 타석에 들어가는 게 영 어색하다. 주자 없이 노아웃에 들어가는 타석. 처음도 아닌데 전광판에 새겨진 4번이라는 타순이 어딘지 모르게 신경을 거슬린다.
머리로는 콘택트에 집중해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저 전광판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조금은 더 세게 쳐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이 가득한 채로 타석에 섰다.
- 이번 대회 유일하게 4할대 타격을 하는 대한민국의 4번 김소전입니다.
- 이번 대회 우리 선수뿐만 아니라 대부분 선수의 성적이 좋지 않은데 김소전 선수만 눈에 띄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어요.
- 16타수 7안타. 4할 3푼 7리, 홈런 2개, 도루 3개를 기록 중입니다.
- 이번 대회에서 타자는 김소전 투수는 대만의 린취한 선수죠.
- 하지만 린취한 선수는 김소전 선수에게 홈런을 맞은 바가 있습니다.
타석에서 투수를 바라보니 머리 뒤로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인데 더 커 보이고, 확실히 보통 투수는 아니다.
- 김소전을 상대로 초구부터 강력한 직구를 꽂아 넣는 기타가와 선수입니다.
- 구속도 153인데 그것보다 구위가 정말 좋네요.
- 하지만 그런 빠른 공을 수도 없이 쳐냈던 김소전입니다.
오호. 완벽한 투구폼에서 나오는 회전이 잔뜩 걸린 무시무시한 공. 그런데 왜 이렇게 깨끗해 보이지?
- 2구 빠집니다.
- 슬라이더였죠. 유인구를 던졌는데 김소전선수가 반응하지 않았어요.
- 김소전 이런 공에 반응할 필요 없습니다.
느낌이 왔다. 너 이 녀석… 폼이 아주 깨끗하구나.
- 3구 잡아당깁니다! 우측담장! 우측담장! 넘어갑니다! 일본을 상대로 선취점을 뽑아내는 대한민국! 1점 앞서갑니다.
- 다르네요. 김소전 달라요. 파워가 있는 김소전이긴 하지만 올해는 정말 다르네요. 지난시즌과 공을 띄우는 기술 자체가 달라요.
깨끗한 폼에 깨끗한 직구. 빠르긴 하지만 던질 때부터 눈에 보이는 공인데 못 치면 안 되지. 못 치면 내가 여태 먹은 야구 밥이 아깝지.
- 내야에 높게 뜹니다. 유격수! 유격수가 잡겠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유격수 김소전!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냅니다! 경기 종료!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아시아의 정상에 올라섭니다!
- 이번 대회 우승을 하긴 했지만, 우리 선수들 받아든 숙제도 많아요. KBO가 우승이라는 결과만 놓고 안일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진지하게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은 아시안게임이었지만 내년 3월엔 WBC가 있거든요.
- 그렇습니다. 우리 대표팀 내년엔 WBC가 있습니다. 내년에도 세계 최강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이런 경기력으로는 안 돼요. 오늘도 일본의 사회인야구 팀을 상대로 김소전의 홈런 말고는 점수가 나지도 않았어요. 선수들 이러면 안 돼요
- 김소전의 홈런 두방을 우리 투수들이 잘 지켜냈습니다. 다음 WBC에서도 우리 선수들의 촘촘한 수비로 잘 막아낼 것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 아니라고요. 일본의 타자들 우리 2군 선수등급도 안되는 타격을 하고 있는데도 오늘 경기 투수들이 버거워했어요. 이런 식이면 안 됩니다. KBO 차원에서 대책이 필요해요.
- 카타르 도하에서 대한민국 야구팀이 금메달을 따냈다는 소식을 알려드리면서 축구경기장으로 카메라를 넘기겠습니다.
마지막 경기라서 그런가? 경기전 집합을 걸어서 그런가. 우리 타선이 눈곱만큼 나아지기는 했지만, 산발적인 안타 몇 개가 더 나왔을 뿐 응집력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라면집 사장님의 타이밍을 잡아서 경기 초반 두 개 넘겨버린 게 끝까지 지켜져서 망정이지 처음에 점수 안 났으면 오늘도 경기 끝날 때까지 질질 끌려다닐 뻔했다.
실상을 이런데도 우승했다고 좋아하는 선수들. 머리에 얼음주머니를 하나씩 올려놓고 우승 세리머니를 한다고 그라운드에 올라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 꼴을 보자고 야구한게 아닌데…. 자괴감이 느껴지고….
“형. 형 왜 그러고 있어요.”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덕아웃 에어컨 앞에서 앉아있는데 웃는 얼굴의 경준이가 툭 치며 말을 건다.
“야구를 못 해서 반성 중이다.”
“형…. 안 웃겨요”
“반성 중이라고 웃기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형…. 형이 반성 중이면 저는 어쩌라고요?”
“넌…. 일단 맞고 시작하자.”
그렇게 시작된 경준이와의 100분 토론.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여정에 대해 쉴 새 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형이 이상한 거예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태업한 거지.”
“형. 저기 안 보여요? 선수들 머리에 얹어놓은 얼음 벌써 다 녹았어요. 날씨가 이런데 경기력이 어떻게 나와요?”
“우리가 축구하냐? 투수도 아니고 타자들이 잠깐 타석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게 말이 돼?”
“형…. 다른 사람을 형처럼 시키면…. 죽어요. 그러지 말아요.”
말이 안 통한다. 내가 과한 거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타석에 들어갈 때만이라도 집중하라는 건데…. 그게 안 돼? 에어컨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타석에 들어가서만 정신 차리라는 건데?
“형. 요즘 현범이나 규환이 성적이 왜 안 나오는 줄 아세요?”
“그거 최강훈이한테 과외 잘못 받아서 그렇지!”
“네 그거에요.”
이게 날이 더우니까 미쳤나!
“그런데 얘들이 왜 과외받는지 아세요?”
“야구 좀 잘해보겠다고 그러는 거지. 내가 그 점은 참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방식이 틀렸지. 우리 팀에 코치님하고….”
“형. 도망간 거예요.”
“뭐?”
이건 또 뭔 X 소리야….
“형 얘들 도망간 거라고요. 형한테서 도망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형 몰라요? 랩터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짜 몰라요?”
랩터스가 어떻게 돌아가긴. 내 뛰어난 지도력으로 선수들이 하나 되어 똘똘 뭉쳐 잘 돌아가지.
“우리 팀 모든 기준은 김소전이라고요. 리그 최고타자 김소전이 저렇게 죽어라 하니까 다른 선수들도 죽어라 해야 하는 거라고요.”
“내가 뭘 시킨 것도 아니고 뭘 죽어라 한다고 그러는 거야?”
“현범이나 규환이가 열심히 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름 죽어라 하는데 안 되잖아요.”
“그럴 때 물어보라고 코치님들이 있는 거잖아.”
“우리 팀 코치님들은 기준이 김소전이라고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어요.”
자꾸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도망간 거예요. 다른 데서 야구를 배우면 좀 쉬워질까. 소전이형만큼은 아니어도 자기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도망가는 건데 형도 그렇고 구단도 그렇고 모르고 있네요.”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말이 안 되는데.
“그러니까 과외받는 머저리들이 나처럼 못돼서 도망간 거다? 팀에서 나처럼 하라고 기대가 커서 도망간 거다? 그런 거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거죠. 뭐.”
이 멍청한 놈들
“그럼 넌?”
“네?”
“넌? 넌 왜 과외 안 받아?”
“저요? 과외요? 에이. 제가 과외를 왜 받아요?”
너야말로 과외를 받아야지. 우리 팀에서 야구를 제일 못하는 놈이 넌데.
“너야말로 타격에 약점이 많잖아. 너야말로 과외를 받아야 하지 않겠냐?”
어라? 웃어? 내 말이 우스워? 웃어?
“형. 저 형이랑 같이 라타코치님한테 과외받잖아요”
“너 그때 가르쳐준 거 안 하고 딴짓만 하잖아.”
“그렇죠. 전 그래서 라타코치님하고 과외받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어? 네놈이 깨달은 게 있다고?
“어차피 야구 누가 알려줘서 되는 게 아니다. 내 맘대로 야구해야 성적이 잘 나온다. 제가 알아낸 진리에요.”
아…. 그래서 야구를 그따위로 자유분방하게 하시는구나….
“그럼 그 진리를 네 친구에게도 설파해야 하지 않겠냐?”
“형…. 제가 왜요? 다들 자기 먹고 살건 자기가 찾아야죠. 저 친구들 저렇게 야구하면서 깨지다 보면 언젠가는 저처럼 깨달음을 얻겠죠. 그리고 스스로 알아내야 뼈에 새겨지는 거예요. 날로 먹으면 안 돼요.”
여태까지 내가 거둬서 야구를 날로 먹은 놈이 입만 살아서…. 내가 복이 없다. 복이 없어….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걸고 인천공항에 들어서자 살 것 같다.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임에도 선선하게 느껴지고 가을처럼 청량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8월의 상쾌함을 가슴 깊이 느끼며 입국장 문을 나서니…. 눈앞에 기레기님들의 장사진이 펼쳐진다.
표정을 보아하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고…. 우리 팀 누가 잘못했나….
“감독님! 이번 대회 졸전의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감독님! 김호영 선수 혹사 논란이 있습니다. 결승전에 꼭 100구를 넘겨야 했습니까?”
“감독님! 타선이 고비 때마다 끊겼습니다. 타선에서 주상훈선수를 2번에 기용한 이유를 밝혀주십시오”
와…. 감독님이 잘못했구나. 도망가자. 여기서 잡히면 오늘 하루종일 기분이 더러울 거야….
“김소전 선수. 이번 대회에서 혼자만 타격감이 좋았던 이유가 있습니까?”
“김소전 선수! 이번에도 일본을 침몰시켰습니다. 기분이 어땠습니까?”
“김소전 선수. 기온이 올라갈수록 홈런이 늘어난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김소전 선수는 여름 보양식은 어떤 걸 주로 먹습니까?”
감독님이 기레기님들 앞에서 잡히는 걸 보고 뒤로 크게 돌아 나가는데 1열에 서지 못했던 기레기님들이 나를 보고 따라오며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걷는 것처럼 보이는 뛰는 속도로 무조건 문밖으로 나간다.
나오긴 했지만 갈 곳 잃은 시선. 분명 구단에서 차가 나와 있어야 하는데 매니저 형은 보이지 않고, 랩터스 차도 보이지 않고, 택시는 저 멀리 있고….
뒤에서 쫓아오는 기레기님들의 소리가 커질수록 내 심장박동 소리도 커져만 간다.
“야! 타~”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내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중형세단.
고민할 것도 없이 뒷자리를 열어 캐리어를 던지고는 그대로 몸을 실었다.
“야! 살살 타! 시트 다 까지겠네!”
“넌 내가 중요하냐? 차가 중요하냐?”
“차가 중요하지! 오늘 세차도 했는데 먼지 다 묻고…. 너 세차비 내놔.”
“이거 내차 아니냐?”
“차있다고 유세냐? 어쨌든 내가 끌고 다니니까 지금은 내차지. 세차비 내놔.”
“넌 오랜만에 날 봤는데 첫마디가 돈 얘기냐?”
“왜? 사랑해~ 뭐 이런 얘기라도 해줘?”
루다야… 그러지 마라…. 꿈에 나올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