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불안한 출발
미친놈들이다. 지난 도하 아시안게임을 겨울에 했는지 이유를 듣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이 날씨에 아시안게임을 하겠다고? 해가 지고 밤 11시가 지나도 30도가 넘는데?
이 날씨에 야구를 하라고? 제정신이 아니다. 금메달이고 뭐고 그냥 집에 가자.
“형~ 여기 천국이에요~ 건물들도 삐까뻔쩍하고 진짜 좋네요. 우리 블리도 데려왔어야 하는데”
나는 경기 걱정에 흰머리가 생기는 것 같은데 저 팔자 좋은 멍청이는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경준아. 그러지 말고 저 문을 열고 한 발짝만 나가보는 건 어떨까? 그럼 그런 X 소리는 안 할 텐데”
“형! 미쳤어요? 유리 밖으로 안 보여요? 도로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잖아요. 저기 나가면 통구이에요. 어효.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덩치는 산만하게 어디서 귀여운 척을… 죽을라고
“저 바깥이 우리가 경기할 곳이다. 지금 여기가 죽기 직전에 누리는 최고의 호사라고 생각하고 잘 즐겨라.”
“에이. 형. 돔구장이겠죠?”
“오픈이다.”
“이 날씨에요?”
“어”
“카타르는 야구장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일 후진 축구장 개조해서 야구장 만들었다가 다시 축구장으로 쓴다더라”
“형 여기 축구장 에어컨 나온다고 들었어요”
“어 축구장은 나온대. 야구장은 아니고”
“어제 11시에 31.5도인데요?”
“어제는 선선했네. 춥겠어. 넌 패딩 입고 나와라”
“형…. 진짜 돔구장 아니에요?”
“어.”
“형…. 저 집에 가도 돼요?”
“나도 같이 가자”
이번 카타르 아시안게임 야구에서 우리가 우승하는데 도박사들이 올인을 하는게 이해가 된다. 이 날씨에 경기하고 싶지 않은 일본은 사회인 야구선수들만으로 선수단을 꾸려 보냈고, 대만도 저년차 프로야구선수와 실업팀 선수들을 섞어서 내보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미필 선수들 위주긴 하지만 그래도 리그에서 주름 좀 잡는 선수들로 구성된 선수단. 우승해도 본전이고 졌다가는…. 자료화면으로 쓰이는 호랑이가 스타 하던 시절의 도하 참사 비디오를 교체할 수 있게 되는 상황. 우리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 야구가 시작되는 알 라얀 스포츠클럽입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을 노리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그라운드로 나오고 있습니다.
- 이번엔 우리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죠. 우리 선수들 한국야구의 강함을 확실히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무서워서 감히 경기장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밤 10시에 경기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반 10시에 사우나에 들어가야 하는 기분은 도무지….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쉽게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저 뜨거운 경기장에 먼저 나서는 대만의 선수들…. 상대가 나오는 걸 보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아 괜히 여기저기 시선을 돌리다 감독님과 눈이 마주친다.
눈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는 감독님…. 괜히 눈을 피해 보다가 코치님과 눈이 마주친다…. 한숨을 푹 쉬고 경기장으로 나가본다.
덕아웃을 벗어나자마자 숨을 못 쉬게 하려는 듯 확 들이닥치는 후끈한 열기…. 한밤중인데도 이러면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거야….
“형 어디서 바람 부는 것 같지 않아요?”
“어. 에어컨 틀었대”
“문 열고 에어컨이 말이 돼요?”
“돈 많으면 안 될 게 뭐야? 그리고 에어컨 켜도 기껏해야 라인 쪽만 좀 시원하고 센터 쪽은 여전히 더울 거야”
- 이번 아시안게임은 참가국 6개 팀의 풀리그로 치러집니다. 풀리그를 치르고 별도의 결승경기 없이 순위대로 순위가 결정지어지게 되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강력한 우승 후보로 점쳐지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과 일본과 대만, 중국, 라오스, 필리핀이 본선에 진출했죠. 우리와 승부를 겨룰만한 팀은 일본과 대만인데 일본은 사회인야구팀이 중심이고 대만도 실업팀이 주축이에요. 대한민국이 정예멤버들만 선발해서 올라온 만큼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 대만과의 첫 경기가 7월의 뜨거운 밤 카타르 도하에서 시작됩니다. 양팀선수들 그라운드에 나왔습니다.
덕아웃에서 나와 선수단이 도열하고 국가연주가 시작된다. 국가연주가 되는 동안 반대쪽 덕아웃을 바라보니 대만의 선수들의 체구가 작은 게 야구를 썩 잘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더위와의 싸움이다. 우리가 더위만 이겨내면 된다.
- 대만의 1회 초 공격을 김호영 선수가 잘 막아냈습니다.
- 이번 시즌 랩터스가 1위를 지키는데 김호영 선수가 큰 역할을 해주고 있죠. 선발이 안정되면 경기가 수월하게 풀리는 법이에요.
미쳤다. 미쳤어. 국내리그를 뛸 때 30도에서 경기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여기 장난이 아니다. 해가 졌는데도 푹푹 찌는 날씨 유격수 쪽으로 공이 하나도 안 왔는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어떤 멍청한 놈 머리가 여기에서 경기하겠다고 결정한 거야….
- 1회 말 대한민국의 공격. 1번 타자 양규환부터 시작합니다.
- 빠르고 공을 예쁘게 치는 양규환 선수죠. 랩터스에서는 7번으로 주로 나오고 있습니다만 서화주감독이 양규환 선수의 야구센스를 믿고 전격적으로 1번으로 기용했어요.
자…. 잠깐…. 저게 뭐야…. 말이 안 되는데….
- 대만의 선발투수 린취한입니다.
- 알려진 게 별로 없어요. 공을 길게 보면서 적응해 나가야 해요.
- 대만전력소속에 실업리그 에이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140 후반의 빠른 공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 영상도 제한적이고 야구가 구속만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구위가 얼마나 뒷받침되느냐가 중요한데 연습 투구 보니…. 글쎄요…. 우리 선수들 쉽게 보면 안 될 것 같긴 해요.
어디 실업팀 선수라더니…. 한국 와도 당장 에이슨데?
- 양규환 삼진이네요. 처음 보는 투수에게 적응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 투수의 공이 좋아요. 양규환 선수가 1번 타자로 나왔으면 공을 좀 길게 보면서 뒤 선수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네요.
저…. 규환이 저놈. 여전히 저 예쁘기만 한 폼으로 휘두르니까 안 맞지. 상대 공이 빠른데 배트가 늦잖아.
- 노경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납니다. 쓰리아웃. 득점 없이 1회 말 공격을 끝내는 대한민국입니다.
- 우리 선수들 좀 급해요. 투수가 예상보다 공이 좋거든요. 차분하게 경기를 해나가야 해요.
전력분석을 누가 한 거야. 최고 구속이 147이라며, 오늘 152가 찍히는데? 전광판 구속이 믿을게 못 된다고 쳐도 실업팀 선수가 152를 던진다고? 이게 말이 돼? 일본 선수도 아니고 대만 선수가 152?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 2회까지 잘 막아내는 김호영. 대만 선수들을 상대로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여줍니다.
- 전체적인 전력에서 우리가 앞선다고 봐야죠.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만 하면 우리 선수들 좋은 결과 낼 수 있어요
호영 선배 공 던지는걸 본 게 몇 년인데…. 이런 거 처음이다. 호영 선배…. 2이닝 던지고 지쳤다. 어깨 올라갈 때부터 힘이 들어가는 게…. 체력 방전이다. 꼴랑 2이닝 던지고….
유격수 수비위치의 나도 이렇게 더운데…. 저 마운드 위의 투수는 더 힘든 거다.
- 대한민국의 2회 말 공격입니다. 이번 대회 4번의 중책을 맡게 된 대한민국의 주장 김소전입니다.
- 김소전 선수가 4번으로 스타트하는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서화주감독의 용병술이 빛을 발할지 지켜보겠습니다.
타석에서 바라보는 대만의 투수. 사이즈가 크지도 않은 것이 공을 딱히 잘 던질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앞에 선수들이 죄다 쓸려나갔으니 공 하나 정도는 바라보자
- 155! 155킬로미터가 찍혔습니다.
- 1회는 워밍업이였나요. 2회 말 린취한선수 김소전선수를 상대로 엄청난 직구를 보여줬어요.
- 분명 대만 실업팀 소속 선수인데요. 이런 선수가 프로가 아니고 실업팀에 있습니다.
- 지금 같은 공을 계속 던질 수 있다면 우리 선수들 고생할 수도 있겠어요.
뭐지? 양키스에서 1, 2선발보다 잘던지는 3선발 이시윤이라도 되는 건가? 저속도에 저 구위는 뭐지?
- 2구 스트라이크!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변화구였습니다.
- 슬라이더죠. 슬라이더의 각이…. 허허허. 대만에 이런 투수가 있었네요.
헐…. 미쳤네. 공이 왜 저래. 프로도 아니고 실업팀이라며…. 생각을 해보자…. 생각을….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아…. 그렇구나. 이제 알았다. 집에 돈이 많구나. 그래서 악마의 재능을 가지고도 취미생활로만 야구하는구나. 그렇지 그러면 말이 되지. 악마의 재능을 타고난 금수저.
쳇. 괜히 기분 나쁘네. 금수저 다 죽어라
- 3구 타격! 김소전의 타구 2루수 키를 넘어갑니다!
- 살짝 먹힌 타군데 힘으로 이겨냈어요. 우리 선수들 이렇게 치면 됩니다.
와. 공이 돌덩이네. 안날아가네 안날아가. 에이전트형한테 소개해줘야 하나? 당장이라도 우리 팀으로 데려오고 싶다.
- 7회 초 대한민국 투수 교체합니다. 김기훈 빠지고 박해정이 올라옵니다.
- 확실히 환경이 안 좋긴 안 좋은 것 같아요. 우리 투수들 공을 길게 던지지 못하고 있어요.
- 선발 김호영이 공 70개로 4이닝을 던진 이후 매 이닝 투수가 바뀌고 있습니다.
- 공이 20개가 넘어가면서 구위가 확확 떨어지는 게 보이거든요. 선수들 체력적인 부담이 있는 것 같아요.
한여름 장마철의 우리나라 날씨가 세상에서 제일 XX맞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우리 엄마도 틀린 게 있을 줄이야…. 여기 미쳤다. 12시가 넘었는데도 덥고 습하고… 1루수와 3루수 쪽은 에어컨 바람이 살짝 느껴지기라도 하지…. 여기는 바람 한 점도 없다. 사우나도 아니고…. 여기서 어떻게 사는 거지?
- 힘든 경기를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팀입니다. 8회 말까지 양 팀의 스코어 0:0 양 팀 모두 1번의 공격 기회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 이 경기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대만의 투수가 잘하긴 하지만 이정도로 잘할 줄 몰랐네요.
이럴 수가 없다. 프로도 아닌 금수저 재능충과 우리 팀의 겉멋 든 모지리들의 환상의 콜라보. 저 재능충의 공을 치려면 테이크백 같은 거 다 없애고 컨택에만 집중해서 쳐도 될까 말까 한데 우리 모지리들은 죄다 최강훈처럼 치고 있다.
어쩌다 저런 게 유행이 된 거야…. 답이 없네. 답이 없어.
- 9회 말 마운드에는 선발 린취한이 여전히 올라옵니다.
- 이번 대회 경기 운영규칙도 국제경기답지 않죠. 투구 수 제한도 없어요. 린취한선수 8회까지 120개를 던졌는데 또 올라왔어요.
- 공개수도 많은데 여전히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린취한 선수입니다.
사람이 아니다. 저거…. 사람이 아니야. 저 정도면 진지하게 이시윤보다 잘던지는 거 아닌가 의심해 봐야 할 것 같은데….
- 9이닝 정규이닝이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스코어 0:0. 주어진 시간 동안 대한민국과 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습니다.
- 상대 투수가 좋긴 하지만 상대는 사실상 실업팀이거든요. 이런 결과가 나오네요
- 양팀선수들 바로 승부치기에 들어갑니다.
- 이번 대회 룰이죠. 9이닝 경기 후 주자를 1, 2루에 세워놓고 시작하는 승부치기. 이때부터 시작하는 타선은 감독이 임의로 고를 수 있어요.
더워 죽겠는데 연장. 승부치기라고는 하지만 이 날씨에 이닝을 더 하는 건 매한가지. 그리고 승부치기도 점수 안 나면 뭐…. 계속해야 한다.
- 유격수~ 유격수 숏바운드처리 2루로~ 그리고 1루에서 아웃! 병살타! 10회 초 승부치기 상황에서 병살로 이닝을 마무리하는 대한민국! 좋은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 애매한 타구였거든요. 유격수 김소전선수의 판단이 좋았어요. 2루 선택은 힘들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숏바운드 판단이 정말 좋았네요.
- 삼진과 병살로 10초를 막아낸 대한민국 10화 말 승부치기를 준비합니다.
- 좋은 수비가 나왔으니 우리는 여기서 끝내야죠. 선수들 많이 지쳐있거든요. 빨리 끝내야 합니다.
중동에 가면 석유로 만들어진 금덩이 건물들이 있다고 해서 한 번은 꼭 가봐야지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여기 사람 살 데가 아니다. 더운데 습해…. 살려줘….
- 10회 말. 2루 주자 주상훈, 1루 주자 노경준 타석에는 김소전입니다.
- 서화주 감독 한 번의 기회에서 끝을 보려는 것 같아요. 김소전이 무조건 쳐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 오늘 대한민국의 5안타 중 3안타가 김소전입니다.
- 김소전선수 말고는 대만의 린취한선수의 공을 제대로 때려낸 선수가 없어요. 그만큼 선발 린취한선수의 공이 좋았어요.
저거… 정상이 아니다. 해부해봐야 돼
- 대만의 마운드 여전히 린취한선수입니다.
- 이래도 되나 싶은데 대만도 물러설 데가 없는 거죠.
- 투구 수 135개에서 마운드에 다시 오르는 린취한. 투혼을 보여줍니다.
- 투혼이 아니라 선수 팔을 갉아먹는 거예요. 혹사에요. 그만 던져야 해요.
저게 사람이야? 왜 지금도 저런 공이 들어와?
- 초구 꽉 찬 스트라이크! 147킬로미터의 빠른 공입니다.
- 팔은 좀 내려왔지만, 여전히 위력적이네요. 김소전선수 욕심부리지 말고 가볍게 쳐야 해요.
부럽다 채능충. 내게도 너 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미국 가서 성공해서 따뜻한 해변에서 루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 아니…. 뭔 더러운 생각이야. 내가 루다랑 왜 해변에 가. 해변에 예쁜 누나들이 얼마나 많은데…. 미쳤네. 기분이 더러워졌어.
- 김소전 걷어 올렸습니다!
- 김소전의 전매특허죠. 이건 넘어갔어요
- 대한민국 선수들 전부 몰려나오고 있습니다! 경기를 끝내는 쓰리런 홈런! 대한민국이 카타르 아시안게임 첫 경기 힘겹게 가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