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사설 과외장
- 랩터스! 한점을 지켜내며 위닝 시리즈도 지켜냅니다.
- 위험했지요. 박요훈 선수 주자를 쌓아가면서도 실점하지 않고 지켜냈다는 게 중요해요.
- 랩터스 일요일 경기를 가져가며 이번 주 전적을 3승 3패로 맞춥니다.
- 이번 주 살짝 경기력이 떨어졌지만, 아직 승패마진 벌어놓은 게 많지요. 순위싸움에는 영향이 없어요.
- 지금까지 잠실에서 랩터스와 폭스의 경기를 보내드렸습니다. 시청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까불던 어린 친구들이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하자 뒷문이 헐거워졌다.
지금까지 랩터스의 솔리드한 마무리를 책임져주던 박요훈 선배가 심상치 않다. 4월 한 달은 지난 시즌과 다르지 않던 구위를 보여주던 공이 기온이 올라갈수록 힘이 빠진다. 공의 구위로 타자를 상대하던 양반이 어울리지 않게 구석구석 노리는 제구를 보여주면서 상대를 잡아나간다.
그동안의 관록으로 경기를 지켜내고는 있지만 나올 때마다 주자를 쌓아나가는 게…. 영 불안하다.
내가 뭘 도와주고 싶어도 나보다 한참 선배한테 뭘 얘기하기도 그렇고 투수한테 무슨 말을 하기도 그렇고 멀리서 응원만 해본다. 그리고…. 해줄 말이 없기도 하다. 딱 봐도…. 연세가…. 이제 공에 힘이 떨어지실 연세시라….
“경준아. 오늘은 훈련장이 왜 이렇게 조용해?”
“아 형~ 다들 과외받으러 갔어요.”
“응? 어딜 갔다고?”
언제나처럼 경기 끝나고 코치님들하고 선수단 전달사항 파악해서 여기저기 알려주고 늦게 훈련장에 내려오니 북적이던 공간이 오늘따라 한산하다.
그나마 사내 커플 멍청이 한 놈이 피앙세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훈련을 하고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알 수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과외요. 강남에 선수들을 대상으로 특별과외가 생겼어요. 내일 휴식일이기도 하니까 다들 구경하러 간다고 갔어요.”
과외라…. 프로선수가 과외라…. 우리 팀에 타격코치도 있고, 감독님도 지나다니다가 선수들 타격 조언도 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전력분석팀에서 훈련 영상도 다 따서 매일 분석자료 보내주는데…. 그것도 소화 못 하는 놈들이 과외라고?
“넌 왜 안 갔어?”
“저요? 에이 저랑 형은 미국에서 과외받고 있잖아요. 국내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한테 양보해야죠.”
오…. 이놈이 세상의 균형발전에 대해서 생각할 놈은 아니고…. 뭐지….
“형…. 저 오늘은 좀 일찍 가볼게요. 오늘 우리 야옹이 어머니가 떡 주신다 그래서 가봐야 하거든요. 저 먼저 갈게요~.”
야옹이는…. 또 뭐야…. 머리가 아프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배트나 돌리자….
오늘 훈련장도 조용하고 내일도 쉬는 날이고 조금 늦게까지 남아 배트를 돌려본다. 아무도 없는 훈련장에 혼자 땀을 흘리는 옛날 생각나고 좋다.
좀 늦게 집에 들어가 침대에 들어가니 포근한 게 천국이 따로 없다. 잠이 스르르 들려는데…. 울리는 전화…. 아…. 집에 가면 전화한다고 하고는 안 했지…. 넌…. 잠도 없냐….
“어… 루다야.”
“야! 집에 들어가면 전화하라고 했어? 안 했어? 이제 한국말도 못 알아들어? 영어로 해줘?”
아니…. 깜빡할 수도 있지. 전화를 매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슬프다.
“너 진짜 훈련하다 들어온 거 맞아? 어디서 또 그 아줌마 만나거나 한 거 아니야! 어! 똑바로 얘기 안 해!”
나 인사하고는 아직 한마디도 못 했는데….
“너. 말 없는 거 보니까 진짜네. 너 어디서 누구랑 뭐 먹으면서 무슨 얘기 했어! 얘기해! 빨리 얘기 안 해!”
나…. 물하고 팬님이 보내주는 홍삼하고, 너님이 보내주는 영양제하고…. 그런 거 먹었는데.
“지금 시간이랑 경기 끝난 시간이랑 하면…. 음…. 가만 보자. 어디서 먹은 거야. 오늘 폭스랑했지? 폭스 누구랑 먹었어. 폭스면 송철형? 송철형은 밤에 야식이면 족발이고, 술이면 뜨끈한 국물인데…. 그 사람은 간단히 먹는 스타일이 아니고…. 야! 너! 누구 만났어!”
질기다. 그런 각오로 운동을 했으면 넌 금메달 땄다.
“아니거든요. 나 오늘은 혼자 훈련장을 지키면서 운동하다 왔거든요. 헛다리는 그만 짚으세요.”
“야! 랩터스 훈련장 경기 끝나고도 선수들 바글바글하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일 쉬잖아. 그래서 가정 있는 사람들은 일찍 퇴근하고 남은 총각들은 과외받으러 갔다.”
“총각들? 총각들이 과외를 받아? 무슨 과외를 받아? 이것들 봐라.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얘…. 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과외가 나쁘냐? 강남에 선수들 대상 과외가 생겼다던데? 선생님이 메이저리거래. 경준이 친구들이 꼬셔서 오늘 상담받는다고 우르르 몰렸갔대.”
“뭐? 메이저에서 선생님이 와! 총각들이 뭘 배우려고 메이저에서 선생님이와! 그런 것도 메이저가 있어? 하여간 넌 가기만 해봐! 내가 가르쳐줄 거니까 꿈도 꾸지 마!”
도무지…. 이 녀석의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거야….
“저…. 저기요…. 선수들 야구! 야구 배우러 갔거든요? 프로선수들도 선생님께 배우거든요.”
“프로선수가 무슨 야구 과외를 받아?”
“그런 게 생겼다잖아. 프로야구선수도 대상으로 하는 과외 교실이 생겼대. 메이저리그 출신 선생님도 오고 장비도 좋다더라고.”
“랩터스가 코치진도 나쁘지 않고, 필요하면 타격인스트럭터도 팍팍 불러주는 구단인데 과외를 받으러 선수들이 간다고? 그리고 랩터스보다 좋은 장비가 있는 사설레슨장? 그게 말이 되냐? 다른 건 몰라도 랩터스 구단주가 얼리아답터 성향이 있어서 신기한 건 사놓고 생각하는 스타일인데?”
그러니까. 나도 그게 이해가 안 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구단주 형이 얼리아답터인건 어찌 그리 잘 아냐?”
“내가 희승이 삼촌한테 업혀서 컸다. 그걸 모를까 봐. 희승이 삼촌이 나한테 사다 준 게임기부터 RC카, 드론, VR…. 국내 출시 전에 가져다준 것만 해도 트럭 한가득하다.”
“오…. 역시…. 구단 주형 화끈하네.”
“화끈은 무슨. 신상 빨리 가져오려고 100개 단위로 주문해서 선입고 받으려고 그러다 남는 거 뿌린 건데. 나도 커서야 그런 거 알았다.”
이게 꼭 구단주 형의 깊은 마음을 몰라주고. 그거 다 너 마음 쓰지 말라고 하는 말인데… 에효… 세상을 이렇게 삐딱하게 보니…. 세상 살기가 힘들지….
“어쨌든 오늘 구경들 갔으니까 화요일에 출근하면 뭔가 얘기들이 있겠지. 나도 궁금하긴 하다.”
“그러게…. 프로선수를 대상으로 하는 과외라…. 취재를 해봐야 하나.”
넌 몸이 100개쯤은 되냐? 지금도 SBC 야구 관련 방송은 혼자 다 하는 것 같은데 뭘 더 하시려고?
“괜히 멀쩡히 잘 사는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냅둬라. 너 카메라 들고 가서 과외받는 선수들 찍고 그러면 거기 밥줄 끊긴다. 놔둬라.”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더 가보고 싶긴 한데…. 다음 달까지는 내가 스케줄이 꽉 차서 시간 내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네가 갔다 온 선수들 얘기 잘 들어서 나한테 보고해.”
내…. 내가 왜 너한테 보고를 해….
“아예 우리 회사 보고서 양식을 보내줄 테니까 거기에 맞춰서 써서 보내. 너 이메일 보낼 줄 알지?”
이게 지금 나를 뭐로 보고 구단주 형이 알려준 예술영화 사이트 패스워드 받으려면 이메일로 보내고 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쓸 줄 알지.
“모르는데. 그런 거 해본 적 없는데.”
“넌 학교 다닐 때 그런 것도 안 배웠냐? 아니 살면서 그런 거 안 하고 어찌 살아?”
“누가 요즘 이메일을 써 똑으로 다 하는데?”
“됐다. 보고서는 됐고 나한테 보고나 잘해!”
나중에 얘를 누가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미리 인류를 대신해 감사를 표한다.
“그런데? 아까 나 가르쳐준다고 한 건 뭐야?”
“뭐?”
“아까 나 뭐 알려준다며?”
“이…. 이 나쁜 놈.”
갑자기 난 왜 나쁜 놈이야.
“먼저 나 가르쳐준다고 해놓고는 왜 화를 내?”
“너! 가르칠 거야 한가득이지! 너. 나중에 봐! 내가 내 취향에 맞게 다 고쳐놓을 거니까!”
나…. 나를…. 왜 네 취항에 맞게…. 네 취향이 뭐길래…. 난 잘 치고 잘 달리는 야구선수가 되는 게 목푠데…. 넌 도대체 어떤 야구선수가 취향인 거냐…. 그 머릿속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 *
“안녕~ 너희들 일요일에 과외받고 왔다며?”
“주장. 하이루요~. 과외는 아니고요. 그냥 잘 먹다 왔어요.”
화요일에 출근해서 스트레칭하고 있는데 일요일에 과외를 받으러 갔던 선수들이 하나 둘 들어온다.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나 물어보지만, 딱히 특별한 대답이 나오진 않는다.
“먹다 만 왔어? 선생님이 메이저리거라며?”
“아. 몸 좋은 미국 코치님도 있는데 한국말을 못 하셔서 인사만 하고 말았어요.”
음…. 얘들한테 영어도 가르쳐야 하나? 나도 살아남기 위한 실전 영어라 누구 가르치기는 좀…. 그런데.
“그래? 잘 먹었으면 됐지 뭐.”
“주장도 나중에 같이 가봐요. 시설도 엄청 좋고 새것이라 깔끔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좋은 향기도 나오고 그래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좋은 향기라…. 이거 PTSD 또 오네. 이천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좋은 향기가 나는 방이 하나 있지. 그리고 그 방을 지키는 무서운 오크도 한 마리 있고…. 그러고 보니 요즘 이천을 안 가니 상담 샘 안 본지도 좀 되네. 다음 주쯤엔 한 번 가서 몸 좀 풀어볼까? 요즘 이종격투기 트렌드를 알려드려야 할 텐데….
“좋았겠네!”
“진짜 좋아요. 랩터스에 왔다고 폴 엔터? 사장님이 와서 대게도 사주시고 훈련장에서 체질 검사도 했어요. 결과 나오면 구단으로 개별 처방된 영양제 보내주신대요.”
자…. 잠깐…. 나 뭐 귀에 익은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폴 엔터? 폴 엔터면 릴리누나인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서 계속 안내하는 직원이 예쁘다는 소리를 늘어놓는 멍청이를 치워버리고 조용한 데로 숨어들어 전화를 걸어본다.
“어머~ 이게 어쩐 일이야~ 나 복권 사야겠다~ 소전이 먼저 전화해 주는 날도 있네~”
복권 맞으면 반 땅을 외치고 싶지만, 그것보다 할 말이 있으니 우선 참자.
“누나. 혹시 일요일에 우리 선수들 만났어요?”
“호호호~ 그 친구들 입이 싸네. 소전 안 불렀다고 섭섭해할까 봐 얘기하지 말라니까 얘기했네. 내가 소전은 다음에 맛난 거 사줄게~.”
아니 내가 뭐 사달라는 건 아니고요….
“누나가 우리 선수들 챙겨주면 제가 더 고맙죠.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물어볼 게 있어서요.”
“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내가 뭘 잘못했을까?~”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요. 거기 레슨장 누나는 어떻게 알고 간 거예요? 새로 생긴 레슨장이라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호호. 그게 궁금해?”
그게 궁금하지 그럼. 지금 저 어린것들이 누나를 만났는데 내가 긴장 안 하게 생겼냐고. 나 같은 미모는 아니지만 누나가 우리 아이들 시즌 중에 여자 소개해주면 선수들 경기력에 영향 있으니까. 최소한 비시즌에 소개받아야지.
“나 폴 엔터 릴리야~ 야구관련자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내가 축하를 안 해주면 되겠어?”
이게 무슨…. 야구판을 다 커버하시려고요?
“호호호~ 소전도 아는 사람인데? 누굴까?”
“저도 안다고요?”
“왜~ 그때 같이 들었잖아. 강훈이 새로 레슨장 열었다고. 그래서 축하해주러 갔는데 랩터스 선수들이 오지 모야. 그래서 누나가 꽃게 몇 마리 먹였어~ 호호호.”
꽃게…. 먹은 애들은 대게라고 했는데…. 나도 대게 같은 꽃게 먹고 싶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누구라고 하신 거예요? 강훈? 최강훈? 타이탄스 최강훈이요?”
“어. 나랑 친하잖아. 그리고 강훈도 오랜만에 랩터스 후배들 보니까 엄청나게 좋아하던데? 후배라고 레슨비도 안 받고 아무 때나 오라고 하던데 뭘~ 강훈이 인간성이 됐어.”
잠깐…. 이게 말이 안 되잖아. 최강훈이 인간성이 됐다고?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우리 선수들 아무 때나 오라고? 이거…. 뭐가 이상하다. 뭔가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