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주장의 일과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배트를 투수 쪽으로 내밀면서 홈런을 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다. 그 꼴을 그대로 볼 수 없는 포수가 일어나 타자에게 뭐라고 한다.
작년만 같아도 선배인 포수의 말에 곱게 수긍을 할 현범이가 대들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던 투수가 마운드를 내려와 타자에게 걸어오자 양 팀의 선수들이 뛰쳐나온다.
내 신조가 벤치클리어링 땐 감독 석 뒤에 숨어있다가 느긋느긋 나가는 건데…. 주장으로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내 옆에 있던 1루수가 투수를 향해 뛸 때 같이 투수에게로 다가간다.
내 의도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얼떨결에 투수와 포수 사이에 끼게 되었고 저 망나니 같은 투수 놈이 나를 확 밀쳐버린다.
- 아 이러면 안 됩니다. 데미안 선수 1루 주자였던 김소전을 밀어버립니다.
- 투수 쪽도 투수 쪽인데 이쪽도 만만치 않아요. 선배 포수와 후배 타자 간에 끊이지 않는 설전이 이어지고 있어요.
아…. 진짜…. 내가 이래서 벤치클리어링 싫어하는데…. 내가 싸우러 간 것도 아니고 말리러 간 건데…. 저….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하는 미국놈이 자기 때리러 오는줄 알고 밀어버렸다.
꽈당하고 대자로 넘어지고 나서 한쪽 팔을 붙잡고는 몸을 돌려 웅크렸다. 팔이 아팠던 건 아니고…. 그냥 쪽팔려서…. 쪽팔려서 아픈 척 몸을 웅크렸다.
효과가 있었다. 내가 꼴사납게 엎어져 있자 재규어스 선수들이 움찔한다. 그리고는 흥분한 투수와 몇몇 선수들을 떼어놓는다.
그라운드 반을 갈라 서로 대치하는 선수들. 그때 누가 내 머리를 툭툭 친다.
“뭐하냐? 일어나?”
우씨. 나 엎어져서 아파하는 거 안 보이나? 누구야?
고개를 돌려보니 전임 주장인 라정안선배. 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일어나. 가서 저쪽 주장이랑 정리해야지.”
응? 뭘 정리? 내가 뭘?
“빨리 일어나서가. 저쪽도 기다리잖아.”
전임 주장의 말에 아픈 팔을 부여잡고 스르륵 일어나 쩔뚝이면서 재규어스 주장에게 다가간다.
“너희들 야구 그따위로 할래?”
“그따위라니요?”
“어린놈의 XX들이 요즘 야구 좀 되니까 위아래가 없냐?”
“야구하는데 위아래가 어디 있습니까?”
“이XX 너부터 이따위니까 밑의 것들이 다 그 모양이잖아!”
이 꼰대 아저씨. 우리가 뭘 했다고 이 난리야
“우리가 아무리 우스워도 그렇지 홈런치고 뒤로 들어오질 않나, 이제 신인 티 갓 벗은 놈들이 투수 공 쉽다고 지가 던지는 것보다 후지다고 X 소리를 하질 않나. 이러면 막가자는 거지?”
하…. 문워크는…. 좀 심하긴 했고…. 어떤 놈이 투수 공 쉽다고 대놓고 얘기를 한 거야…. 그런 건 마음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야구하다보면 서로 좀 긁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닙니까?”
그냥 나한테만 한 이야기라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끝냈을 수 있겠지만…. 이제 등 뒤에 랩터스라는 무거운 놈들이 매달려있다.
아무리 그래도 주장인데 그냥 물러설 수가 없어서 한번 머리를 디밀어 보았다.
“아이고. 라정안이는 꼴통이어도 말은 통했는데 이놈은 더하네. 야구다 이거지? 얘들이 못 배워서 그랬네! 야구가 뭔지 보여줄게.”
주장간의 대화 이후 선수들이 철수했다.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철수한 선수단. 뭔가 끝맺음이 안 된 상황이 경기에 그대로 반영된다.
- 양규환 몸에 맞습니다! 아. 굉장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 이거…. 위험해요…. 재규어스 벌써 몸에 맞는 공이 5개째 나오고 있거든요…. 이거…. 위험합니다.
- 양규환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옆구리를 강타당했습니다.
- 아프죠. 안 맞아 본 사람은 몰라요. 저렇게 맞으면 숨이 안 쉬어지거든요.
- 투수 바꿉니다.
- 제구가 안 됐을까요?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이거 야구 정상적으로 해야 해요.
경기는 이기고 있지만 덕아웃 분위기가 개판이다. 흥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상대 팀을 노려보는 선수들. 이거…. 어째야 하지….
- 3구 볼. 위험했습니다.
- 구성신 선수 또 맞을 뻔했어요. 타석에서 좀 떨어지라는 거죠.
- 오늘 재규어스 투수들 몸쪽공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던지고 있습니다.
- 랩터스를 상대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랩터스 타자들이 워낙에 타격 컨디션이 좋으니까 몸쪽으로 빠르게 붙이면서 내야땅볼을 유도하려는 것 같은데…. 시도는 좋은데 너무 위험하게 붙이네요.
성신이가 위협구를 넘어지면서 피하고 일어나 포수와 신경전이 붙는다. 이미 우리 선수들과 여러 번 말싸움을 한 재규어스 포수가 일어나지도 않고 성신이를 갈군다.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고 항변하다 기세에 밀려 조용히 타석에 다시 들어서는 성신이…. 이거. 문제가 있다.
- 삼진! 바깥쪽 빠른 공으로 삼진을 잡아내는 윤서전!
- 구성신선수 몸쪽공에 부담을 느껴서인지 바깥쪽 공을 전혀 대처하지 못했어요. 재규어스가 이걸 노리고 계속 몸쪽에 붙이고 있는 거죠.
곤란하다. 이거 경기가 뭔가 묘하게 꼬인다.
복잡한 머리로 수비에 들어가는데 3루수이자 전 주장님이신 라정안 선배가 옆에 따라붙는다.
“주장. 뭐라도 해야지?”
“네?”
“팀이 이 모양인데 뭐라도 해야지.”
“제가요?”
“그럼 내가 하냐?”
아…. 그렇지…. 내가 주장이지…. 그런데 이럴 땐 뭘 해야 하지….
“이놈 아직도 정신이 없네. 에효. 이러니 내가 맘 편히 놀지를 못하지. 너 오늘 경기 끝나고 시간 비워.”
“시간이요?”
“너 오늘 경기 끝나고 뭐 하려고 했어?”
“네? 오늘은 하체하고 타격 훈련해야죠.”
수비위치에 들어가다 말고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전임 주장님
“너 친구 없냐?”
이 사람이 나를 뭐로 보고! 펙트로 때리는 게 제일 나쁘다는 거 학교에서 안 배우셨습니까!
“이런 날은 저쪽 애들 연락해서 만나봐야 할 거 아니야. 어휴. 내가 재규어스 주장 불러낼 거니까 경기 끝나고 보자.”
아하…. 이런 날은 경기 끝나고 저쪽 주장 봐야 하는구나…. 그런 건 인수인계서에 안 쓰여있었는데….
- 경기 끝. 경기 후만 매섭게 따라온 재규어스를 6:4로 물리친 랩터스가 위닝 시리즈를 확보합니다.
- 경기 초반 얻은 점수를 끝까지 잘 지켜냈죠. 재규어스도 마지막에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경기였어요. 내일은 더 나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겨도 찜찜하다. 한 경기에 몸에 맞는 공만 7개 그것도 골고루 경준이 친구들 위주로 맞았다. 의도가 명확한 보복구. 이겼는데도 경기가 끝난 후 라커에 있는 선수들의 분위기가 어둡다.
“형. 애들 불만이 많은데요. 내일은 우리도 맞춰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맞춰? 우리가 맞아서?”
“그렇죠. 오늘 우리 너무 많이 맞았어요.”
“생각 좀 해보자.”
“형.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면 쟤들이 우리 무시할 거예요.”
“생각 좀 해보자고.”
“형.”
우리가 맞았으니 보복을 해주는 게 당연하긴 하다. 경기에서 기 싸움에 밀릴 수도 있고 나중에 두고두고 만만하게 생각될 수도 있고….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경준이 친구들…. 오늘 집중적으로 이놈들이 문제인 것도 맞긴 맞다. 이놈들 요즘 야구가 되니까 경기장에서 까불어도 너무 까불긴 한다.
내가 상대 팀이었어도 이놈들 까부는 거 꼴사납긴 할 것 같고….
“김소전. 가자.”
“네?”
경준이를 보면서 짜증이 밀려오는데 라정안선배가 부른다.
“형 어디 가요?”
“간다.”
“어디요?”
“네놈이 사고 쳐서 해결하러 간다.”
“형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내일 경기장 올 때까지 잘 생각하고 반성문 100장 써놔. 너 잘못한 거 많아.”
“힝…. 우리 짹짹이 같은 말이에요….”
짹짹이…. 이번 주는 짹짹이냐…
“주장하니까 힘들지?”
선배가 운전하는 차에 타서 이동하니 개꿀이긴 하지만…. 전임 주장의 말에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네 운동만 하다가 다른 사람들 신경 쓰려니까 어렵지?”
“그렇죠. 주장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줄 몰랐어요”
“우리 팀이 좀 더 그래. 네 위보다 네 아래 있는 선수들이 야구를 잘하니까 팀의 중심이 밑에 있거든. 그래서 위아래로 불만들이 많아서 그래.”
“그래도 선배님들은 다 잘해주시는데요”
운전하면서 피식하고 웃는 전임 주장님. 그러다…. 사고 납니다. 운전에 집중해 주세요.
“선배들도 불만 많다. 우혁 선배하고 나한테 들어오는 민원만 해도 너한테 들어가는 민원만큼 들어갈 거다.”
저…. 정말요…. 이 팀은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팀인가요….
“그래도 우리 팀 선수들은 다른 짓 안 하고 야구만 하잖아. 네가 온 이후로 선수들이 야구만 열심히 하는 문화가 있잖아. 그래서 선배들이 크게 뭐라고 안 하고 예쁘게 봐주고 있는 거야.”
민원 많이 들어온다면서요. 그런데 뭘 예쁘게 봐주어요.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좀 그렇다. 너희들 너무 나대고 있어. 전혀 동료들을 바라봐 주지 않아.”
“네?”
“특히나 어린 선수들. 올해 다들 자기 포텐이 터지면서 야구가 되다 보니까 점점 안하무인이야. 다른 팀들에서 고깝게 보는 눈이 엄청나다.”
애들이 개성이 강해서 그래요. 개성이….
“이따 재규어스 일권 선배 만나면 얘기 잘해. 애들 잘 다독여서 적당히 까불게 하겠다고 말이라도 잘해. 우리가 잘못한 게 맞아.”
뭐…. 문워크는…. 좀 심하긴 했지요…. 타석에서 포수한테 뭐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정안아. 밝은 데서 보자. 또 지하냐?”
“형. 사람들 알아봐요. 야구선수가 술 먹고 돌아다닌다고 기사 나면 귀찮잖아요.”
“시즌 중에 술 얼마나 먹는다고 기사까지 나냐? 맥주 한잔하는걸.”
“형 그래놓고 지난번에 양주 깐 거 기억 안 나세요? 다음날 술 냄새가 3루까지 나더니만.”
“야! 그때는 속상해서. 속상해서 그랬지. 그러고 보니 오늘도 속상하네. 소전아. 너는 술 좀 하니?”
음…. 저 사람…. 나랑 별로 말한 적도 없는데 보자마자 친한 척이야….
“저도 술을 못해서….”
“에잇. 정안이도 안 먹고 소전이도 안 먹고. 나 왜 불렀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혼자 맥주를 야무지게 털어 넣는 재규어스의 주장…. 맥주…. 정말 맛있게…. 먹네….
“형. 우리 애들 좀 그만 맞춰요. 그러다 죽겠어요.”
정안 선배가 본론을 꺼내자 상대의 반응이 험악해진다.
“너희가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사람 신경을 얼마나 긁어놓고 그러냐.”
“형. 그거는 소전이가 해결할게요. 둘이 소통을 안 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지요.”
“소통? 이게 소통의 문제냐? 기본에 관한 얘기지.”
둘 사이에 대화를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는 재규어스의 주장
“어이~ MVP 양반. 야구 좀 하면 선배들 무시하고 그래도 돼? 이제 3년 차, 4년 차 XX들이 나이 먹어서 빠른 공 못 던지냐고 그래도 되냐고. 병석이 같은 투수만 매일 나오면 4할은 치겠다고? 애들이 다 죽여버리겠다는 게 간신히 말렸다.”
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선수들이 그랬다고? 자기들하고 10년 차는 넘는 선배들한테?
“경기중에 좀 이겨보겠다고 발악한 건데 이해해 주세요. 가서 적당히 하라고는 얘기하겠습니다.”
“야! 발악은 무슨. 너희 요즘 너무 싸가지가 없어. 너야 원래 야구 X같이 하는 거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예의까지 없진 않잖아. 그런데 너네 어린 XX들은 개념 자체가 없다고.”
복잡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형 내 잘못이야. 내가 애들을 못 가르쳐서 그래. 이번 기회에 둘이 자주 연락도 좀 하고 서운한 거 있으면 먼저 얘기 좀 하고 그래. 그래서 만나라고 불렀어.”
“그래 네가 문제야 인마. 애들 관리 안 하냐?”
“형. 나 주장도 아닌데 내가 무슨 애들을 관리해. 이제 소전이가 해야지.”
“쟤는 미국 갈 거잖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술이나 드셔.”
미국? 나 미국 간다고? 난 그런 소리 한 적이 없는데
“어쨌든 형. 여기까지만 합시다. 애들은 소전이가 잘 얘기할 거야.”
내가? 뭘…. 애들한테…. 뭘 얘기하지….
“소전아. 너 다른 팀 주장들하고는 얘기 좀 하냐? 너 다른 팀 선수들 연락도 안 한다며? 주장이 그러면 안 된다. 우리가 팀이 몇 개나 된다고 내외하고 그러냐. 그러니까 랩터스 애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는 거야.”
“형 내 잘못이야. 내가 잘 안 알려줘서 그래. 내가 다른 팀도 다 소개 해줄 거니까 이제 마음 놓고 술 드셔. 왜? 혼자 먹으려니 심심해? 누구 불러줘?”
“됐다. 내일 시합인데 뭘.”
이거였구나…. 그래서 정안 선배가 경기만 끝나면 항상 어디로 나돌아다녔구나….
힝…. 나 훈련 언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