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67화 (167/204)
  • 167화. 새로운 시작

    이 팀이 정상이 아닌 건 첫해 트레이드돼서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지경일 줄 몰랐다.

    내 나이 26. 만으로는 24. 프로 5년 차. 속이야 한번 다시 해서 시커멓지만…. 아직 어깨에 노란 병아리를 끼고 다녀도 모자를 파릇파릇한 새싹.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이에게 주장을 맡길 생각을 한다니…. 이놈들은 머리에 생각이라는 게 들어있지 않다.

    “형. 아니 주장 나으리. 오늘 특타는 누구를 대령할까요?”

    “주장형~ 저희 동기들 오늘 일과 끝나고 맥주 마시러 갈 건데 합동훈련 시간 좀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어이~ 소전아~ 아니지~ 주장아~ 형 어깨 안 좋아서 오늘 쉰다고 코치님께 잘 말씀 좀 드려라~.”

    이것들이…. 내가 시키는 건 하나도 안 하면서 나한테 요구하는 것만 산더미고…. 내가 여기 훈련하러 왔지 너희 수발들러 온줄 알아!

    휴…. 코치님한테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형. 펑고 끝나고 바로 4번 그라운드로 오세요. 오늘은 두박스만 쳐요.”

    “끝나고 바로는 안 되고….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아니다. 너 먼저 하고 있어라. 나 바쁜 거 끝나고 갈게.”

    “형. 요즘 왜 그래요? 형 미국 올 때 살쪄서 오더니 진짜 게을러 진 거예요?”

    저…. 멍청한데 보는 눈까지 없는 경준이 녀석. 게을러지다니…. 누가? 내가? 내가 요즘 얼마나 바쁜데.

    “어젯밤에 선일 선배 형수님한테 게임기 걸려서 훈련 끝나고 정환 선배하고 대책 회의 해야 하고, 진혁이는 여기 오기 전에 여자친구한테 뽀뽀 안 해주고 온 거 선물로 때운다고 해서 같이 쥬얼리샵 카탈로그 봐줘야 하고, 루카스…. 하…. 루카스 이 XXX는 훈련기간 동안 여자친구 숙소에서 같이 생활해도 되냐고 해서 운영팀이랑 여자친구 생활수칙 만들어야 하고….”

    “형…. 그게…. 뭔 소리예요?”

    “나도 몰라! 나도 모른다고! 네 눈엔 내가 노는 거로 보이냐! 내가 얼마나 바쁜 줄 알아! 아냐고! 나도 그냥 야구만 하고 싶다! 제발 야구만 하고 싶다고!”

    안 그래도 짜증이 한가득으로 넘치기 직전인데 마지막 짜증 한 방울을 넣어준 경준이. 순간 이성을 잃고 경준이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나니 잠깐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이러려고 야구하는게 아닌데….

    “형…. 진짜 힘들어 보여요. 그런데…. 그건 그거고 우리 필살기 훈련 어제도 못 해서 오늘은 꼭 해야 하는….”

    “야! 한다고! 해! 너 이따 11시에 나와! 나와서 하자! 한박스고 두박스고 해!”

    “형…. 그렇다고 11시는….”

    “나와! 무조건 나오라고! 안 나오면 지옥을 보여줄….”

    도무지 대책이 안 서는 멍청이에게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주장형…. 저…. 저. 지옥을 봤어요”

    뭐…. 뭐야 이 찐따는

    “형…. 미국 오기 전에 여자친구 몰래 소개팅 했는데 걸렸어요…. 둘이 홍대 앞에서 머리 잡고 싸웠다는데…. 한국 들어갈 수 있을까요? 으…. 형…. 지금도 전화 와요….”

    미…. 미친놈…. 도대체 이 팀엔 왜 이런 것들만….

    “야! 소전이형이 살면서 만난 여자가 형수님 하난데 양다리 걸치다 걸린걸 물어보면 어떡해!”

    자… 잠깐… 뭐? 우선 형수는 누구고? 양다리는 왜? 내가 TV에서 본게 얼만데?

    “경준이형…. 작년엔 이런 문제 있으면 주장한테 물어봤단 말이에요…. 소 전 이형…. 어쩌면 좋죠? 저 한국 가면 죽을지도 몰라요”

    이것들이 쌍으로 미쳐가지고! 이것들을 여기서 묻어도 되나? 국적이 한국이니까 한국에 가서 묻어야 하나?

    “경환아…. 대기표 뽑고 오지 않을래? 오늘은 형이 먼저 받은 손님이 많아서 말이야. 음…. 보자…. 오늘은 안되고 내일도 동수 선배하고 응규 선배 방 벽에서 귀신 소리 들리는 거 확인하고…. 그래 내일 8시. 8시쯤에 이 얘기를 심도 있게 해볼까?”

    “형…. 저…. 일분일초가 지옥인데요….”

    “내일 8시까지 얌전히 기다릴래? 아니면 지금부터 내일 8시까지 신나는 펑고를 받으면서 기다릴래?”

    “내일 8시에 다시 오겠습니다!”

    일분일초가 지옥? 난 들숨과 날숨에도 지옥이다.

    * * *

    “감독님 부족한 부분은 없으세요?”

    “하하. 항상 부족한 부분이야 잔뜩이죠. 말하면 지원해주시나요?”

    “돈으로 해결 가능한 거면 얼마든지요.”

    “돈으로라…. 항상 말썽이 있는 부분은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죠.”

    이역만리 타국에서 다음 시즌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단장이 감독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지난 시즌 우승을 했음에도 항상 지원에 목말라하는 이기적인 감독에게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단장이 뭔가를 더 해주고 싶어 하지만 돈으로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가슴 한쪽을 무겁게 누른다.

    “우리 3루는 어떻게 메울까요? 트레이드는 지금도 세팅되어있어요.”

    “트레이드…. 우리 팀에 맞는 3루수가 있을까요?”

    “수비만이라면 가능해요. 아니면 차라리 수비를 포기하고 유격수 김소전에게 부담을 더 주는 방법도 가능하고요.”

    FA가 된 주전 3루수를 잡지 못하고 있는 단장이 구단 프런트직원들을 갈아 넣으면서 대책을 만든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보려고 이런 수 저런 수를 다 끄집어내지만 워낙 선수 풀이 한정적인 KBO리그에서 다들 아는 뻔한 수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보이진 않는다.

    “그 녀석 올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기다리죠.”

    “그래도 준비는 해야죠. 만에 하나라도 잘못될 수 있으니까요”

    “그럴 거면 벌써 다른 팀 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왜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정말로 이해가 안 돼서 답답해하는 단장에게 감독이 덤덤하게 이유를 설명한다.

    “이 팀에서 자기의 역할을 못 찾는 거예요.”

    “역할을 왜 못 찾아요. 우리 팀에서 애지중지 키운 선수예요. 구단이 예뻐하고 팬들도 사랑하는 주장이 역할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감독이 한숨인지 웃음이지 모를 소리를 내고는 말을 잇는다.

    “아닌 척하지만 누구보다 팀에 헌신적인 게 정안이였습니다. 신인 때부터 구단 일이라면 모든 걸 쏟아부었던 녀석이에요. 그때 우리 팀은 우승은커녕 가을야구라도 한번 못 갈 때였는데 그때부터 자기가 우승시키겠다고 설치고 다닌 놈이에요.”

    “알죠. 그걸 모를까 봐요.”

    “그랬던 팀이 우승하는 팀이 됐어요.”

    “그러니까 더 잘해야지요.”

    “처음엔 그래서 잘했잖아요.”

    감독의 목소리가 차분해진다.

    “그럼 지금은 왜 그런데요.”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김소전때문이라고.”

    “그게 말이 돼요!”

    “그놈한테는 돼요. 팀만 잘되면 다 좋은 거라고 진짜로 믿고 있던 놈이니까 그게 말이 돼요.”

    “그렇게 됐잖아요! 팀도 잘되고 본인도 잘되고!”

    감독이 어린 단장을 타이르듯 이야기를 계속한다.

    “사람이 그런 게 아니에요. 팀만 잘되면 다 좋은 거로 생각하지만 결국엔 자기가 잘했다고 인정받고 싶은 게 큰 거예요. 지금 랩터스가 가장 빛나고 있는 시간이에요. 그 빛나는 시간에 가장 밝은 별이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이 표현되는 겁니다. 그리고 절대 자기가 가장 밝아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아 몰라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라정안 언제까지 기다려요?”

    “조금만 기다려보시죠. 놀 만큼 놀다가 올 겁니다.”

    * * *

    남들에게 눈칫밥 먹으면서 구박이나 당해봤지 내가 세상의 중심에 들어와 본 적이 없어서 인싸가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

    도무지 이 팀의 선수들은 자기 혼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건가? 세수하고 밥 먹을 때도 손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는가? 이 사람들은 도무지 나이를 어디로 먹은 것인가?

    야구선수가 이렇게 힘든 건 줄 알았으면 나 야구 안 했다. 축구했다.

    “주장형~ 탕수육 떨어졌어요.”

    “소전아~ 트레이닝팀에 동전파스 일제로 준비해 주면 안 되냐고 건의 좀 해라~.”

    “주장형~ 감독님이 전달사항 있다고 오시래요~.”

    사…. 살려줘…. 스프링캠프는 운동하는 거라고 했는데…. 난 운동 언제 하냐….

    언제나처럼 하루종일 스프링캠프장 여기저기 끌려다니다가 어느새 훈련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훈련파트를 마치고 삼삼오오 락커로 몰려오는 선수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땀으로 흠뻑 젖은 유니폼을 갈아입는 와중에도 주장에게 쓸데없는 주문이 쏟아진다.

    “주장형~ 여기 이온 음료 떨어졌어요~.”

    “소전이형~ 여기 물도 같이 떨어졌어요~.”

    으…. 진짜…. 이것들을….

    “야! 그런 건 좀 알아서들 해! 옆에 생수통 있잖아! 그거 거꾸로 끼우기만 하면 되잖아! 알아서 좀 해!”

    내가 엄마도 아니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소리를 쳤을 때 정수기 옆으로 누군가가 쓱 나타나 아무렇지 않게 생수통을 갈아낀다.

    “어…. 어…. 주장….”

    “주장이 너희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이야! 사람이 좋으니까 만만해 보여? 매니저 형한테도 안 시킬 걸 시키고 XX이야!”

    “주장…. 언제 계약했어요? 여긴 언제 왔어요?”

    “주장은 내가 아니고 저기 김소전이가 주장이고. 난 뒷방에서 조용히 있을 테니까 신경 거슬리지들 말아라. 지금처럼 주장한테 막하는 놈들 있으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이 캄캄한 암흑 속에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역시…. 내가 막살지 않았어. 주장…. 왜 이제 왔어요….

    “주장 언제 왔어요?”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목소리가 두 톤이나 높아진 상태로 주장에게 뛰어갔다.

    “내가 왜 주장이야 네가 주장이지 이 등신아! 그따위로 멍청하게 굴어서 여기 선수들 끌고 갈 수 있겠어? 내가 이 꼴 보려고 랩터스 다시 온줄 알아?”

    주…. 주장…. 왜 그렇게 무섭게….

    “다들 잘 들어 내가 확실히 얘기하는데 나 FA 계약조건이 주장 은퇴하는 거야. 그런데 만약 선수들이 랩터스의 김소전주장을 X같이 보고 깽판 치다가 내가 다시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다들 각오해!”

    그래…. 주장은 저런 사람이 해야지…. 저런 사람이 주장을 해야 팀이 잘 돌아가는데…. 왜 내가…. 이런 험한 일을 맏아서…. 슬프다….

    * * *

    - 야구팬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야구가 없어 더욱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꽃이 피는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잠실에서 보내드리는 2030시즌 개막전. 지금 시작합니다.

    살면서 가장 정신없던 시간. 야구공이랑 이야기하면 했지, 사람과 이야기하기가 싫어지던 시간들. 그 고난의 시간을 극복하고 평 선수에서 주장이 되어 다시 잠실에 돌아왔다.

    나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전임 주장의 소소한 도움으로 겨울의 춥고 긴 어둠을 이겨낸 랩터스. 이번 시즌도 우리는 승리를 위해 달려 나가 우승 트로피를 다시 들어 올린다! 가즈아~.

    - 랩터스 이번 시즌도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즌 전 전력이 한층 강화됐다고 평가받는 폭스의 강타선을 상대로 선발 그레이슨 선수가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어내면서 경기를 시작합니다.

    - 랩터스 대단해요. 지난 시즌 리빌딩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시즌 개막전부터 우익수 오태수 선수를 과감히 기용하고 있거든요. 우승팀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쉽지 않은데 과감해요.

    우리 팀이 봄에는 강하다고 하지만…. 이번 시즌은 진짜 다른 것 같은데? 1회 초 수비만 했는데도 왜 질 것 같지 않지?

    - 1회 말 랩터스의 공격. 1번 타자 루카스 선수입니다.

    - 지난 시즌 중반부터 육성형 용병에서 정식 선수가 된 루카스 선수죠. 상대 투수에 따라 플래툰으로 기용되던 선순데 오늘은 우투수를 상대로도 1번으로 나왔어요.

    - 지난 시즌 기록을 보면 좌투수 상대로는 3할 우투수 상대로는 2할 2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타격폼자체가 좌투수를 잘 공략하는 자세거든요. 우투수에 대한 고민이 있는 타자였는데 비시즌에 어떤 보완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드디어 감독이 정신을 차렸는지 발 빠른 똑딱이를 1번에 넣는 정상적인 라인업을 짰다. 다만 지금 1번에 들어간 똑딱이가 우완투수를 상대로는 바보라는 게 좀 걸리긴 하는데…. 감독이 생각이 있겠지…. 설마….

    - 루카스의 타구! 내야를 빠져나갑니다.

    - 빗맞았는데 코스도 좋았고 공이 끝까지 살아나갔어요.

    - 작년보다 타구의 질이 좋아진 모습입니다.

    - 타격하는 거 보시면 작년과는 다르게 끝까지 폴로 스루를 해주고 있거든요. 저 차이로 타구 속도가 좋아진 것 같아요.

    오호. 새 시즌 첫 타석부터 1루에 주자를 놓아주다니…. 이런 기쁜 일이.

    - 랩터스의 2번 김소전입니다.

    - 1번에서 2번으로 자리를 옮긴 김소전이죠.

    - 현대야구에서는 가장 강한 타자가 2번에 들어가는 게 생산성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렇죠. 이번 시즌 2번에 고정될 것으로 보이는 김소전이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돼요.

    발 빠른 주자가 1루에서 투수의 신경을 계속 건드린다. 나를 바라보면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1루에 자꾸 시선을 뺏기는 투수…. 내가 만만한가… 공좀 던지지….

    - 투수 다시 발 풀어봅니다.

    - 루카스 선수의 움직임이 좋아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보름 후에 여자친구가 한국에 들어온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가 저놈…. 1루에서 춤을 추네.

    - 올리버의 초구! 타자의 배트가 돌았습니다! 쭉쭉 뻗어가는 타구!

    - 갔어요.

    - 크다! 크다! 크다! 좌측담장~ 넘어갑니다.~ 선취 투런홈런으로 2030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김소전! 첫 타석부터 지난 시즌 MVP가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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