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특별훈련 (2)
“소전아 너 살이 좀 쪘다?”
“시즌 끝나고 게을러졌나 봐요.”
“네놈이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올해는 처음부터 안 봐줄 테니까 죽었다고 생각해라.”
시즌이 끝나고 귀인을 만나 일주일간 좋은 음식을 원 없이 먹다 보니 몸 관리에 소홀했다.
먹으러 다니면서도 최소한의 운동은 꾸준히 했는데 그 정도로는 부족했나 보다. 미국에서 같이 훈련할 메이저리거께서 슬쩍 보고도 몸 상태가 엉망인 걸 바로 지적한다.
반성하고 죽어라 운동에 매진해야 한다.
언제나처럼 미국에 차린 훈련캠프. 작년과 마찬가지로 우리 팀에서 같이 뛰던 뉴욕의 10승 투수와 우리의 훈련을 수발할 노예까지 데리고 완비하고 훈련을 시작한다.
타격담당의 라타코치와 피칭 디렉팅을 하는 버디 코치가 시즌 내내 고민하면서 만든 훈련프로그램. 야구 실력은 별개로 훈련에 임하는 태도 자체는 전 세계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학생들이 첫날부터 진심으로 훈련에 임한다.
“형…. 전 진짜 안되는 것 같아요. 이게 맞는 거예요?”
정규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수업을 잘 따라가는데 도련님들 수발들 노예가 자신의 멍청함을 뽐내며 진도를 따라오지 못한다.
아무리 해도 몸에 익혀지지 않는 라타코치의 타격이론…. 작년에도 하다 하다 포기하고 기존의 폼으로 돌아갔는데…. 올해도 딱히 잘할 것 같지 않다.
“그게 안 돼? 넌 더 단순하게 하자고 하잖아. 힘 빼고 고개만 고정하라니까. 체중만 앞발로 이동시키면 네 파워는 충분하니까 머리만 고정시키고 컨택만 해. 그게 안 돼?”
“안 돼요.”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지. 열정 넘치는 코치님이 매일같이 1:1로 달라붙어 만져주는데도 안 되는 멍청이…. 서로 힘만 쓰고 기분만 상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네가 지금처럼 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지금 폼으로 이시윤 선배 공 같은 건 이겨내기 힘들잖아. 타구에 더 힘을 실어주려면 결국 공에 체중을 실어서 때려야 한다고. 그건 이해하지?”
“이해하죠.”
이해한다고는 하는 데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경준이…. 이놈을 어째야 하나.
“결국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선수가 되려면 라타코치의 말이 맞잖아. 그러니까 더 연구해보자.”
“형 그런데 말이죠.”
음….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구나….
“그런 공을 꼭 쳐야 해요?”
“어?”
“좋은 투수의 좋은 공을 꼭 쳐야 해요?”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가 한 경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좋은 공 하나치고 시즌을 망치는 것보다 차라리 안 좋은 공을 놓치지 않고 다 때려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놈이 지금 제정신인가?
“우리가 시즌을 치르는 이유가 뭐냐?”
“네?”
“우리가 1년에 144경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시즌이 144경기니까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144경기 왜 하느냐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의 학습 부진아. 이래서 머리 나쁜 애들은 데리고 다니기 힘들다.
“우리가 144경기 하는 이유가 가을에 야구하고 마지막에 우승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렇죠.”
“시즌 중에 3할 치는 건 안 좋은 투수들 공 때려서 3할 칠 수 있어.”
이정도는 이해하는 멍청이
“그런데 가을에는? 너 가을에 안 좋은 공 본 적 있어?”
“음…. 상대 팀이 경기 버렸을 때?”
“야! 그건 전략적인 거고!”
잠깐이나마 얘가 내 말을 알아듣나 생각했던 생각에 반성한다.
“경준아. 우리가 결국 우승하려면 포스트시즌에 좋은 투수의 결정구를 칠 수 있어야 해. 그러려면 이시윤 선배 공을 기준으로 잡고 힘으로 이겨내야 하지 않겠냐? 그러면 한국시리즈 7차전에도 이겨낼 수 있다….”
노력이 부족한 멍청이에게 이렇게 쉽게 설명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충격적이다.
“형. 그건 형이니까 가능한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요 시즌 중에 3할만 치면 좋은 선수예요. 시즌에 기록한 성적으로 계산하는 연봉 고과가 한국시리즈에 계산되는 것보다 많아요. 그러면 한 시즌을 잘 보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 슬프다. 이놈이 이렇게 도전정신이 부족할 줄이야. 저 좋은 몸으로 이시윤의 공의 넘어설 생각을 안 하는 거지? 내가 저 몸이면 이시윤을 넘어 임수검도 넘으려고 해볼 텐데….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타격은 정진효 코치님이랑 얘기해 봤는데 그냥 지금폼을 더 가다듬는 게 어떤가 해요. 스프링캠프 때 보폭에 대해서 고민해보려고요.”
하…. 이런… 구단주형이 라타코치님 수업료가 엄청 비싸다고 그랬는데… 뒷목잡으시겠네….
“그래.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그렇다고 치고. 그럼 너 여기서 두 달 동안 뭐할 거야?”
“그래서 말인데요….”
헐…. 이런… 신박한 놈….
“진짜? 제정신이지?”
“형도 그랬잖아요. 한국시리즈에서 좋은 투수의 좋은 공을 이겨내야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그게 이런 식은 아니지….
“그냥 때려서 이겨내자.”
“물론 때릴 땐 때릴 거에요. 그런데 정 안될 땐 필살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필살기에요.”
필살기치고는… 좀…. 없어 보인다.
“형 도와줄 거죠?”
“내가? 내가 도와줄 게 뭐가 있어?”
“왜요. 형이야말로 이 분야 스페셜리스트잖아요.”
“요즘은 잘 안 하는데….”
“에이. 형이 최고예요. 좀 알려줘요”
이제 그런 구질구질한 생활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놈 때문에 옛 기억을 끌어내야 한다니…. 슬프네.
‘툭’
“뭐하냐?”
“선배 공이 너무 좋아서요. 좀 흔들어보려고요.”
“야! 이 비겁한 XX야! 정정당당히 해! 이런 잡기술은 어디서 배워온 거야!”
“선배 승부의 세계에 정정당당히 가 어디 있어요? 이기는 게 장땡이지.”
미국 캠프의 일정은 단순하다. 10시부터 선수들이 알아서 코치님이 짜준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나머지 시간엔 알아서 개인 훈련을 하거나 쉬거나.
하지만 이 정신 나간 과외생들은 보통 3시 이전에 코치님의 미션을 끝내고 5시까지 자율 훈련을 하고 저녁밥을 일찍 먹고 선수 셋이 실내훈련장에서 조금 떨어진 야외 그라운드에 모인다.
그리고 시작하는 실전 대결.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상식은 들은 척도 안 하는 메이저리그 10승 투수와 KBO리그의 허접한 타자 둘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실전보다 더 빡센 승부를 펼친다.
어제까지는 뱀처럼 살아 움직이는 공을 온 힘을 다해 풀스윙으로 때려내던 KBO 국가대표 유격수가 난데없이 번트를 댄다.
번트 따위는 눈곱만큼도 머릿속에 넣어두지 않았던 투수가 발끈해 소리를 지르자 정면승부를 포기하고 치사하게 꼼수를 부린 타자가 뻔뻔하게 번트가 어떠냐며 대든다.
신성한 야구에 치졸한 사파의 무공을 목도한 투수가 한층 더 불타오르면 다음 공을 던진다.
“번트 댈 수 있으면 대던가!”
투수의 손끝에서 쏘아진 불덩이가 타자의 눈을 향해 날아든다. 아무리 타자가 강심장이어도 자기의 얼굴로 날아드는 공에는 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법. 정상적인 타자라면 피하거나 몸이 움츠러들면서 번트를 대기 어려운 미친 공을 마주한 타자가 몸을 1루 쪽으로 돌려 달려나가면서 배트를 반대쪽으로 대고 툭 밀어버린다.
타자를 죽여버리겠다고 던진 공이 3루 라인을 따라 흐르는 걸 본 투수의 눈이 이글거린다.
어차피 연습인지라 1루까지 달리지는 않고 스타트까지만 수행한 타자. 라인을 타고 흐르는 공을 보더니 아쉬움을 표현한다.
“아. 더 멀리 나가야 하는 데 공에 밀렸네.”
“야! 다시 해봐”
“에헷. 다시라니요. 기습번트는 계속하면 안 돼요.”
“기습이고 뭐고 다시 해봐.”
“에헷. 이제 경준이 순서에요. 경준아 너 차례야. 마스크 내놔.”
타자와 포수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마운드를 거닐면서 황소 같은 숨을 뿜어낸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공 하나만 더 봤으면 내 머리로 날아왔다….
“형.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번트에요?”
“봤잖아.”
“몸쪽에 바짝 붙는 공을 반대쪽으로 어떻게 밀어요? 보면서도 못하겠어요.”
내가 남들 홈런 친다고 타격 연습할 때 홀로 연습한 기술이다. 이런 고급기술이 한 번에 될 것 같냐?
“처음부터 잘할 생각 하지 말고 우선은 정확히 안으로 굴릴 생각만 해. 그러다 조금씩 타이밍이 잡히면 각도를 꺾는 거야.”
“그게 말이에요? 그게 되면 제가 번트로 100안타씩 치겠어요.”
내가 해봤는데 100안타는커녕 1년에 안타 40개치고 빡셌다.
“야. 준비해라. 이시윤 선배 눈 돌아갔다.”
“형 무서워요.”
“나도 무섭다.”
타자가 대충 타석에 들어가자 투수가 말도 없이 투수판을 밟고 타자를 노려본다.
나랑은 번트를 대겠다고 합의를 했지만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투수. 정상적인 타격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는 타자를 향해 크게 와인드업을 하면서 꽉 잡은 공에 힘을 더한다.
‘붕~’
크게 돌리는 경준이. 투수에게 일말의 의심을 주지 않기 위해 사전에 약속된 대로 크게 헛스윙을 돌리자 그걸 본 투수가 살짝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음…. 무서운데….
타자의 다음 동작을 알고 있는 내가 150을 넘는 직구를 받아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다른 이유로 더 정신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기분이 조금 풀린 투수가 다시 투수판 위에 올라서서 크게 와인드업을 가져간다.
‘퍼퍽’
“악~”
으이그…. 이래서 재능 없는 것들은 운동시키면 안 되는데…. 하여간 이놈은 답이 없다.
“괜찮냐?”
“으…. 죽을 뻔했어요.”
“공을 보고 대야지! 어디 맞았어?”
“으…. 어깨요…. 어디 부러진 건 아니겠죠?”
“너 말하는 거 보니까 멀쩡하네…. 우선…. 도망가.”
몸쪽에서 살짝 솟아오르는 직구에 번트를 댄 경준이. 공의 믿둥에 배트를 잘못 맞은 타구가 살짝 터서 타자의 어깨를 때렸다.
자기가 댄 타구에 맞고 아프다고 땅에 쓰러진 타자. 오늘의 포수역을 맞은 내가 가서 살펴보는데 어디 크게 다쳐 보이진 않는다.
문제는…. 늦었다. 저 사람…. 저 사람이 달려온다.
“너희 뭐 하는 짓이야!”
엄살 많은 경준이가 타석에서 채 일어나지도 못한 사이 투수가 마운드에서 쿵쿵쿵쿵 뛰어왔다.
“저….”
“장난해! 내공이 우스워?”
으이그…. 도망가라니까…
“저. 선배…. 그게 아니고….”
“너희 그따위로 할 거야! 훈련이 장난이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제 말 좀…. 들….”
“뭐! 네가 제일 문제야! 김소전이 너 내공 좀 친다고 기고만장해서 별 장난질도 치는데! 제대로 해! 내가 널 배트도 못 잡게 해놓겠어!”
이게 무슨 헛소리야! 치긴 뭘 쳐. 우리 둘을 상대하면서도 혼자 압도적인 사람이 누군데.
“선배. 무슨 그런 얘길 하세요. 연습할 때 타율 2할 5푼도 못 칠 거 같은데요.”
“2할 5푼! 이것 봐. 나를 아주 X으로 보는 거지! 내가 다 계산하고 있어! 너는 2할! 저 멍청이는 1할! 내가 지금 그거 지키느라 얼마나 힘든데! 너희 둘 더러운 수로 내 목표를 깨고 있다고!”
2할이었어… 못 치는 줄은 알았지만 2할이었다니…. 그나저나…. 그걸 계산하고 있는 저 사람은 뭐야….
“선배. 우리 실전처럼 하기로 했잖아요. 지난 시즌 선배한테 적응한 타자들이 계속 정정당당하게 맞대결해 줄 것 같아요?”
“뭐!”
“생각해 봐요. 이제 선배 분석도 끝났을 것이고 별별 치사한 작전 다 가져올 건데 저희한테 먼저 예방주사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그 정도는 해야 메이저리그에서 오래 있지 않겠어요?”
살고 싶어 떠들었는데…. 역효과가 나나…. 저 사람의 표정이 더 험악해진다.
“흥. 분석은 무슨. 어디 해봐라. 그깟 개수작 내가 다 때려 부숴주마!”
이래서…. 투수들은 상종하면 안 돼….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자기 혼자 소리를 지르던 투수가 씩씩대면서 마운드로 올라간다.
오늘도…. 이 대결…. 밤새우게 생겼네….
* * *
“방금 LA팀 스프링캠프장으로 가는 비행기 탔어요.”
“그게 중요해!”
“그럼 뭐가 중요해요? 김소전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봐요.”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 남녀. 여자가 남자가 궁금할 만한 사실을 알려주지만, 남자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조 단장! 넌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아. 진짜 또 그 얘기네.”
“지금 내가 안 하게 생겼어!”
“라정안이 계약 안 해주는 걸 왜 내 탓을 해요. 자기가 랩터스랑은 가장 마지막에 얘기하겠다는데!”
남자가 가지고 있던 아끼는 소중한 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뺏길 위기에 처하자 요즘 계속 심기가 불편하다.
여자가 최대한 지켜보려 하지만 여의치가 않은 사항. 둘 다 그리 기분 좋지 않은 나날이 계속된다.
“진짜 왜 그러는 거야? 돈으로 눌러봐.”
“라정안도 돈 많아요. 결혼도 안 하고 혼자 벌어 쓰는 데다가 구단에서 자산관리 해줬잖아요. FA 안하고도 먹고살 거는 벌었을 거예요.”
자기가 직접 운영하는 사모펀드의 특별고객임을 인지한 남자가 기분이 더 나빠진다.
“라정안 다른 팀 가기만 해봐! 내가 뒤통수쳐 버릴 거야!”
“하여간 사람이 쪼잔하기는….”
“야! 쪼잔하다니!”
“쪼잔하잖아요. 뭘 뒤통수를 쳐요. 그간 팀에 헌신적으로 뛰어준 선수한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마음 씀씀이하고는….”
여자의 힐난에 남자가 성질을 낸다.
“야! 누구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나보다 네가 더하잖아!”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선수들한테 사랑받는 단장인데?”
“풋. 올겨울에 들은 가장 웃긴 얘기였어.”
전화를 사이에 두고 양 당사자의 전투력이 계속 높아만 진다.
“그래서 라정안 진짜 우리랑 계약 안 하겠대?”
“엘리펀츠가 4년 60억을 불렀는데도 도장을 안 찍고 있어요. 그건 뭐…. 안 가겠다는 거지요”
“그럼 왜 우리랑은 도장 안 찍어?”
“우리 팀에선 이룰 게 없다잖아요.”
“그럼 왜 다른 팀 안가?”
“우리 팀이 좋다잖아. 진짜 바보도 아니고.”
“야 누구한테 바보래!”
오랜 커플의 밤이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