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결승전의 시작
- 전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12팀이 모였습니다. 그중에서 살아남은 두 팀. 야구의 종주국이자 세계 최고의 리그를 운영하고있는 미국과 지난 올림픽 가장 높은 곳에서 태극기를 휘날린 대한민국. 지금 시작됩니다.
- 우리가 슈퍼라운드에선 졌지만, 야구공은 둥글어요. 야구 모르죠.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야구를 하는데 기세라는 게 있다. 실제 실력이 얼마나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무조건 될 것 같은 기운. 그런 게 있으면 꼴찌팀도 1등 팀을 잡을 수도 있고 대학팀이 프로 2군도 잡을 수 있고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기세를 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법. 전국대회를 쌈 싸 먹는 중학교팀이 프로를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저 마운드의 저놈은…. 프로 중의 프로다.
- 미국팀의 선발 데이비드 선수입니다. 이번 시즌 17승 5패 평균자책점. 2.24를 기록한 우완정통파 투수입니다.
- 데이비드 선수. 올해 운이 안 따랐는데도 성적이 좋죠. 팀 타선이 도와줬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타석에서 바라보는 투수. 키도 크고 훤칠하게 생긴 게 참…. 마음에 안 든다. 잘생긴 놈들은 무조건 나쁜 놈들이다. 무조건 그런 거다.
- 미국에 좋은 투수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더 좋은 타자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1번 타자 김소전입니다.
- 이제는 말이 필요 없는 타자죠. 이번 시즌 우승팀인 랩터스의 중심이자 이번 대회에서도 33타석 15안타, 홈런 4개 도루 6개를 기록 중이거든요. 지금 김소전은 막을 수가 없는 선수예요.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고…. 저놈 공을 치긴 쳐야 하는데…. 아까부터 연습 투구하는 거 아무리 지켜봐도 저공 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명히 투수에게 야구공을 쥐여 줬을 텐데 던지는 건 쇳덩이. 그냥 쇳덩이도 아니고 회전이 빡 걸려서 쉭~ 소리를 내면서 들어오는 쇳덩이…. 저거 잘못 쳤다가는 내 손목이 박살 날 거야….
- 말씀하신 대로 이번 대회 김소전의 기록 경이롭습니다. 타율이 4할 5푼에 출루율이 5할이 넘습니다. 출루율과 장타율을 합한 OPS는 1.49를 기록 중입니다. 가히 이번 대회 최고의 선수라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 그러니까 해외 스카우터들이 김소전을 쫓아다니는 거 아니겠어요? 해외 진출을 위한 포스팅이 2시즌 남았거든요. 다음 시즌, 그다음 시즌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애가 탈 거에요.
타석에서 공을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섭다. 그래서 괜히 타석에 들어가기 전에 3루 코치를 바라봤다. 아무 짓도 안 하고 멍때리시던 코치님이 내 눈을 보고 급하게 말도 안 되는 사인을 내기 시작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몸짓. 1회 초 선두타자에게 사인 낼 게 뭐 있는다고 저런 요란한 짓을…. 국가대표 감독이고 코치고 다들 현역이 아닌 집에서 놀고 계시던 양반들을 데리다 놓으니 감이 떨어지셔서 그런가…. 개그만 늘어나시네….
- 김소전 타석에 들어오면서 경기가 시작됩니다.
- 미국도 대한민국 공격의 시작이 김소전부터 시작되는 걸 알고 있어요. 지금도 보세요. 김소전을 대비해서 극단적인 시프트를 펼치고 있죠. 얼마나 정교한 플레이가 나오는지 봐야겠어요.
나쁜 놈들. 3루 코치님이 저렇게 현란한 비보잉을 보여줬는데 신경도 안 쓰고 수비수들이 죄다 우측으로 몰려갔다.
내 타구 방향이 중견수를 기준으로 우측으로 쏠리는 걸 모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1번 타자고 발도 여기 가서 빠지는 발이 아닌데 3루수가 2루 베이스 뒤에 수비위치 잡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기분 확 나쁘네.
- 데이비드 선수의 초구. 스트라이크입니다. 대한민국을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기록하는 미국. 대한민국의 김소전 초구를 지켜만 봤습니다.
- 김소전선수가 1번 타자답지 않게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배트를 내는 스타일인데 이번 공 지켜봤어요. 아무래도 데이비드 선수의 공이 낯설죠. 초구 지켜보면서 공을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확실하다. 이 공 잘못 건드렸다가는 손목 나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사람이 진짜 이런 공을 던져도 되나? 얘는 이런 공을 몇 개까지 던질 수 있는 거지? 얘보다 잘했다는 임수검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거야….
- 김소전 타임을 부릅니다.
- 뭔가 루틴이 안 맞았던 모양이죠. 타자가 타석에서 불편함을 느끼면 이렇게 타임을 걸고 나와도 좋아요. 아주 영리한 플레이에요.
키 크고 잘생긴 놈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기도 전부터 이를 앙다물고 노려본다. 메이저에서도 최상급투수라는 놈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보일 정도로 크게 손이 올라가는 와인드업. 어쩐지 저놈 신경을 건드려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 손을 번쩍 들면서 타임을 외쳤다.
투수가 앞발을 들기 직전에 주심이 받아준 타임. 투구동작에 들어가려던 투수가 대놓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다. 뭐 기분 나쁜 건 나쁜 거고 어쩌라고 심판도 타임 받아줬는데 뭐 어쩌라고.
- 김소전 타석에서 잠시 벗어나 스윙을 해봅니다. 부담감이 있어 보입니다.
- 우리 입장에서도 김소전이 출루를 해줘야 공격의 실마리가 풀리거든요. 김소전 선수 할 수 있습니다. 힘으로 붙어도 이겨낼 수 있는 선수예요.
시간을 끄는 김에 더 끌어봤다. 괜히 타석에 나와 몸도 한번 풀어보고 타석에 들어가서도 잘 정돈된 땅을 괜히 파헤쳐보면서 고르기도 하고…. 주심이 타격 준비하라고 손짓할 때까지 난동을 부려봤더니 내 뒤의 포수가 F 워드를 섞어가며 뭐라고 뭐라고 지껄인다.
다른 건 몰라도 욕은 확실히 알아듣기에 고개를 돌려 포수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나는 포수. 덩치가 산만한게 고릴라같이 생긴 얼굴을 내 눈앞에 디민다. 절로 깔려 내려가는 눈…. 저놈을 마주 보고 싶은데…. 왜 눈이 안 올라갈까….
- 타자와 포수 간의 신경전이 있습니다.
- 주심이 막아서지요. 오늘 주심 캐나다 주심인데 경기 운영 잘하는 것 같네요.
- 양 선수 주심에게 주의를 받고 떨어집니다.
- 미국 선수들도 김소전 선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거든요. 김소전 선수 이렇게 말려들면 안 됩니다.
살았다. 심판님이 살려주셨다. 나를 요단강 입구에서 구원해주신 심판님이 고릴라와 나에게 조심하라고 영어로 주의를 준다. 여전히 나에게 눈을 부라리기는 하지만 주심의 주의에 다시 마스크를 쓰는 포수. 포수는 조용히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잠깐이나마 겁먹은 게 억울해서…. 조금 더 선을 넘어본다.
- 김소전 선수 다시 배터박스를 고르고 타격 준비를 합니다.
- 타석이 편해야지요. 조금 불편한 게 있으면 확실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장갑도 다시 풀었다 껴볼까 생각을 했지만, 뒤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 포기했다. 절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쟤 숨넘어갈까 봐….
- 포수가 화가 많이 났습니다. 두 팔을 들어 주심에게 항의하는 것 같습니다.
- 포수 필립 선수. 장단점이 명확한 선수죠. 타격에서는 팀의 중심타선에 들어갈 타격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수비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는 선수예요.
- 그렇습니다. 이번 시즌 도루 저지율이 2할 1푼밖에 되지 않습니다.
- 포수를 도루 저지율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경기중에 쉽게 흥분하는 모습을 가끔 보여주기도 하거든요. 김소전 선수가 포수의 약점을 제대로 찔렀어요
공 하나 던질 동안 타자와 포수와의 신경전이 치열해지자 수비수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보인다. 가뜩이나 시프트를 건다고 자기 위치에서 훨씬 멀리까지 움직인 선수들의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볼까?
- 김소전! 공을 꺾어놓습니다.
- 3루 텅 비었죠.
- 라인을 타고 흐르는 공!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공이 흐릅니다.
- 이거~ 이거~ 2루 가겠는데요~
- 타자주자 김소전 2루까지 달립니다.
- 시프트를 이렇게 깨버리네요.
- 번트를 대고 2루까지 들어간 김소전! 프리미어12 결승전 대한민국의 첫 안타 2루타로 기록합니다.
- 김소전 선수가 시프트에 번트 대는 거 처음 봤습니다. 이를 갈고 나왔네요.
보면 볼수록 뻥 뚫린 좌중간. 지금까지는 아무리 좌중간이 열려있어도 어지간한 공이면 세게 때려서 담장을 넘겨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지만, 오늘 저 공은 아니다.
저거 실투가 아닌 이상 억지로 잡아당겨 봐야 빽빽한 수비 범위 안에 들어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올라온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아직도 부족하다. 이번 겨울엔 저 공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한다.
노력은 노력이고…. 당장 저 공을 해결을 해야 하기에 항상 머릿속에 그려왔던 상상을 실현해본다.
좌타자를 맞아 우측으로 잔뜩 옮겨 놓은 수비수. 그리고는 몸쪽으로 바짝 붙어오는 커터. 이걸 억지로 잡아당겨 봐야 배트가 부러지거나 2루수 땅볼.
그걸 피하려면 임팩트 시 손목을 써가면서 살짝 들어줘야 하는데 저 공 정타도 때려내지 못하면 오히려 공 윗부분 때리면서 내야땅볼만 적립.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선택한 3루로 푸시 번트. 평소보다 앞발을 더 뒤로 빼면서 3루로 때린다는 느낌으로 강하게 밀어준다. 실전에서 번트 몇 번 대지도 않지만 그래도 번트 하나는 내 DNA에 절대 지워지지 않게 새겨져 있다.
라인인 안쪽으로 예쁘게 떨어지는 타구. 이 이후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니 뒤도 안 보고 죽어라 달린다.
1루로 다가가면서 1루 코치님을 바라본다. 코치님의 손이 2루를 향하고 나도 코치님만 믿고 타구는 보지도 않고 2루를 향해 1루를 크게 돈다.
내가 2루에 다 다가갔음에도 2루를 커버하는 유격수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 역시 미국 선수들이라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보셨나. 연기가 수준급이다. 내가 이런 건 절대 안 걸린다.
- 김소전선수 정말 열심히 달렸습니다.
- 그렇죠. 2루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들어갔어요.
- 공 오지도 않는데 투지를 보여줬습니다.
- 지금 느린 화면 보면 김소전 선수 전혀 공 보지도 않고 달리고 있어요. 머릿속에 무조건 2루에 슬라이딩해서 들어가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거거든요. 이런 게 팀을 끓어오르게 하는 플레이에요.
아…. 쪽팔려…. 저 미국놈들…. 여유 있는 척 사기 친 게 아니라 진짜 공을 못 잡아서 저러고 있는 거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서서 들어가도 되는 건데…. 아…. 진짜…. 쪽팔려서….
- 1회 초 주자2로. 타석엔 2번 타자 노경준입니다.
- 랩터스에서 숱하게 겪어온 상황이거든요. 노경준 선수 가볍게 쳐도 큰 타구 보낼 수 있는 선수예요. 가볍게 맞춘다는 생각으로 타격하면 돼요.
나는 2루. 타석에는 포수만은 아니지만, 충분히 덩치가 큰 경준이. 그리고 지금 저 포수는…. 마스크를 썼음에도 화가 나서 흥분한 게 보이는 상황. 그러면 뭐…. 한번 더해도 되지 않을까?
- 김소전! 과감합니다! 초구에 3루를 훔쳐내는 김소전! 이번 대회 자신의 도루 개수를 7개로 늘립니다.
- 포수. 주자가 뛸 거라고 생각도 안 한 것 같아요. 타이밍을 완전히 뺏겼거든요. 경기 초반 좋은 기회를 만들었어요.
3루를 온건 좋은데…. 이 3루수놈 어차피 살았는데 태그를 왜 이렇게 세게 하는 거야. 이건 폭행 아니냐?
- 노경준 친타구 높이 떴습니다.
- 밀렸어요. 타이밍이 늦었거든요. 애매하게 떴어요.
- 3루 주자 김소전 베이스에 붙어 태그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좌익수 알렉스 낙구 위치를 잡았습니다. 중견수 공을 잡자마자 홈으로 던집니다!
- 김소전 달리죠! 김소전 홈으로 들어가요!
- 세잎! 세잎입니다. 노경준의 희생플라이로 선취점을 따내는 대한민국! 오늘도 대한민국이 먼저 앞서갑니다!
하여간 경준이 저놈은 도움이 안 된다. 멀리 치려면 칠 것이고 못 들어가게 칠 거면 더 짧게 치던지…. 이게 뭐야? 안 들어갈 수도 없고…. 내 팔자야….
차라리 우익수 쪽으로 치면 보기나 편하지, 쳐도 꼭 좌익수 쪽으로 쳐서 잡는 것도 보기 힘들게…. 이래저래 멍청한 애랑 야구하면 이래서 힘들다.
힘든 건 힘든 거고 공 잡는 순간 스타트를 해야 하니 눈을 크게 뜨고 공이 떨어지는 걸 바라본다. 옆에서 3루 코치님이 콜을 해주긴 할 거지만…. 1루 코치도 아니고 3루에 선풍기님은…. 아직 신뢰가 안 생긴다. 그럼 힘들어도 내가 판단해야지.
좌익수가 낙구 위치를 파악하고 멈춰서서 공을 잡는다. 달려오면서 잡아 던지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잡는다고? 그럼 달려봐야지.
공이 사라지는 걸 보고 베이스에 붙어있던 발을 뗀다. 이런 상황은 첫발에서 결정이 난다. 이 악물고 홈으로 달린다.
점점 가까이 보이는 포수의 움직임. 나한테 욕을 하던 포수가 1루 쪽으로 살짝 이동하면서 무릎을 꿇는다.
제자리에서 던지는 데 공이 벌써 포수가 잡을 만큼 빨리 온다고? 홈까지 거리가 좀 남았지만 급한 마음에 마지막 점프를 하면 왼손만 멀리 펴고는 몸을 바깥쪽으로 날린다.
- 슬라이딩이 기가 막혔습니다.
- 포수의 태그를 완벽히 피하는 슬라이딩이었어요. 포수도 손을 쭉 뻗어봤지만, 전혀 닿지 않았죠. 김소전이 점수를 만들어냈어요.
아우. 진짜. 아까 3루에서도 살았는데 등을 치더니. 이 포수 놈은 내가 홈플레이트 지나가고 났는데도 쫓아와서 엉덩이를 두 번이나 치는 거야!
기분이 나빠 한마디 해야지 생각을 하다가도…. 얼굴을 보면…. 흠…. 그래…. 영장류가 아직 사람이 못돼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넓은 마음으로 용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