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이상한 선생님
내가 나쁜 놈이었다니…. 난 진짜 몰랐네….
내 기억 속의 랩터스는 자기 할 것만 하면 누구도 터치 안 하는 선진적인 구단. 그래서 야구가 부족한 내가 늦게까지 남아서 개인 훈련을 하다 경준이가 따라다니면서 같이하고…. 그러다 경준이 동기들이 같이하고…. 그러다 후배들이 같이하고….
그냥 야구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선배들한테 그런 게 아닌 게 돼버렸었다니….
작년까지만 해도 팀의 주전을 맡아주던 베테랑 선배들이 있을 때는 지금 선배들이 이렇게까지 눈치 안 보고 훈련장을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애매해졌다.
팀의 주축이 돼버린 어린 선수들. 그것도 나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어린애들이 날이면 날마다 스프링캠프를 방불케 하는 훈련량을 소화하고 있으니 가정이 있는 선배들은 도저히 그런 훈련 시간을 지켜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나둘 개인 훈련을 시작하는 선배들. 하나 둘 씩 구단훈련시설에서 벗어나더니 내 위로는 어지간해선 따로 훈련장을 구해서 개인 훈련을 하는 게 당연하게 됐다는 이야기….
살다…. 후배들이 선배 눈치 본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선배들이 후배 눈치 본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구단에서 제공하는 이 공간이 내 것도 아니고 여기 있는 어린 선수들 것도 아닌데…. 왜…. 같이 땀 흘리는 선배들이 눈치를 보는 거지….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는데….
“선배님. 왜 제 눈치를 봐요? 막 서운해지려고 하네요….”
“그런 게 아니고. 선배들 많으면 네가 더 힘들까 봐. 지금도 후배들 다 너만 바라보고 있잖아. 네가 우리 팀에서 야구도 제일 잘하고. 그런데 선배들이 나타나서 한마디씩 던지면 저 친구들이 네 말 안 들을까 봐 그렇지….”
그때 끼어드는 아저씨
“수경아. 너도 야구 잘해. 어린애들이 소전이 보고 배울 것도 있지만 너보고 배울 것도 많다고. 팀이 왜 이러냐. 팀이 왜 두 개로 쪼개져 있어.”
충격이다. 나는 누구를 이끌 생각도. 누구를 배제할 생각도 없었는데. 그냥 나 혼자 부족한 운동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이게 뭐야….
“수경아. 설마 다른 선수들도 소전이 눈치 봐서 따로 훈련하냐?”
“서로 말을 잘 안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죠. 사실 소전이 훈련하는 거 보면 자괴감 느끼거든요. 후배한테 운동하는 거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러다 보니 외부에서 하는 편이죠”
내가 완전히 악의 축이구나….
“감독님이 이래서 나 불렀구나. 너는 소전이한테 모르는 거 물어보는 게 창피하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서로 불편할까 봐 그렇지요.”
불편하다니…. 내가 왜 불편한 사람이 됐지….
“나한테 물어보는 건 안 불편하고 소전이한테 물어보는 건 불편하고? 안 되겠네…. 내일 주장이랑 얘기 좀 해봐야겠다. 팀이 왜 이래”
그러게요. 팀이 왜 이렇게 됐을까요…. 제 주위 사람들하고는 다 잘 지내서 전…. 선배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네요….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수경아, 현범이랑 캐치볼 좀 해봐라. 애가 공 잡을 줄도 모른다. 너랑 공 가장 많이 주고받는 놈이 저 모양인데 야구를 어떻게 한 거냐?”
“그래서 최대한 잡기 편하게 던져주고 있었죠”
“그게 잘하는 짓이냐? 팀에 선배들이 물러터졌어. 선배가 이러니까 애들이 자기가 뭐가 문젠지도 모르지. 소전이한테만 맡기지 말고 너희가 뭔가를 할 생각을 해”
나한테? 맡겨? 내가 뭘 맡아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왔는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배가 나타나 훈련장 분위기를 뒤바꿔 놓았다. 나만 보고 나를 따라 하던 선수들에게 따라 붙어가며 하나씩 하나씩 운동하는 법을 바꿔 놓는다.
“규환아. 그런 건 소전이나 되는 거지 넌 아니야. 넌 스피드로 먹고 살아야지 홈런 치게?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성신아…. 하…. 뭐하냐? 눈으로 봐도 왼쪽 오른쪽이 비대칭이다. 그러니까 밸런스가 안 맞지…. 자 형 봐봐”
다르다. 저 사람 다르다. 나는 대놓고 하지 못한 말들을 대놓고 한다. 그래도 프로까지 온 선수들인데 자기 몸은 가장 잘 알 텐데 그런 거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다…. 저러다 선수들 상처받을 텐데….
“종오야. 형이 얘기한 게 다 맞는 건 아닌데 우선 듣고 내일 코치님하고 얘기해봐. 그리고 네 것을 찾아야지. 소전이가 하는 건 소전이한테 맞는 거야. 넌 아니라고. 둘이 포지션도 다르잖아. 생각해 보고 코치님하고 얘기해봐”
저 정도면 코치님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저 정도만 해도 충분한 것 같은데…. 저렇게 아는 게 많은데…. 저 사람…. 야구는 왜…. 그 모양이지….
“수경아. 현범이 좀 봐줬어?”
“네. 오래 걸리겠네요. 몸이 딱딱한 건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네요.”
“그거 다 네가 잘못한 거다. 야구 너 혼자 하는 거 아니잖아. 팀 후배들도 봐주고 해야지 그러면 못쓴다.”
“현범이가 저보다 잘 쳐요”
“야! 치는 건 배우고 수비는 알려주고 그래야지. 야구 같이 하는 거야.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난 간다. 내일 보자.”
나만 바라보고 훈련하던 훈련장에 분위기가 바꿨다. 저 무식하게 반복훈련만 하던 놈들이 중간중간 눈을 감고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이 사람들을 무시했었나…. 얘들도 머리에 뇌가 있었어….
- 2029시즌도 이제 정규시즌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1위를 확정 지으려는 랩터스가 재규어스를 홈으로 불렀습니다. 중위권 싸움만큼 치열한 탈꼴찌 싸움을 벌이는 재규어스가 랩터스를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잠실에서 확인하시죠.
감독의 명장병…. 후반기 들어오면서 작두 탄 감독의 작전이 족족 들어맞으면서 경기 차를 벌었다. 2위와 거리가 생기니 팀의 여유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대체 선수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주전과 대체 선수의 실력 차이를 감독의 작전으로 커버하고….
이러면 우승을 못 할 수가 없잖아.
- 오늘 경기이기면 1위 확정이죠. 랩터스도 일찍 1위를 확정 짓고 잔여 경기 운영하고 싶어 해요.
하나씩 줄어가던 매직넘버가 이제 한 개만 남았다. 오늘 이기면 우승 확정. 이런 건 시간 오래 끌 필요가 없다. 오늘 이긴다.
- 1회 초 수비를 잘 마친 랩터스 1회 말 공격에 들어갑니다.
- 좌투수 상대로 루카스 선수가 1번으로 나왔어요. 랩터스식 플래툰이거든요. 효과가 상당합니다.
상대가 좌투수가 나오자 우리 팀 육성형 외국인 선수 출신의 루카스가 1번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이 극강의 변태 같은 놈. 우투수에는 2할 2푼, 좌투수에는 3할 5푼…. 그나마 우투수에 친 안타도 대부분 내야안타…. 하여간 이 팀엔…. 정상적인 건 나밖에 없다.
- 초구 살짝 빠집니다. 볼.
- 바깥쪽 살짝 빠진 공인데 타자가 잘 봤네요.
저걸 안친다고? 안친 거야 못 친 거야? 안친 건지 못 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오로지 좌투수만 패는 1번 타자님의 또 다른 장점. 선구안. 이게 선구안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자기가 노린 공이 아니면 안치는 건지 모르게 공을 골라낸다. 어떨 때는 볼도 치고 어떤 때는 한 가운데 스트라이크도 안치고…. 하지만 확실한 건 좌투수 상대로는 삼진도 안 당한다. 투스트라이크 이후부터는 짧게 짧게 배트를 내면서 어떻게든 그라운드로 공을 굴리는 재주…. 능력이다.
- 빗맞은 타구 투수 옆을 지나갑니다. 유격수 전진! 1루! 살았습니다.
- 재규어스 비디오판독 요청하죠.
- 공이 살짝 느렸지만, 유격수 김성영 선수 잘 잡아서 잘 던졌는데…. 이걸 사네요.
- 세잎. 비디오판독 결과 원심이 유지됩니다.
더군다나 우타자가 발이 미쳤다. 어지간한 좌타자보다 빠른 발…. 일단 타구가 땅에 구르기만 하면 살 수 있는 확률이 반반…. 저놈은 야구가 아니라 육상을 해야 했어….
- 주자 1루. 타석에 김소전입니다.
- 김민중 감독이 왜 김소전을 2번에 쓰는지 기록으로 증명하죠. 김소전 선수가 2번으로 들어갈 때 랩터스의 득점이 확실히 올라갑니다.
정신이 사납다. 저놈이 주자로만 나가 있으면 머리가 아파온다. 주자의 역할이라는 게 뒤 타자의 타격 결과에 따라 한 베이스를 더 가는 게 기본인데…. 기본만 하면 되는데…. 저놈은…. 그런 게 아니다.
- 1루 견제! 주자 재빨리 돌아옵니다.
- 신경 쓰이죠. 루카스 선수가 루상에 있으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어요.
좋다. 주자가 투수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 좋다. 문제는…. 타자도 어지러워
- 피치아웃! 포수 1루 송구! 세잎. 아슬아슬했습니다.
- 주자가 저렇게 움직임을 가져가면 상대 팀은 괴로워요. 너무 괴롭거든요.
괴롭다. 나도 내 야구를 해야 하는데…. 저놈만 나가면 투수가 나랑 상대하는지 주자랑 상대하는지 모르겠다. 점수를 내려면 결국 타자가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야 하는 건데…. 투수님아…. 나랑 좀…. 놀아줘요….
- 2구. 빠집니다. 볼.
- 고병석 선수 슬라이드스텝을 빨리하려다 보니까 중심이동이 자연스럽지 않거든요. 급해도 투구폼은 정확히 지켜줄 필요가 있어요.
나는 한 것도 없는데 자꾸 늘어나는 볼…. 타석에서 공 길게 보지 않고 빨리빨리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최고의 미덕인데…. 공치고 싶다.
- 주자 스타트. 2루 롱텍! 결국 2루를 훔쳐내고야 마는 루카스 선수입니다.
- 타이밍 뺏겼죠. 도루를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3S라고 하거든요. 스타트, 스피드, 슬라이딩. 이 선수는 거기에 센스까지 갖추고 있어요. 랩터스 어디서 이런 선수를 데려왔는지 신기하네요.
3볼…. 내 타석에 나는 한 것도 없이 3볼…. 나는… 언제쳐….
- 볼. 스트레이트 볼넷. 비어있는 1루가 채워집니다.
- 앉아서 받았지만, 고의사구나 마찬가지죠.
이거 문제가 있다…. 나 치고 싶은데…. 칠 수가 없네….
- 1회 말 랩터스의 공격. 무사 주자 1, 2루. 타석에는 노경준입니다.
- 이제 노경준 선수에게 검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없어졌죠. 중심타선에 들어가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자기 스윙을 돌리고 있어요.
터덜터덜 1루로 나가 코치님한테 궁디팡팡을 당하고 2루 주자를 확인한다. 투수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길게 잡아가는 리드…. 어쩔 수 없이 2루 주자를 따라 리드를 길게 잡는다…. 난…. 이 이상은 무린데…. 넌. 진짜…. 할 말이 없다.
- 초구 헛스윙. 바깥쪽 빠른 공에 헛스윙하고 마는 노경준입니다.
-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이 상황에서 고병석 선수 던질 수 있는 공이 직구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갔네요.
절레절레…. 가볍게 쳐도 충분한데 꼭 저렇게 티를 낸다.
- 노경준! 타구 1루수 키를 넘어갑니다! 2루 주자 어느새 홈까지~ 1루 주자도 3루 돌아 홈으로~ 홈에 들어옵니다. 노경준 선수의 2루타로 2점을 먼저 가져오는 랩터스.
- 지금도 타자의 배트가 밀렸거든요. 밀렸는데 코스가 워낙에 좋았어요. 재규어스 안타깝네요.
무식한 놈. 저걸 힘으로 밀어내네…. 내 앞의 타자는 야구를 발로하고…. 내 뒤의 타자는 야구를 힘으로 하고…. 야구 참 지들 멋대로 하네….
홈플레이트를 밟고 덕아웃에 들어오니 생소한 풍경이 펼쳐진다. 덕아웃 뒤에 옹기종기 모여 토론을 하는 백업들…. 이온 음료 마시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뒤에 가서 서본다.
“규환아 봤지. 루카스 뛸 때 투수 모션만 보고 뛰는 게 아니라 그 미묘한 느낌…. 그거 알지?”
그 미묘한 느낌? 그게 뭔데요?
“모른다고? 자 봐봐. 투수가 호흡을 가져가다가 앞을 보고 다시 1루를 보다가 다시 앞을 볼 때 딱! 이런 느낌”
그건 뭔 X 소린가요?
“모르겠다고? 선엽아, 와봐~ 설명 좀 해보자”
“형. 그건 저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그걸 몰라? 그럼 넌 스타트 어떻게 하는데? 좌투수에 뛸 때는 딱 느낌이 올 때 하잖아 안 그래?”
“네? 전 좌투수에는 안 뛰는데요”
“안 되겠다. 너도 오늘 끝나고 남아. 오늘은 우리 좌투수에 도루하는 법에 관해 연구해보자”
이상한 사람이다…. 자기도 못 하면서 여기저기 들쑤셔…. 그래도 뭔가 새로운 거 나올지 모르니까 나도 슬쩍 발 걸쳐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