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특별훈련
번트안타 후 볼넷. 상대 배터리의 상황이 투수의 얼굴을 통해서 드러난다.
마운드에서 평정심을 가지고 타자를 잡아먹어도 모자랄 투수가 1회에 공 몇 개 던졌다고 얼굴이 뻘게져서 금방이라도 쌍욕을 뱉을듯한 표정이다.
- 무사 주자1,2루 좋은 기회를 맞은 랩터스입니다.
- 2루 주자 루카스 선수가 만들어 준 볼넷이죠. 지금까지 김소전선수가 이런 볼넷을 만들어만 줬지 받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나중에 물어봐야겠어요.
저. 야구 X같이 하는 XX. 첫 경기에 보여주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적당히 야구 보면서 해야지 자기 혼자 야구하고있어.
- 2루 주자 리드가 또다시 큽니다.
- 공격적인 주루에요. 1루에 있는 김소전도 공격적인 주루를 하는 선수인데 이 선수는 더하네요.
저놈은 아무리 봐도 생각이 없다. 2루에서 움직임을 그렇게 크게 가져가면 타자도 정신이 사나워진단 말이다. 특히나 지금 타석에 경준인데 저놈은 집중력이라는 게 없는 놈이라고!
- 2루 견제.
- 아까부터 투수가 너무 주자에게 묶여있거든요. 이 이상으로 주자에게 끌려다니면 투구가 무너질 수 있어요.
티가 나지 않지만 나는 봤다. 지금 위험했다. 무게중심이 2루에 가 있는 듯하지만 저놈 3루를 노리고 있다.
타자는 우타자 노경준. 주자 2루에 유격수는 깊은 수비 2루수와 3루수가 베이스커버. 빈공간은 1, 2루. 야구를 할 줄 아는 선수라면 1, 2루 간으로 밀어쳐야겠지만 그런걸 할 수 있는 타자가 아니다.
이걸 어째야 하나 고민을 해봐도 딱히 답도 안 나오고 상황에 맞춘 최선의 선택을 해본다.
- 투수 발 풀어봅니다.
- 지금 랩터스 주자들 리드가 엄청나요. 1루 주자 김소전도 마음먹고 리드를 길게 가져가고 있거든요. 투수의 머릿속에 2루의 루카스뿐만 아니라 1루의 김소전도 담아지기 시작했어요.
상대의 시선이 2루에 꽂혀서 움직이지 않으니 나라도 시선을 흩어줘야겠다. 2루 갈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나갈 수 있는 최대치로 발을 옮겨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 상황에서는 견제만 던져도 몸을 날려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귀루를 시도해야 한다.
사실 몸을 던진다고 해도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만, 견제타이밍만 확인할 수 있으면 바깥으로 몸을 틀면서 들어갈 수는 있다.
저 어쩔 거냐? 이정도 리드면 짧은 안타에 1루 주자인 나도 홈까지 파고들 수 있다.
- 바깥쪽 빠지는 공! 주자 달립니다! 3루 세잎! 1루 주자도 2루까지 들어갑니다. 더블스틸을 성공시키는 랩터스.
- 투구폼 완벽히 뺏었어요. 워호스 랩터스에게 내야진이 농락당하네요.
그래 뛸 것 같더라. 발로 먹고사는 선수가 상대 투수의 견제를 그렇게 많이 봤는데 견제 때 뒷발 떨어지는 거 못 보면 안 되지.
투수가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기분이 들자마자 2루 주자 보지도 않고 스타트. 2루에 있던 주자도 내 믿음을 버리지 않고 3루로 스타트.
스타트 자체는 내가 더 빨랐지만 아무래도 리드가 더 긴 2루 주자가 3루에 먼저 들어간다.
반신반의했는데 이제 확신이 생긴다. 저놈 다른 건 몰라도 주루하나는 진짜배기다.
- 볼넷. 연속 볼넷이 나옵니다.
- 투수 제구가 안 되네요. 랩터스 주루플레이에 신경을 쓰다 베이스를 꽉 채우고 말았어요. 위기를 스스로 차조하고 있어요.
저 미친놈은 3루에서도 좀처럼 가만있지 않는다. 공 하나하나에 반응해서 상대의 심기를 건드린다.
안 그래도 발 빠른 주자에 신경이 곤두선 투수가 떨어지는 공은 생각도 못 하고 직구만 던져댄다.
변화구라면 모를까 직구라면 사람답게 대응할 줄 아는 경준이가 까다로운 입맛으로 하나씩 공을 골라낸다.
자기가 한 거 하나도 없이 은근슬쩍 얻어낸 볼넷. 랩터스의 제대로 된 스윙도 없이 번트하나 볼넷 두 개로 만루가 되었다.
이거…. 야구가…. 좀 이상한데….
- 타석에 황경철입니다.
- 지명타자로 출전하죠. 수비에서 해방된 황경철이 타격에 얼마나 집중할지 기대돼요.
무사 만루. 벤치에서 요상한 작전 따위 내지 않고 정공법으로 히팅싸인이 나왔다. 팀의 4번 타자가 멀리 외야로 공을 띄우면 타구 방향 보면서 다음 베이스를 노리는 정석적인 플레이. 그런데도 우리 3루 주자님은 여전히 혼자 바쁘다.
- 3루에 견제. 양 팀의 신경전이 치열합니다.
- 3루에서의 움직임이 커요. 작전이 걸렸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은 것 같은데. 지금은…. 글쎄요…. 타자에게 조금 더 집중하는 게 좋을 수도 있어요.
말렸다. 상대 팀이 우리 팀의 현란한 주루플레이에 말려버리고 말았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투수가 걸리지도 않는 주자와의 신경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저러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가뜩이나 지금 던질 수 있는 공도 직구밖에 없는데…. 이러면….
- 투볼. 볼카운트 몰립니다.
- 몰리면 안 됩니다. 주자 만루에 볼카운트를 몰리면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거든요.
- 황경철!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3루 주자 홈. 2루 주자! 2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옵니다! 황경철의 2타점 적시타로 선취점을 뽑아내는 랩터스.
- 더 몰리면 안 되니까 가운데 들어가다가 맞았어요. 이게 최악의 결과거든요.
- 중견수 앞 안타에 3루 주자는 그렇다고 쳐도 2루 주자도 들어왔습니다.
- 타자가 황경철이라 수비가 깊은 수비를 펼치고 있었고 2루 주자 김소전의 리드도 처음부터 굉장히 컸거든요. 오늘 랩터스의 발에 일격을 당한 워호스에요.
헐….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던 경철 선배가 힘 빼고 가볍게 툭 밀어서 안타를 만들어냈다. 배트 나오는 거 보면 한가운데 아니면 그냥 지켜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타이밍이 조금 늦는다고 봤는지 그냥 툭 밀었다. 밀어서 센터 앞으로 안타.
지금까지 선풍기라고 부른 거 취소다. 저런 타격센스를 가지고 왜 여태까지 무식하게 잡아당기기만 한 거야.
- 경기 종료. 13:7로 경기에 승리하며 1위를 지켜내는 랩터스였습니다.
- 스코어는 13:7이지만 랩터스의 일방적인 경기였죠.
- 그렇습니다. 7회 윤기수 선수와 장민석 선수의 7실점을 빼면 랩터스의 위기가 없었습니다.
- 김민중 감독 타격에서 루카스 선수의 활용법과 수비에서 윤기수 선수의 활용법에 대해 머리가 좀 아프겠어요.
어지러운 경기가 끝났다. 1회 말고는 출루를 못 한 1번 타자도 고민이고 점수 차 클 때 지켜야 할 롱 릴리프들이 여전히 털려 나가는 것도 고민이다.
특히나 7회 빅이닝을 만들어 줄 때 여전히 나오는 수비 불안. 결과적으로 보면 1루수 현범이의 수비가 부족해서 나오는 문제이긴 하지만 딱히 내야수들이 1루수가 받기 편하게 던져주는 것도 아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내야수들 집합 한 번 해서 송구 훈련이라도 해보고 싶지만…. 2루랑 3루가 선배들이다…. 거기다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원죄는 1루수가 돌 글러브를 끼고 나오는 게 문제니까 1루수를 갈궈야지
오늘은 포수 장비 채워놓고 피칭머신 앞에 세워놓아 봐야겠다.
잠실만은 못하지만, 숙소로 쓰는 대한 호텔 지하에 만들어 놓은 랩터스 전용훈련시설. 언제나처럼 경기가 끝나고 운동을 시작하니 선수들이 하나둘씩 들어온다.
“너 왜 늦었어.”
자기 친구들 다 들어온 다음에야 스웩가득한 걸음걸이로 들어오는 경준이. 너 잘 걸렸다.
“형. 형이 사랑을 알아요?”
뭐? 미친놈아?
“형. 사랑이란 말이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해야 하는 게 사랑이에요”
중증이다. 이런 건 고치는 방법이 하나지…. 맞아야 정신 차리지
“내가 사랑은 모르겠고 1루에서 미트질 하는 건 좀 알거든. 너 현범이 데리고 닭장에 좀 들어가 봐라”
“네? 저 우리 요미랑 말고는 다른 사람과 좁은데 안 들어갑니다.”
“요미? 그건 또 뭐냐? 너희들 또 애칭 바꿨냐?”
“아…. 진짜…. 형…. 사랑을 모르네…. 사랑이란 말이죠. 항상 새롭고….”
사람한테 공이 아니라 배트를 집어 던질 것 같아 동공이 반쯤 풀려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멍청이를 글러브 하나 끼워주고 배팅케이지에 집어넣었다.
“현범아. 봐봐. 공을 어떻게 잡는지 다시 봐보자”
내 옆에 돌 글러브 1루수를 잡아두고 실험 조교는 닭장에 집어넣고 피칭머신을 켰다.
정상적인 직구를 리드미컬하게 쏘아내는 피칭머신. 구단주 형이 미제 비싼 거라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쓸데마다 느끼는 건데 좋긴 좋다.
“보이지? 공을 마중 나가지 말고 기다려. 저 멍청한 경준이도 공 날아오는 거 끝까지 기다렸다가 두꺼비처럼 꿀꺽 잡아내잖아. 이해가 돼?”
“형. 저도 아는데 그게 쉽지 않아요. 실전에서 공이 기계처럼 딱딱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마음이 급해져요”
알지. 알다마다. 내가 너 같은 돌 글러브 숱하게 봐왔다. 2군에는 너 같은 놈들 트럭으로 한가득하거든. 그래서 내가 준비했지
여전히 반쯤 풀린 눈으로 툭 툭 내던져지는 공을 잡아내는 경준이에게 선물을 해주기 시작했다.
“으악! 형 이거 기계가 미쳤어요”
“어 안 들려? 더 빠르게? 알았어”
“형! 으악! 이거 뭐야! 공이 왜 떨어져! 악 이번에 공이 튀는데!”
직구만 나오던 기계를 조금 조정해서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섞어봤다. 갑자기 바뀐 공의 궤적에 비명을 지르는 경준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두꺼비처럼 공을 잘도 잡아낸다.
“보이지? 공을 기다리면 궤적이 끝까지 보이잖아. 그걸 보고 방향 그대로 받아주면 공을 놓칠 리가 없지”
“형. 1루에서는 팔을 쭉 뻗어서 시간을 줄여야 하잖아요”
이 멍청이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쓸데없는 소리를.
“현범아. 다리 찢고 공 받고. 이런 거 중요해 중요한데 기본이 더 중요하잖아. 마음만 급해서 공을 못 받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형. 어쩔 수 없잖아요. 내야수들이 던져주는 공들 0.1초가 급한데 조금이라도 더 뻗어서 잡아줘야지요.”
누가 경준이 친구 아니랄까 봐 씹어서 삼켜드려야 한다.
“현범아. 그 0.1초 줄이겠다고 내야수들이 사이드로도 던지고 언더로도 던지고 하잖아. 그런데 지금 우리 내야수들 공 마음 놓고 던지던? 1루수가 공을 잡아준다는 믿음이 없으니까 급할 때 대충 몸에라도 맞고 떨어지라고 자세 잡고 던지잖아. 그게 시간이 더 걸려”
“형 진짜 내야에서 공 이상하게 들어온단 말이에요. 특히 2루에서 슬라이스 걸려 들어오는 건 따라가기도 벅차요”
알지. 2루수 수경 선배 특기가 역동작으로 잡아서 사이드로 송구하는 건데. 이게 잘 갈 때는 상관없지만 조금만 빗나가도 1루가 몸을 날려 막아줘야 하는 거거든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네?”
“빠져나가는 공 어떻게 하려고?”
“최대한 잡아보려고 손을….”
이 온실에서 곱게 큰놈… 에효….
“잡는 게 문제가 아니었구나”
“네?”
“막아야지. 네 근처로 날아오는 모든 공은 네 거야. 누구한테도 미룰 수 없는 네 책임이라고. 잡아. 무조건 잡고 그래도 안 되는 건 몸이 가서 막아야지. 베이스를 버려서라도 몸을 날려서 막아야지.”
“형 그러면 타자가 살잖아요”
“공 빠지면 2루 가는데? 그리고 1루수가 내공을 절대 빠뜨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수비수도 적극적으로 송구를 하지. 그렇게 까먹는 내야안타가 1년에 10개도 넘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는데도 여전히 자신감이 없는 우리 팀 1루수…. 이런 건 방법이 없지….
“저기 봐봐. 쟤 외야수잖아. 외야수 글러브 끼고도 변화구 다 받아내고 있잖아. 너도 할 수 있어. 타격 연습하는 거 반만 해도 우리 팀 투수들 연봉이 올라갈 거다. 경준이처럼 해봐”
멍청하지만 이기적이진 않은 1루수를 배팅케이지에 넣고 두꺼비를 꺼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불타오르는 눈동자로 케이지에서 빠져나온 두꺼비.
나오자마자 피칭머신 조종기를 뺏어 들더니 광분을 한다.
“으흐흐. 너도 죽어봐라! 랜덤 변화구다!”
“으악! 뭐야 이걸 어떻게 받아!”
공을 치라고 만들어 놓은 배팅케이지에서 비명이 터져 나올 때 훈련장 문이 열린다.
“여긴 퇴근 안 하냐? 빨리들 퇴근해! 형이 운동할 자리가 없잖아”
뭐야? 저 아저씨는 이적 첫 경기부터 여길 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