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진실규명
잘못돼도 뭐가 한참 잘못됐다.
내가 잘못한 건 이번 시즌 우승 못 한 것뿐인데…. 하늘이 벌을 줘도 너무한 거지…. 이런 건…. 아니지 않나….
“형. 이거 진짜 효과가 있는 거예요? 아니 그것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니…. 우선 저 아저씨 사짜느낌이 너무 나지 않아요?”
매년 하고 있는 라타코치와의 훈련…. 종종 한국 선수들도 배우고 갔다고는 들었지만, 효과가 별로라는 소문이 돌고 난 뒤로는 유일하게 나만 배우고 있었는데…. 이…. 재활도 안 끝난 놈이 같이 왔다.
“형. 말이 안 되잖아요. 공을 가만히 기다렸다 치기도 힘든데 움직이면서 치라는 게 말이 되는 얘기에요?”
“나 그렇게 치잖아.”
“그건 형이니까 그렇고 저 아저씨 사기꾼 맞는 거 같은데”
눈앞에서 내가 라타코치님의 이론을 시현해주고 있는데도 믿음이 부족한 어린양…. 하긴…. 넌…. 그따위 몸뚱이로는 중심이동 타격 못 한다. 장담한다.
타격이론이 확고한 라타코치와 머리도 나쁜데 몸도 나빠 완벽한 타격이론을 습득하지 못하는 경준이.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간극을 좁혀보려고 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다.
“형. 자 봐봐요. 중심을 앞으로 끌고 가면서 꽝 치면~ 봐봐요. 뒷발이 끌리죠. 이렇게”
“어 그렇게 끌리면 완벽한 거지”
“형. 봐봐요. 이렇게 뒷발이 끌리면 무게가 앞으로 쏠리면서 중심이 뜨잖아요”
“아니 멍청아. 중심이 뜨면 안 된다고. 무게중심 그대로 축만 앞으로 나가야지”
“형! 잘 봐봐요. 이렇게 앞발이 나가죠. 몸이 끌렸다 나가면서….”
“테이크백 하지 말고 중심만 움직이라니까”
“그러니까 테이크백 안 하고 중심만….”
“아니라고. 너 지금 뒤로 엄청 빠지거든. 그러면서 팔도 올라가고 머리도 흔들리고. 코치님이 동영상 보여주면서 하는 얘기가 그거 아니냐”
“사람이 기계예요! 중심이동을 움직임 하나 없이 무슨 수로 해요”
“내 것 동영상 봐봐”
“형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다람쥐 쳇바퀴. 하루종일 끝도 없는 이야기만 맴돈다.
나는 첫해부터 배팅케이지에 던져놓고 신경도 안 쓰던 라다 코치님이 이 멍청이를 상대로는 별별 작전을 다 쓰기 시작한다.
콘크리트 벽에 붙여서 타격도 시켜보고 다섯발자국 뒤에서 달려가면서 타격도 해보고 팔 못 올라가게 겨드랑이에 공도 끼워보고 별별 짓을 다 해보는데도 몸치의 움직임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도무지 바뀐 타격폼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준이. 이제는 서로 오기만 남게 될 때까지 해본다.
“경준아, 그런데 인대는 괜찮은 거냐? 무리하지는 말라고 했다며”
“형. 지금 무리 안 하게 생겼어요. 끊어지지만 않으면 될 때까지 할 거예요. 형처럼 칠 때까지 할 거라고요”
이놈…. 목표가 너무 거창하잖아. 내가 아무리 못 쳐도 너만 하겠냐. 그딴 몸뚱이로는 100년을 연습해도 안 된다.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년째 이곳에 오다 보니 여기가 홈구장 같고 편안하다. 특히나 밤에 같이 햄버거 사 먹을 말동무까지 있으니…. 에너지 보충도 더 잘되는 것 같고 좋다.
“형. 조영근 선배님 은퇴하신다는데요”
“야. 아직도 너보다 훨씬 잘 치는데 무슨 은퇴를 해”
“무릎이 너무 안 좋으시대요”
“네 강철 무릎이랑 바꿔드리고 싶네”
십자인대를 다치고 얼마나 됐다고 펄펄 날아다니는 경준이를 보며…. 몸뚱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경준이가 계속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준다.
“조영근 선배도 은퇴하고 박재호 선배랑 정현기 선배도 플레잉코치로 뛰신다는데요”
“말이 되는 얘기를 해. FA 연봉이 얼만데 플레잉코치를 해. 구단이 호구야?”
“그리고 강정상 선배도 코치연수 제시받았는데 고민하시나 봐요. 구단에서는 재계약하면 2억, 다른 팀 간다면 조건 없이 풀어준다고 했대요”
“어렵다. 강정상선배…. 랩터스 프랜차이즌데…. 어디 가기도 그렇고, 재계약해도 포지션이 애매하다. 선배들 다 떠나지 지타자리 들어가시려나?”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햄버거 4개씩을 클리어하고 다시 케이지에 들어가 훈련을 이어간다. 해도 해도 부족한 훈련. 옆에 있는 몸치처럼 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배트를 돌린다.
“그래서? 강정상이 계약한다고 안 한다고?”
“나도 모르지 고민 중이라잖아.”
“그렇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전화. 몇 년째인지 모르지만 매일 마지막 일과로 루다와 통화하는 게 생활이 됐다.
“넌 그런 소식 어디서 듣는 거야? 니가 어디 소식들을 데도 없잖아”
이것이 내가 구단에서 얼마나 마당발인데 그런 얘기를…. 물론 미국 와서 훈련하는 동안 통화를 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난 마당발이다.
“경준이가 어디서 듣고 이야기해주더라고. 잠깐…. 그런데 경준이는 어디서 들었지?”
내가 말을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사실…. 나보다 인간관계가 더 안 좋은 경준이가 저런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왔지?
“경준이? 음…. 그렇군…. 그럼 믿을 만하겠어. 좋아. 내가 취재해주지”
기자도 아니고 아나운서가 뭐 이렇게 취재를 좋아해…. 그런데…. 왜 경준이 말을 믿지? 그 멍청이 어느 구석이 신뢰가 가서?
“걔도 뭐 대충 동기들한테 주워들었겠지. 그냥 그런 말이 있더라. 그렇게만 생각해”
“그럴 리가. 운영팀에서 나온 이야기일 텐데. 내가 꼭 확인해보겠어.”
운영팀? 경준이가 무슨 운영팀에서 이야기를 들어
“경준이 친구 없는데?”
“정새현”
“누구?”
“운영팀 정새현”
“운영팀 정새현? 정새현 주임?”
기세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운영팀에 유일한 천사? 정새현주임이 왜? 나랑 동갑이지만 아직 말도 못 텄을 정도로 낯가리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경준이랑…. 뭐지?
“정주임님이 경준이한테 팀 내 얘기를 왜 해줘?”
“됐다.”
되긴 뭐가 돼
“뭔데? 둘이 뭐 있어?”
“둘이 사귀는 거 팀 내에서 모르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미쳤냐? 정새현 주임이 왜 멍청한 놈이랑 사귀어!”
“어차피 너한테 기대도 안 했다.”
믿을 수가 없다. 저 짐승같이 생긴 놈이 여자를 만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게 심지어 정새현이야. 이게 말이 되냐?
지난 시즌 우승을 못 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팀이 이 모양인데 연애가 무슨 일이야. 그건 그렇고 둘이 어떻게 만난 거야? 정새현이 왜? 너무 착해서 측은지심 뭐 이런 게 나타난 거야?
이런 적이 없었는데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숨 쉬는 것도 사치스러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 깜짝이야. 형. 문 앞에서 뭐 해요?”
아침 운동하러 갈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지만, 도저히 침대에 누워있을 수가 없어 경준이 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오기만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머리는 산발을 하고 나오는 죄인.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너 연애하냐?”
“형…. 왜 그래요…. 눈이 새빨개요….”
“너… 정새현이랑…. 연애하냐?”
“형…. 연애는 아니고…. 그런 얘기는 어디서….”
호텔 문 앞에서 열린 청문회…. 추악한 진실이 밝혀진다.
“사귀는 건 아니고 썸이다?”
“저는 좋은데 누나는 모르겠네요”
재활을 하랬더니 연애를…. 그것도 그 천사 같은 정새현 주임을….
올림픽에서 후방 십자인대에 부상을 당한 경준이. 한국에 돌아와 정밀검사를 받고 수술 없이 주사 치료로 재활을 시작했다.
선수한테 연봉은 안 주더라도 복지에는 돈을 뿌리는 랩터스가 아픈 선수는 매니저가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게 전통이다. 심지어 운전면허도 없고 차도 없는 경준이인지라 매니저 형이 집에서 픽업해서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하필 병원 가는 날 담당 매니저가 술 먹고 연락이 두절이 되었다.
매니저를 기다리다 택시를 타기로 마음을 먹은 경준이가 택시 앱을 켜기 직전에 매니저에게 오지 말라고 연락하기 위해 운영팀에 전화를 걸었고, 이 사실을 들은 정새현 주임이 미안해하며 경준이의 집에 총알같이 달려왔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 심지어 정새현 주임 집에서 경준이네 집을 찍고 병원에 갔다 구단까지 가는 길이 평소 출근길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그날 이후 정새현 주임이 전담해서 경준이를 챙기기 시작했고…. 얼굴 자주 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다고…. 둘 사이 애틋함이 생겼다는…. X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게 사귀는 거지!”
“형. 그런 게 아니고요….”
“야! 너 미국 간다고 정새현 주임 밤새 울었다는 거 아니야? 공항까지 따라와서 수속하는거 다 보고 갔다면서! 그게 사귀는 거 아니면 뭐야!”
“형. 아직 고백을 못 해서…. 전… 새현이 누나가 좋은데 누나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요….”
이. 등신 같은 놈…. 넌 누굴 닮아서 이 모양이냐
이 사건 이후 훈련 일정이 바뀌었다.
기존의 눈뜨면 훈련하고, 밥 먹고 훈련하고, 저녁 먹기 전에 코치님한테 조율 받고, 저녁 먹고 훈련하고, 야식 먹고 훈련하던 스케쥴에서 먹는 시간 짬짬이 내 연애학 강의가 들어갔다.
어쩌겠는가. 모자란 놈 찬찬히 알려줘야지.
라타코치와의 뿌듯한 훈련을 마치고 스프링캠프로 이동하는 날. 라타코치님의 총평을 들었다.
나에게는 배트 무게를 조금 늘려보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경준이에게는 한 시간에 걸쳐 속사포 같은 지적사항과 개선 방법을 늘어놓는다.
입으로는 알겠다고 하지만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경준이의 표정…. 코치도 느낌을 받은 듯하지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끝도 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 순간까지 경준이에게 머리를 고정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라타코치…. 여기서는 아무리 해도 부족함을 느끼지만, 이제는 스프링캠프로 떠날 시간이다.
“형. 제 머리가 그렇게 쓰레기에요?”
너도 알긴 하는구나….
“연습하자 그것만 고치면 되잖아.”
“테이크백은요?”
“아. 그것도”
“뒷발 무너지는 건….”
“그것도 고치고….”
“팔꿈치 펴지는 건….”
“하…. 처음부터 다시 하자”
“슬퍼요”
나도 슬프다…. 그러니까 연애를 하지 말고 운동을 했어야지…. 또 화가 치밀어 오르네….
짜증을 내는 와중에 도착한 스프링캠프장. 그전엔 혼자도 왔었는데 이번엔 경준이라도 데리고 오니…. 좀 덜 눈치가 보인다.
이제 처음도 아니고 훈련장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감독님과 코치님들한테 인사하고 훈련장에서 숙소에서 선배들 인사하고 바로 훈련장으로 직행했다.
겨우내 개인 훈련 정도 하다 스프링캠프 온 선수들이야 몸을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여태 훈련하다 들어왔는데 적응 시간 따윈 필요 없다. 어제까지 하던 훈련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훈련에 집중한다.
“와. 독종. 첫날부터 너무하는 거 아니야?”
“말로만 들었지 진짜 저럴 줄은 몰랐다.”
“옆에 경준이도 미친 거 아니냐? 타격폼이 좀 바뀐 거 같은데?”
“글쎄다 경준이 뭔가 호쾌하긴 한데 좀 어색해 보여”
특별히 보는 사람 없이 훈련만 하다 갑자기 보는 눈이 많아지니 신경이 쓰이고 정신이 사나워진다.
“거기 후배님들 기운이 남으면 닭장 비었으니까 들어와서 배트 잡지”
“형. 첫날부터 배트 잡으면 스프링캠프 못 버텨요”
“그런 소리는 누구한테 들었어?”
“주장한테요”
하여간 주장…. 자기가 놀고 싶어서 그딴 헛소리를
“내가 무조건 버티게 해줄 테니까 그만 농땡이 치고 들어와. 들어오면 내가 경준이 비밀 하나 알려준다.”
“형!”
“경준이 여자친구 알고 싶으면 들어와서 두 박스씩만 쳐. 그러면 내가 얼굴까지 보여준다.”
“형! 미쳤어요?”
미치다니. 완벽히 정상인데. 내가 너 때문에 짜증 난 거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