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겨울나기 (2)
이 팀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어제 플레이오프 끝났는데 오늘 군입대 영장을 받아왔다.
당장 다음 주 월요일에 들어가는 일정….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군대 가는건 나한테 이야기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형. 군대에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거예요?”
“너 우리 단장님 모르냐? 군 문제는 단장님이 칼같이 챙기잖아. 공백 최소화되게 선수들 군대 보내잖아. 무슨 수를 쓰는지 단장님이 날짜를 기가 막히게 조정하더라고. 너도 오늘 아침에 결정된 거야”
이런 건 어디에 공익제보를 해야 하는 거지? 이런 건 병역 비리로 잡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당사자한테 물어는 보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군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군대에 간다는 사실에 살짝 항변해보았다.
“야! 기껏해야 4주 훈련받고 올 건데 뭘 그렇게 따져. 나는 전방에서 얼마나 구른 줄 알아! 영하 30도에서 멧돼지랑 몸싸움하고 그랬어”
음…. 전방에 영하 30도? 개마고원도 아니고 영하 30도. 그거도 모자라서 멧돼지랑 몸싸움…. 음….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내가 철원에서 있었는데. 멧돼지? 멧돼지를 보면 도망가서 피해야지 몸싸움은 무슨. 그러다 갈가리 찢기지
“형 그런데 어디로 가요?”
“논산”
“꼭 논산까지 가야 해요? 좀 눈에 안 띄는 동원 사단 가서 받으면 안 돼요?”
나를 이상한 놈 바라보듯 보는 매니저 형.
“다음 주 월요일은 논산밖에 안 될걸? 그것도 빈자리 간신히 만들어서 들어간 걸로 아는데…. 그리고 이게 군대 가기도 전부터 빠져가지고 어디 쉬운 데를 찾으려고 그래!”
내가 군대를 안 갔다 와본 것도 아니고…. 하…. 군대…. 행군…. 유격…. 화생방…. 혹한기…. 생각만 해도 토나오네.
“형. 꼭 가야겠죠?”
“야 형은 26개월 했어. 꼴랑 4주만 하면 되는 게. 어디서…. 이거 빠져가지고 진짜. 너 내 밑으로 왔으면 죽었어.”
입장바꿔 생각해봅시다. 형은 한번. 나는 두 번째 입대잖아요. 군복 입지도 않았는데 벌써 짜증이 밀려온다.
“됐고 월요일 새벽에 데리러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에잇. 너 때문에 PTSD 도지려고 그러잖아. 내가 군에 있을 때 크레모아를 설치했는데. 너 크레모아 아냐?”
알긴 합니다만…. 그걸 꼭 알아야 합니까?
“크레모아를 잘 조절해서 한쪽으로 집탄시킬수 있거든. 너 집탄…. 아 이런 것부터 알려줘야 하나?”
크레모아 집탄… 신박하다…. 병이 크레모아를 막 가지고 놀아?
“형이 말이야 전방에서 집채만 한 멧돼지를 만났는데…. 우리 분대장이 급똥이 와서…. 다들 죽겠다 싶었단 말이지 그때 내가…. 그래서…. 딱…. 도망가는 후임을 잡아다…… 내가….”
내가 이래서 군대 얘기는 안 하는데… 저형…. 평소엔 피곤에 찌들어 말도 별로 없더니 오늘 입이 터졌네….
그나저나…. 군대… 에효…. 손목시계부터 사야하나….
* * *
“군대 간다고? 어째? 누나가 면회 갈까?”
“미쳤냐? 훈련소에 면회 오는 사람이 어딨냐?”
“그래? 면회가 안 돼? 그럼 누나 사진이라도 좀 줄까? 내 수영복 사진 정도면 너 인기쟁이 되는 거 아니냐?”
주변에 군대 간 친구들이 없나. 무슨 80년대 군대 얘기를 하고 있어.
“됐다. 훈련소에서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하고 동기들끼리 4주 훈련받는데 네 사진 따위 도움도 안 된다. 그냥 있어라.”
“흠…. 뭐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아. 내가 아침에 논산 태워줄게. 새벽에 논산 가는 차도 없을 텐데 누나가 태워주마”
“늦었다. 매니저 형이 태워주기로 했다.”
“그렇지? 누가 태워줘야 하는 거지? OK. 누나가 다 준비하마”
전에는 엄마랑 전날 내려가서 머리 깎고 들어갔던 거 같은데…. 이번엔 나 챙겨주겠다는 사람도 많고… 김소전 성공했네.
나 군대 간다는 소식에 갑자기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지만 전부 거절했다. 현역으로 군대 가는 것도 아니고 한 달 기초훈련만 받고 나올 건데 무슨 월남전 파병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하고 싶지도 않다.
나와의 동반입대를 꿈꿨으나 재활치료 때문에 입대를 못 한 경준이의 모닝콜을 받고 군대 가는 날 아침을 맞았다.
모르면 차라리 나을 것을 군대 처음 끌려온 신병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지라…. 한숨부터 나온다.
군대에선 중간만 하면 되는데…. 절대 눈에 띄지 않으리라…. 중간만…. 잘해도 안된다.
SBC에서 김소전 입대 특별방송을 하겠다는 걸 구단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무마시키고 루다가 접근하지 못하게 매니저 형이 철통방어하면서 논산으로 향했다.
집 떠나와 전기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길이 참으로…. 졸린다. 컴컴한 새벽 부드러운 차 안에서 한숨 푹 자고 나니 어느새 나는 더플백 받고 보급품을 지급받는 신세가 되어있었다.
* * *
“단장님. 김소전 군 관련 기사가 났습니다”
팀의 마무리 훈련, 연봉협상, 외국인 선수선발, FA 영입 등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랩터스 단장이 가장 듣기 싫은 보고를 들었다.
“내년 시즌 전까지 랩터스 기사 전부 내리라고 했는데 어디야?”
“그게…. 국방일보입니다.”
“뭐? 국방일보? 입대할 때도 기사를 안 냈던 국방일보가 퇴소식 며칠 남았다고 기사를 내?”
“그게….”
“뭔데?”
“김소전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역대 이런 병사가 없었다는데요. 기사 내용만 보면 인간병기에요”
“하여간 관상은 과학이야! 구단주 닮은 놈들은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어!”
* * *
보급품 받을 때만 해도 어리바리 신병 그 자체였는데 보급품을 하나둘 받으면서 내 몸속에 숨어있던 군인의 DNA가 올라온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칼각으로 올라오는 경례, 외우지 않아도 입에서 나오는 군가…. 훈련소 조교보다 정확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제식….
굳이 노력한 게 아닌데…. 몸이 움직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미 훈련소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결정타가 터졌다.
총기 분해조립 시간…. GP 근무하면서 심심할 때마다 총기 분해 조립하면서 놀았던 손가락이 K2소총을 23초 만에 노리쇠까지 풀었다 조립을 완성했다.
별것도 아닌데 놀라는 훈련소 조교들. 이때부터 정훈장교가 따라붙으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랬으면 안 되는데 카메라가 따라붙으니 이 몸뚱이가 더 미쳐 날뛴다. 훈련소 조교가 화려한 꼼수로 신병을 기죽이는 총검술을 보여주자 눈치 없는 몸뚱이가 의장대 친구에게 배운 총검술을 시전한다.
사진을 찍다 카메라도 놓친 정훈장교가 국방일보까지 불러와 내 사진을 찍어댄다.
좀 귀찮긴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지니 조교들도 얼차려 함부로 못 시키고…. 좋긴 하네….
* * *
4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훈련소를 나오자마자 매니저 형들에게 납치당했다. 끝나고 동기들 밥 사준다고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끌려와 바로 공항으로 이동했다.
“형. 저 또 어디 가요?”
“너 미국”
“미국이요?”
“어. 너 라타코치랑 훈련해야지 가”
“그래도 집에서 준비도 좀 하고”
“그냥 가”
“그래도 엄마한테 인사도 좀 하고….”
운전하는 매니저형의 표정이 안 좋다.
“가라면 그냥 가! 너 지금 서울 갔다 단장님한테 잡히면 그대로 화형당할지도 몰라.”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군대 가래서 군대가, 군대 가서 1등하고 대통령 표창도 받아…. 왜 이 구단은 나를 이렇게 미워할까….
자꾸 이러면 나 삐뚤어질꼬얌!
* * *
“단장님 괜찮으세요”
“아니”
랩터스의 단장과 운영팀장의 비공개회의. 기분이 안 좋은 단장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김소전 어떻게 할까요?”
“죽여버릴 거야….”
“단장님….”
“아… 김소전 연봉 얘기해야지”
참모총장에 합참의장. 그것도 모자라 국방부 장관까지 김소전의 이야기를 홍보에 사용하자고 연락이 왔지만, 올해는 조용히 지내야 하는 랩터스는 전부 거절했다.
이런 식이면 구단 선수들 군대 갈 때 불이익 주겠다는 협박을 받았음에도 끝내 거절을 한 랩터스. 잘한 것도 잘한다고 이야기 못 하는 작금의 상황에 단장의 화가 하늘을 찌른다.
“HM에서 또다시 제시액을 안 밝히고 있어요”
“박현민이 데려와”
“미국 갔습니다.”
얼굴이 찌그러지는 단장. 짜증이 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뭘 원한대”
“확실히 말은 안 하는데 구단주님 석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랩터스의 모든 사건의 끝에 언제나 걸리적거리는 인물. 그 인물 때문에 선수 연봉협상 진행이 안 된다는 말에 단장 손에 있던 볼펜이 두 동강이 난다.
“지들이 왜 우리 사정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야?”
“둘이…. 친구잖아요….”
“친구는 무슨….”
친구라는 말에 본인의 친구들을 떠올려보지만…. 야구관련자들 말고 따로 연락하는 사람이 없음이 생각나 단장이 말을 돌린다.
“6억3천 제시한 거지?”
“네”
5년 차 연봉 최고액을 뛰어넘어 팀 내 비 FA 연봉 최고액을 제시했건만 반응이 없는 선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진 단장이 우선 선수의 행방을 묻는다.
“김소전은 어딨어? 오늘 퇴소잖아.”
“미국 갔습니다.”
“군대 나오자마자 무슨 미국을가!”
“그게…. 박현민이가 매니저 사주해서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단장이 새로 잡은 볼펜이 또 한 자루 부러진다.
“내가 해결할게. 다른 선수들 연봉협상 서둘러”
* * *
오랜만의 외출. 대한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연말까지 감금되어있던 죄인이 짧은 가석방을 받고 매연 가득한 바깥 공기를 마시며 기뻐한다.
“김소전 내놔”
자주 오던 카페…. 종종 전화는 했지만, 얼굴은 오랜만에 본 여자가 보자마자 다른 남자를 입에 올리자 남자의 기분이 나빠진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박현민이랑 둘이 빼돌렸잖아.”
“난 모르는 일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기가 벌인 뻘짓을 들킨 남자가 과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부정을 한다.
“이번엔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 연봉도 5년 차 최고액 넘겨 제시할 거니까 빨리 도장 찍으라고 해요”
“어허.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남자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물건을 사려면 방법이 없는 여자가 한발 물러선다.
“원하는 걸 얘기해요”
“실은… 노경준도 계약했어”
“뭐?”
“노경준도 계약했다고. 그래서 경준이도 소전이랑 미국 가는 비행기 같이 탔거든. 마무리 훈련 좀 빼줘라.”
“이XX가”
한동안 평안했던 카페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커피잔을 들고 벌떡 일어난 여자. 구석 자리임에도 주변의 시선이 쏟아진다.
“조 단장. 앉아 앉아. 사람들 많은데 창피하게”
벌떡 일어났던 착한 여자가 남자의 말을 듣고 다소곳이 자리에 앉는다.
“그래. 여기서 살인을 하면 여러 사람 피곤하니까 나갑시다. 묫자리 어디다 봐놨어요? 거기서 묻어드릴게”
여자의 섬뜩한 사랑 고백에 식겁한 남자가 당당하게는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소전이는 7억6천, 경준이는 2억3천. 에누리 없이 쿨거래 갑시다.”
“흐흐흐흐흐… 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여자. 미쳐버린 듯 웃는 여자를 보는 남자의 얼굴이 걱정스럽게 변한다.
“조…. 조 단장 왜 이래…. 조금 깎아줄까?”
남자가 결국 자기돈 쓰는건데 내가 왜이래야 하지 고민을 할때 쯤 웃던 여자가 표정을 싹 바꾸고 웃음의 이유를 알려준다.
“아니. 두 놈을 잡아다 패버릴 생각 하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그냥 패면 재미없으니까 10까지 셀게. 10세고 잡으러 갈 거니까 지금 도망가. 흐흐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