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후반기 악재
한 달여 행복했다. 거의 매일. 아무리 안 와도 일주일에 세 번은 오던 진상 커플이 한 달 동안 발걸음을 끊었다.
첫 일 주일은 언제 오려나 가슴이 콩닥거리고 밤에 잠도 안 오고 그랬지만 이주가 될 때쯤부터 마음이 편해지더니 역대 최고의 성적을 보낸 올림픽을 보면서 마음의 병까지 싹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을 크게 외치면서 보낸 한 달.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부동산에 내놓았던 매물도 거뒀다.
다시 행복. 권리금을 더 받아주겠다며 아쉬워하는 부동산 사장님의 말을 뒤로 하고 카페를 처음 시작했던 그때 그 마음으로 새벽부터 카페 문을 열고 매장 구석구석을 청소한다.
청소하는 김에 창고까지 다 드러낸다. 오랜만에 묵은 때를 쭉쭉 빼고 정리를 하는데 뒤통수가 따갑다.
“어서 오세요”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어 카운터에 나가보니 온몸에 음습함을 가득 채운 꿈에서 볼까 무서운 그놈이 서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안 시리게요”
그놈이 내미는 카드에 손이 떨린다. 부들부들 떠는 손을 놀리려는 듯 그놈도 힘없는 발걸음으로 언제나 전세 내던 구석 자리에 들어간다.
떨리는 손으로 커피인지 쌍화차인지 모를 이상한 음료를 만들자…. 검은 옷에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를 쓴…. 꿈에도 나올까 무서운 그녀가 들어온다.
“아아. 얼음가득이요”
커피머신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을까…. 눈에 눈물이 고인다….
“너…. 너…. 사람을 골방에 감금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너 고소할꺼야!”
한 달여 만에 여자를 만난 남자가 보자마자 소리를 지른다. 커피숍 다른 손님들이 슬쩍 쳐다보지만, 여자를 보는 남자의 시선은 떠날 줄을 모른다.
“아. 고소? 그것부터 물어봐야지. 그놈 고소 진행 상황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야! 지금 그게 중요해?”
“어. 그게 중요해”
오랜만에 만난 남자에게 일 얘기부터 꺼내는 여자. 남자의 실망감이 극에 달하지만 할 이야기는 해줘야 하니 사실관계를 털어놓는다.
“김소전이 발건놈. 미주법인에서 잘 잡아두고 있지. 일본 외무성이 개입한다고는 하는데 최대한 잡아두라고 시켰어.”
“김소전이 아니고 노경준”
“아. 노경준”
오랜 독방 생활을 끝내고 나온 남자가 세상 적응에 어려움을 겪자 여자가 바로 잡아준다.
“하여간. 업무상 과실치상과 폭행을 같이 엮어서 붙잡아 두고 있어.”
“그게 같이 적용됨?”
“어차피 풀려날 건데 이것저것 다 건드리는 거지. 우리가 그런 건 잘하잖아.”
일이 걱정되다 남자의 직업이 뭔지 생각이 난 여자가 크게 반발하지 않고 수긍한다.
“그러면 그놈은 얼마나 미국에 잡혀있어요?”
“목표는 앞으로 한 달. 이런 전례가 없다 보니 일본 외무성도 대처가 잘 안되는 모양이야. 일본 애들 일하는 게 그렇지 뭐. 걔들은 전례가 없으면 진행이 안 돼.”
“일본 애들 머리 좀 아프겠구먼”
연애와 야구 얘기만 안 하면 쓸만한 남자를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 기특한 마음에 선물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남자가 산통을 깨버린다.
“남 걱정은 그만하고 우리 팀은 어쩔 거야?”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이 안 되게 생겼냐?”
“걱정한다고 해결도 안 되니까 그냥 신경 끄세요”
말을 그렇게 하지 마! 여자의 표정도 좋지 않다.
“노경준자리 어쩔 거야? 방법 있어?”
“돌려막아야지”
“돌려막으려도 쓸 자원이 없잖아.”
“왜 없어. 박동수 있잖아.”
남자를 멍청하게 바라보는 여자.
“박동수 부상 이후로 연속출장이 안 되잖아요.”
“그럼 어쩔 건데?”
“우선 박동수하고 양규환으로 막아보다가 안 되면 1루에 황경철을 우익으로 돌리고 노아를 중견수로 써봐야지요.”
“노아? 걔가 중견수를 어떻게 봐! 눈이 없어? 우익수도 힘들 애를 어떻게 써!”
“그럼 어째요. 아무리 중견수 수비가 중요해도 박동수고 양규환이고 타격이 아예 안 되는데. 돌려가면서 써봐야지”
속이 터질 것 같은 남자가 커피를 쭉 들이켠다. 순간 번쩍 떠지는 눈. 커피잔을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트레이드하자.”
“안 해봤겠느냐고요. 카드가 안 맞아요.”
“왜. 카드를 높여서라도 맞춰야지 지금 우리가 급한데”
“이진호나 김이문 내놓으래요. 그 밑으로는 말도 못 붙여요.”
“누굴 주길래?”
“김민상”
“워호스 김민상? 36살 먹은 할아버지?”
“김민상에 이진호. 콜할까요?”
남자가 다시 커피를 벌컥 인다. 또다시 눈이 번쩍 떠지는 남자. 다시 한번 커피잔을 지긋이 바라본다.
“플랜B는?”
“임선엽 유격수에 김소전 중견수. 시뮬레이션 해보면 이쪽이 타격 생산성이 더 낳아요. 실점도 더 줄어들고”
남자가 머리를 쥐어뜯는다.
“넌 뭐 하는데 외야수도 못 키웠어!”
“여기가 무슨 메이저야? 선수를 키우려고 싹수가 있어야 키우지! 그나마 너님이 망쳐놓은 팜 내가 이만큼이나 만든 거야!”
잠시 소강상태를 가졌던 커플의 목소리가 커진다. 주변 손님들이 사장님한테 컴플레인을 걸지만 정신을 놓고 있는 사장님은 들어줄 여력이 없다.
“감독은 뭐래?”
“경준이도 경준인데, 조영근이 더 안 좋대요.”
“거긴 원래 안 좋잖아.”
“후반기부터는 주당 2경기 내로 조절해준다네요.”
“타자가 무슨 선발투수야? 연봉이 얼만데 주당 2경기야!”
“그만큼 안 좋다고! 너님이 우리 오빠 그 지경을 만들어 놨잖아!”
자기만 혹사한 것도 아닌데 모든 책임을 자기한테 떠미는 여자에게 화가 난 남자.
“조영근 니가 꼬셔서 데려왔잖아.!”
“난 안 데려오려고 했는데 네놈이 데려오라고 했잖아.!”
“그땐 니가 운영팀장이니까 FA 데려오는 건 운영팀장이 할 일이지!”
“니가 시켰잖아!”
끝나지 않는 싸움. 서로의 감정만 사나워진다.
“좌익수 수비는 누가 들어가? 박정환이나 성현범”
“야 박정환은 타구 반응은 되냐! 그리고 성현범은 1루수야!”
“아니면 김도식 컨버젼”
“시즌 중에 3포수를 좌익수로 컨버전 시키는 생각은 어떤 놈 머리에서 나오는 거냐!”
“니친구”
“뭐?”
여자가 남자 말고 남자친구와 만나고 돌아다닌 사실을 알게 된 남자가 분노하기 시작한다.
“나는 골방에 가두고 넌 현민이 만나고 다닌 거야!”
“만나고 다니다니 내년 외국인 선수 수급 때문에 만나서 차 한 잔 한거지”
자기 떼 놓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한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는 여자에게 화가 난 남자.
“그놈이 면회 왔을 때 나한테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내년에 누굴 데려오게?”
“우리가 뒷돈 주지 않는 한 좋은 선수는 못 데려올 거 같아서 내년부터는 육성형 용병 데려오게. 그놈 그래도 유망주들은 좀 데리고 있잖아요.”
커지는 남자의 목소리
“나 없이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작당 모의를 하려고 날 골방에 가둔 거지! 역시 그런 거였어!”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남자에게 손가락으로 앉으라고 지시하는 여자
“대한 호텔 펜트하우스가 언제부터 골방이었어? 거기서 야구 말고는 다 할 수 있게 해줬는데 왜 이래? 거기서 야구 끊고 투자에만 집중하니까 한 달 만에 수익률이 320%가 나왔다면서?”
여자가 자기 뒷조사한 걸 안 남자가 다시 화를 낸다.
“누가 그래! 나 한희승이야! 한 달 동안 주가조작을 하는데 320% 벌면 인건비나 나올 거 같아? 공식적으로 320이지 아직 만기 안 온 옵션까지 더하면 10배는 더해야지! 너 때문에 야구 못 봐서 저것밖에 안 나온 게 한이다.”
남자가 돈 잘 번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아진 여자.
“그러니까 야구는 저한테 맡기고 주가조작이나 잘해요. 내 돈도 거기 들어있는 거 맞죠? 돈 벌었다는 소식 들으니 간만에 기분이 좋아지네.”
남자에게 볼일을 마친 여자가 자리를 먼저 뜨고 남자가 남은 커피를 몸서리치면서 천천히 음미하고는 일어난다. 입안 가득한 커피 향을 느낀 남자가 천천히 바리스타에게 향한다.
“사장님. 오늘 커피 최고였어요. 나중에 레시피좀 알려주세요.”
진상이 오고 난 뒤 하루종일 사약보다도 맛없는 커피를 줬다고 컴플레인을 들었던 카페 사장이 다시 부동산명함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 * *
- 긴 올림픽 브레이크를 마치고 2028시즌이 재개됩니다.
-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왔죠. 20년 만에 다시 금메달을 가져왔어요
- 야구의 인기가 사그라든다는 분석이 있었는데 베이징키즈처럼 LA키즈들이 다시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 그렇겠지요. 벌써부터 리틀야구단에 문의 전화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팀에 돌아와 리그 경기를 준비한다. 1위를 놓고 순위 싸움이 치열한데…. 우리 팀은 분위기가…. 개판이다.
“라인업 나왔다.”
- 1번. 김소전(SS). 2번. 라정안(3B). 3번. 노아(RF). 4번. 황경철(1B)…)
한 달을 쉬고 첫 경긴데 조영근 선배가 못 나온다. 조영근뿐만 아니라 박재호, 정현기도 벤치에서 출발한다. 내가 나가고 주장이 나가도 3, 4번에서 해결해 줄 것 같은 생각이 전혀 안 든다. 그나마 앞에 경준이라도 하나 있으면 한 번씩 기회를 만들 거 같기도 한데…. 갑갑하다.
- 이한승! 우중간을 갈라놓습니다.
- 랩터스 시프트를 걸었는데도 그사이를 통과하네요
- 1회부터 좋은 기회를 맞이하는 폭스!
박동수 선배…. 그 수비 잘하던 선배가 공을 향해 달리지를 못한다. 그나마 수비센스로 커버를 하긴 하지만 그러기에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 지금은 우익수가 잡아줬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노아 선수 타구 판단이 잘못됐어요
중견수 수비 범위가 좁으면 코너 외야수라도 범위가 넓어야 하는데 우리 우익수는…. 수비하면 안 된다. 쟤는 재능이 없어. 그냥 지타다.
- 이인성! 2루수 키를 넘기는 안타! 1루 주자 3루까지 들어갑니다. 연속안타로 기회를 잡는 폭스!
- 폭스가 휴식기 동안 준비를 잘한 것 같아요. 선수들 몸놀림이 가벼워 보여요
1루 황경철 선배의 수비 범위가 좁다 보니 민수경선배가 커버를 깊게 들어간다. 그러니 타구에 대한 반응속도가 떨어진다.
총체적 난국이네….
- 김인경의 큰 타구! 좌익수 자리 잡습니다. 김민구 놓쳤습니다! 공을 놓치고 마는 김민구! 3루 주자 득점! 1루 주자 3루는 가지 못합니다.
- 바람이 좀 불었죠. 김민구 선수 낙구 위치를 잡았는데 마지막에 공이 흔들렸어요.
가지가지 한다. 평범한 좌익수 플라이. 잘 잡았으면 홈 승부가 가능한 희생플라이. 중계플레이 하려고 정확히 일직선상에 딱 기다리고 있는데…. 저걸 놓치다니…. 외야수가… 알바 외야수도 아니고 전문 외야순데…. 민구 선배…. 수비를 기대하지 않지만, 기본은 해주셔야 하는데….
- 13:2 대승을 거두는 폭스. 랩터스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폭스였습니다.
- 폭스의 경기력도 좋았지만, 오늘은 랩터스가 자멸하는 모습이었어요. 노경준선수 부상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오늘 경기네요
져도 잘 져야 하는데 너무 크게 졌다. 아무것도 못 하고 너무 크게 졌다. 이건 좀 아닌데.
진경기의 락커는 원래 침울하다. 안 그래도 무거운 공기가 가득 들어차 있는데 힘든 이야기가 또 들린다.
“선수단 주목”
경기 후 샤워하고 다들 퇴근 준비를 하는데 주장이 가운데 서서 공지한다.
“박정환 선수가 햄스트링이 올라와서 7일 자리 부상자명단에 올라갔습니다. 우선 7일인데 오래갈 것 같습니다. 다들 모자에 백넘버 28번 새겨주세요.”
경기도 졌는데 백업 중견수도 부상이네…. 후반기 우리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