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최악의 한일전
대만이 제일 어려웠다. 대만까지 꺾으며 확고한 1위 자리를 유지하자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멕시코와 도미니카까지 꺾자 2008년의 전설이 소환되기 시작한다.
그 옛날 전설을 재현하기 위해서 남은 팀은 하나···. 언제나 짜증을 유발하는 그 팀이 다음 상대로 나타났다.
- 무패가도를 달리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숙적 일본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만났습니다. 언제 만나도 절대 질 수 없는 경기. LA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보내드립니다.
- 두 팀 다 결선 토너먼트 진출은 확정을 지었어요. 이번 경기 결과에 따라서 토너먼트 상대가 결정되거든요. 우리도 지면 골치 아파져요
- 그렇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쿠바와의 경기, 지면 미국과의 경기가 결정됩니다. 첫 경기에서 이겼지만, 주최국인 미국과의 경기는 부담스럽습니다.
- 미국도 우리와의 첫 경기 이후 전승이거든요. 우리와의 경기에서 패배하고 정신을 차린 모습이에요. 4강보다 높은 곳에서 만나야 해요
덕아웃 반대편의 일본도 표정이 진지하다. 우리가 미국을 만나기 싫어하는 것만큼 일본도 미국을 만나기 싫어하는 듯한 표정이다.
왜들 미국을 싫어하는 거야? 자유의 나라. 직구의 나라. 정면승부의 나라 미국을 왜 싫어하는 거야. 나는 딱 좋은데
- 안타네요. 3회 초 시게노부 선수에게 2루타를 맞고 마는 대한민국
- 잘 던졌어요. 잘 던졌는데 시게노부선수의 배트컨트롤이 좋았어요. 타자가 저런 공까지 쳐 내면 투수는 던질 데가 없어져요. 좋은 타자네요
갑갑하다. 일본 놈들 야구를 하는 게 아니라 목을 조르는듯한 기분이다. 공격이건 수비건 상대를 질식시킬 듯 압박하는 야구. 우리 엄마가 괜히 일본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어디서 이딴 잔기술을···.
- 유키치의 잘 맞은 타구! 유격수 백핸드로 잡아서 2루로 2루에서 1루! 더블플레이! 김소전과 박민기의 더블플레이! 여기서 이닝을 끝내는 대한민국의 키스톤이었습니다.
- 김소전이 잡아낸 것도 대단하고 박민기의 퀵턴도 빨랐어요. 일본만 수비를 잘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도 상대의 기세를 수비로 꺾을 수 있는 실력이 있습니다.
공을 깍아친다. 요즘은 각을 만들어 타구를 띄우는 게 대세인데 일본 선수들 공을 깎아서 백스핀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애매하게 이질적인 타구들. 하여간 사소한 거 하나까지 마음에 안 든다.
- 8회 말 대한민국의 공격입니다. 스코어 0:0 0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 양 팀 다 출루는 하는데 마지막에 결정을 못 져주고 있어요. 이럴 땐 먼저 선취점을 내는 팀이 승리를 가져가요
시프트, 압박 수비, 페이크번트···. 저 일본 것들 갖가지 치사한 방법이란 방법은 다 들고나온다.
우리 팀도 저렇게 맞불을 놓고 싶지만···. 선수들 이 저런 다양한 작전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된다. 당장 내 뒤 타자를 봐도 2번 타자라는 놈이 보내기번트를 할 줄 모른다···. 고민하지 말고 그냥 때리자.
- 2루수 키 넘어가는 안타! 원아웃 이후 출루에 성공하는 대한민국입니다.
-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공인데 잘 잡아당겼어요. 이번 대회 김소전의 컨디션은 무섭네요
내가 바깥쪽공 못 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연신 도망가는 공만 던져댄다. 바깥쪽 공을 못 치는 건 몸쪽 높은 공하고 섞여서 들어올 때 스탠스 조정이 안 되니까 대응이 어려운 거지 지금처럼 투수가 무서워서 몸쪽 높은 공을 안 던질 때는 앞발을 집어넣으면서 때릴 수 있는데···. 너희도 전력분석이 완벽하진 않구나···.
- 1사 주자1로. 주자는 김소전, 타석엔 노경준입니다.
- 랩터스의 테이블세터죠. 노경준 정교한 타격보다는 멀리 치고 빨리 달리는 타자예요. 팀에서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 노경준선수 첫 경기 홈런 이후로는 기록이 썩 좋지 않습니다.
- 노경준 같은 유형은 안타 한두개로 평가할 선수는 아니거든요. 기회가 왔을 때 쳐주면 됩니다.
저···. 저놈···. 기대가 안 된다. 경준이의 최근 폼이 타선에 들어있으면 안 되는 폼인데 감독이 명장병에 걸려 빼지도 않고 계속 2번에 박아넣는다.
원아웃에 1루. 어차피 경준이는 아웃당할 거니까···. 차라리 투아웃에 2루가 낫겠지. 뛴다.
- 크게 떨어지는 변화구! 1루 주자 김소전 2루를 노립니다. 하치로 포수 2루 송구. 김소전이 공보다 먼저 2루에 들어갑니다.
- 김소전 선수 노경준선수가 타석에 있을 때 잘 안 뛰는데 이번엔 일본 배터리의 허를 찔렀어요.
- 일본의 아스히사투수도 허탈해하는 표정입니다.
- 노경준선수가 직구에 강점이 있거든요. 그래서 뛰는 척만 하면서 직구를 던지게 하는 김소전인데 이번에 뛰었어요. 이제는 노경준이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
내가 변화구 타이밍에 투구폼도 뺏어서 공보다 훨씬 빨리 2루에 들어왔는데 일본의 2루수가 내 등짝을 강하게 태그한다.
여기 손도 안 닿는 덴데···. 아프잖아! 슬라이딩하다 쓸린 가슴팍보다 등짝이 더 아프네. 너 다음에 2루 와라. 내가 복수해준다.
- 일본의 외야수 전진 수비를 합니다.
- 한점도 안주겠다는 거지요. 여기가 승부처네요. 여기서 결정을 내줘야 해요
웃어? 경준이가 웃는다.
저 멍청한 놈이 당겨지는 외야를 보면서 웃는다.
야 이 멍청아 지금 웃을 때가 아니고 투수 타이밍을 맞출 때라고!
- 스윙. 배트 크게 돌려보는 노경준
- 뭔가를 노리는 것 같은데 뭔질 모르겠네요. 배트 각도가 애매한 거거든요. 확실히 하나만 결정해야 해요
그럼 그렇지 너한테 뭘 바라냐.
- 노경준 바깥쪽공을 결대로 밀어냅니다. 우익수 키 넘어가는 타구! 2루 주자 3루 돌아 홈까지 타자주자 2루~ 2루를 크게 돌아~ 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 넘어졌어요. 발에 걸린 것 같은데요
- 노경준 괴로워합니다. 괴로워하면서도 왼팔은 2루 베이스를 붙들고 있습니다.
- 뭐죠? 무슨 일이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살다 보니 경준이가 변화구를 치는 것도 본다. 우타자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쭉 밀어서 때려낸다. 앞으로 전진해 들어왔던 외야수 키를 넘어가는 타구. 어지간하면 3루. 무식한데 발만 빠른 경준이라면 상대 실책이 섞이면 홈까지도 들어올 수 있다.
내가 빨리 가서 떨어져 있는 배트를 치워줘야 한다.
타구를 보지도 않고 3루를 밟고 홈까지 들어간다. 아무리 경준이가 잘 쳤다고는 해도 선취점 내는 주자가 들어가는데 뒤 타자가 나는 봐주지도 않고 눈 크게 뜨고 경준이만 바라본다.
쳇. 역시 득점보다는 타점이다.
홈을 밟고 떨어진 배트를 주우러 몸을 돌렸는데. 2루에 곰이 누워서 뒹굴고 있다. 멍청한데 둔해서 어지간하면 아픔을 못 느끼는 경준이가 무릎을 부여잡고 아파한다.
배트 따위 그 자리에 두고 2루로 뛰어간다.
- 트레이너 올라와 상황을 살핍니다. 충격이 커 보이는데요
- 느린 화면 다시 볼 수 있나요? 잘 치고 잘 달리고 있었거든요. 혼자서 넘어진 것 같지는 않고 유격수 후미마로선수하고 충돌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경준아. 손 잠깐 치워봐. 만져보게”
“으… 으···.”
“안돼. 가만히 있어. 안 되겠다.”
급하게 달려온 트레이너 형이 덕아웃에 크게 엑스 표시를 하고는 경준이 무릎에 스프레이 한 통을 다 뿌린다.
무릎이 차갑다 못해 얼어붙은 다음에야 뒹구는 걸 멈춘 경준이. 여전히 펴지지 않는 얼굴로 나를 보고는 억지로 웃음을 짓는다.
“들어가서 쉬고 있어. 내가 한점 꼭 지켜줄게”
“결승전이면 끝까지 뛸 건데 예선이니까 참을게요. 미안해요. 형”
오늘은 질 수 없다. 절대 질 수 없는 날이다.
- 발에 걸렸군요
- 마지막에 발을 내밀죠. 저거 일부러 건 거예요. 이래도 됩니까. 우리가 야구를 하는 거지 격투기를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무슨 추탭니까!
경준이가 들것에 실려 가고, 2루에 대주자가 들어간다. 그라운드가 정리되자 주심이 경기를 속행시키려 한다.
- 기인환감독 그라운드로 나옵니다.
- 나와야지요. 심판들 경기 운영 이렇게 하면 안 돼요
- 발을 걸었다고 어필을 하는 듯합니다.
- 걸었어요. 유격수 퇴장시켜야 해요
저 심판 놈들 야구심판 처음 해보나 경준이가 실려 나갔는데 경기를 그냥 진행하려고 하네
- 기인환감독이 주심을 밀쳤어요. 퇴장! 감독퇴장입니다.
- 이게 왜 우리 감독이 퇴장을 당하나요? 경기 운영 이렇게 하면 안 돼요. 멕시코 주심이거든요. 이러면 안 됩니다.
뭐야? 지금 뭐 하는 거야?
- 덕아웃에서 우리 선수들 나옵니다. 사건이 커집니다.
- 이렇게 진행되면 안 되거든요. 우리 선수가 발에 걸려 부상을 당했는데 아무 조치가 없으면 경기를 어떻게 하나요?
어이가 없어서 심판에게 왜 그러는 건지 물어보려 그라운드로 올라가자 날 따라 우리 팀 선수들이 모두 우르르 몰려나온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뒤에 선수들이 다 나오니 든든하니 기분이 좋네
- 일본 측 덕아웃은 고요합니다.
- 우리 선수들만 나왔어요. 오히려 수비하던 선수들이 철수했어요
저놈들은 뭐야? 내가 심판 놈하고 유격수 XXX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사라지면 어쩌자는 거야
“돌아가”
유격수를 잡을 수 없으니 주심에게 다가가는데 퇴장당하고 돌아오는 감독이 맨 앞에 있는 내게 돌아가라고 한다.
“감독님 이건 아니잖아요”
“돌아가”
감독 성격 더럽다는 소문 다 거짓말이었어. 퇴장당했다고 바로 꼬리말고 돌아오다니···. 실망이다.
내 눈에서 불꽃이 일어나는데 감독이 나를 밀어내면서 입을 연다.
“이런다고 해결되는 게 없다. 이겨라. 이기고 와라. 이러고도 못 이기는 게 저놈들은 더 아플 거다.”
소심한 감독 놈. 선수가 저 꼴을 당했는데도 그냥 묻어버리다니···. 속이 터져 하늘에 소리를 질러본다.
- 감독이 선수들을 돌려보냅니다. 김소전선수가 굉장히 화가 난 거 같습니다.
- 그럴 만해요. 김소전과 노경준선수가 굉장히 친하거든요. 화날 만해요
- 김소전선수 소리를 지릅니다. 저런 모습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 리그 최고의 순둥이 김소전인데 오늘은 저럴 만하네요. 이해가 돼요. 저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선수들은 어떻겠어요
경기가 재개되고 어수선한 경기가 이대로 마무리된다. 나뿐만 아니라 복수심이 불타오른 투수들도 빈볼을 불사하며 일본 타자들을 압박하여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 경기를 끝냈다.
예선 전승 1위. 1위인데도 기분이 더럽다.
경기가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서 누워서 뭐가 좋다고 어깨춤을 추고 있는 멍청이.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형. 차대영 선배 공 죽이지 않아요? 한국에서보다 더 좋은 거 같아요”
“그게 좋냐?”
“좋지 안 좋아요?”
“너 한국 가면 그 공 상대해야 하는 데 좋냐?”
그제서야 얼굴표정이 찌그러지는 경준이.
“형 그 공 어떻게 치죠”
“어떻게 치긴 못 치지”
“그럼 어떻게 해요?”
“칠만한 공 던질 때까지 버텨야지. 그 공은 못 쳐”
방금전까지 흥겹게 추던 어깨를 축 늘어트린 경준이
“넌 의사가 뭐래냐?”
“사진 더 찍어봐야 하는데 십자인대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데요. 헤헤”
웃으면서 무서운 얘기를 하는 멍청이
“웃지 마. 정들어”
“남은 경기는 못 뛰겠죠?”
“못 뛰지”
“형은 뼈 부러지고도 뛰었는데. 아쉽네요”
그거랑 이거랑 똑같냐. 너는 지금 걷지도 못하는데
“올림픽에서 잘해봐야 연봉 안 올라. 돌아가서 리그 경기나 뛸 생각해.”
“헤헤. 아쉽네요. 저도 결승전에서 이기고 금메달 받아보고 싶었는데”
멍청한 놈. 경기 끝나면 빨리 씻는 게 좋지, 남아서 시상식하고 샴페인 터트리고 귀찮다. 착한 내가 메달만 가져다 줄 테니까 편안히 침대에서 쉬고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