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시즌준비
“감독님 이번 시즌 괜찮을까요?”
“하하하. 이 전력으로 괜찮겠냐니요 단장님”
애리조나의 뜨거운 태양 아래 큰 챙 달린 모자를 쓰고 얼굴을 꽁꽁 싸맨 단장이 덕지덕지 흰 선크림을 떡이 되게 바르고 시커먼 안경을 쓴 감독에게 이번 시즌 예상을 묻는다.
매사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이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어이없어한다.
“우리가 지난 시즌 디펜딩 챔피언이에요. 호랑이가 꼬리말고 도망갈 수는 없잖아요”
“단장님. 지난 시즌까지는 우리 팀 연봉총액이 1등이었습니다만 이번 시즌엔 4등까지 떨어졌어요. 그나마도 우승했다고 은퇴 고민하던 노장들 FA 계약해 주고도 4등이에요. 이런 팀을 만드시고 성적을 바라시면 도둑이에요”
우승 트로피 두 번 들었다고 단장 알기를 우습게 아는 감독이 가감 없이 속에 담은 말을 쏟아낸다.
“이번 시즌은 포기하시죠. 단기 계약한 형들이 업어 키운 동생들 마지막으로 돌봐주는 시간입니다. 성적을 내고 싶어도 더 갈아 넣을 에너지가 없어요”
랩터스의 전설인 감독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단장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
“지는 경기는 재미없잖아요. 무기력하게 지는 건 볼 수가 없어요.”
“그건 저놈들이 할 일이죠. 같이 보시죠. 이 팀이 다시 외부 영입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팀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저 어린 친구들이 자기들 세상을 만들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안 궁금해요. 무조건 이 전력으로 이겨야 해요. 돈터스는 변수가 너무 많아요. 이번 시즌처럼 계획이 조금만 어그러져도 회복 불가에요. 자생할 수 있는 팀이 되어야 합니다.”
머릿속에 승리만 가득 새겨넣고 있는 단장을 감독이 빤히 쳐다본다.
“단장님은 야구 말고 다른 건 생각 안 하세요?”
“네 전 야구뿐입니다.”
“그런 사람 한 명 더 알고 있는데 두 분 다 안타깝네요”
“그런 사람이 또 있나요? 누구요? 소닉스 성 단장? 울브스 김 단장?”
단장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감독. 조용히 한 사람을 입에 올린다.
“구단주님이요”
“미쳤어요. 어디 그런 XX랑 비교해요!”
“하하하. 봐요. 욱하시는 것까지 똑같으시잖아요”
“사과하세요. 이건 묵과할 수 없어요. 사과하세요”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있는 감독이 현실을 보여준다.
“단장님도 많이 보시지 않았어요? 구단주님 야구 이야기할 때 말고는 기운이 없어요. 모든 말에 야구 이야기가 섞여 있죠.”
“그게 뭐요!”
“그러니까요. 그게 뭘까요. 그분도 야구 말고 다른 데는 정 두는 데가 없어 보이셔서요. 단장님도 그렇고요”
“난 아니라고요!”
“아 그래요?”
여전히 실실 웃음을 흘리며 감독이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가리킨다.
“제 눈엔 단장님도 야구 말고 다른데 정주는 거 못 본 거 같은데요? 그리고 저기 오시는 우리 운영팀장님도 언제부턴가 단장님 같아요.”
“갑자기 왜 홍지까지 끌고 들어오세요!”
세상을 먼저 살아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감독이 야구 말고는 경험이 부족한 단장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당부를 한다.
“단장님도 가끔은 야구에서 벗어나 놀러도 가고 사랑도 하고 하세요. 야구에 미쳤다가도 잠시 도망갈 데도 있어야 하니까요. 인생은 야구가 아니에요.”
뭐라 하고는 싶은데 딱히 반박을 못 하는 단장이 곤란해 하고 있을 때 그들 앞으로 화가 잔뜩 난 표정의 운영팀장이 나타난다.
“SBC에서 스프링캠프 취재 왔습니다.”
“그게 오늘이야? 다음 주에 오기로 한 거 아니었나?”
“맞아요. 그런데 신입 아나운서가 무작정 쳐들어왔어요”
말을 안 해도 누군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단장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걔는 진짜 김소전 스토커야 뭐야? 용건이 뭐래?”
“인터넷 방송용 특집이라네요.”
“국장이나 CP하고는 얘기해봤어?”
“봐달래요. 그리고 랩터스랑 업무협조도 하기로 했으니 좋게 좋게 넘어가잡니다.”
구단과 방송국 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생각난 단장이 입술을 깨물고는 인내의 시간을 갖는다.
“간단히 하고 넘어가자”
“그러고 싶은데 쟤가 단장님 인터뷰를 하겠다네요?”
“아 귀찮게 진짜. 가자. 대충해주고 오자”
“그게요. 사전질문지 줬는데 이게 문제가 좀 있어요”
“뭔데?”
운영팀장에게서 질문지를 받아든 단장이 두어줄 읽고는 종이를 구겨버린다.
“이게 미쳤나?”
“아시잖아요. 쟤 제정신 아니에요”
* * *
내가 선수인지, 교과서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간다.
뭐 하나만 하면 그대로 따라 하는 멍청이들을 뒤에 두고 훈련을 하려니 부담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다.
‘펑’
프리배팅에 호쾌하게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타구. 내 뒤의 갤러리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와~ 형 나이스샷~”
“완벽한 어퍼스윙이었어요. 내년 시즌에 PGA 진출하나요?~”
“아직도 날아가~ 와~ 서울까지 가겠다.~”
이쯤 되면 놀리는 거지? 이건 놀리는 게 틀림없잖아.
아무리 봐도 밤에 숨어서 훈련하든지 해야지…. 단체훈련시간을 빨리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배팅케이지에서 나와 제일 크게 소리 질렀던 놈을 대신 집어넣는다.
“헤드업 한 번에 하체운동 5세트씩이다.”
들어가는 후배한테 훈련의 질을 높여줄 마법의 주문을 외워주자. 후배의 훈련집중도가 확 올라간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자주 외워줘야겠다.
“루다의 첫 번째 스프링캠프 방문지! 지난 시즌 우승팀! 서울 대한 랩터스에 나왔습니다. 선수들이 한참 타격 훈련 중이네요”
케이지에서 나와 매의 눈으로 후배 놈이 헤드업되나 안 되나 째려보고 있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규환아~ 어깨가 들리니까 머리가 들리지. 어깨 닫아!”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지 안에서 머리가 몇 번 들리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내 뒤에서 누가 덮친다.
“자~ 다들 아시죠~ 우리 낭군님~ 김소전 선수가 여기 있네요~ 소전선수~ 루다가 안 보고 싶었나요?~”
오늘의 타겟 머리가 들리는걸 세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붙잡는다. 깜짝 놀라 확 밀쳐버렸다.
‘쿵’
“으악. 봤죠~ 여러분 봤죠~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삽니다. 구독 좋아요. 누르지 말고 김소전보다 야구 잘하고 잘생긴 사람 소개해달라고!”
“뭐. 뭐야? 넌 거기 왜 그러고 있어?”
내가 뭔가를 밀쳐버린 거 같아서 뒤를 돌았더니 서울에 있어야 할 루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여러분~ 미녀와 야수 다들 보셨죠? 미녀를 구하러 왕자가 와야겠어요? 안 와야겠어요? 루다는 넓은 마음으로 열려있으니 구하러 와주세요~ 구독 좋아요는 누르고~”
제정신이 아니야. 방금전에 누르지 말랬다가 누르랬다가. 저렇게 꼴사납게 나뒹굴면서도 저런 표정을 짓고 싶을까…. 왜 저러고 사나…. 이해가 안 된다.
“김소전 선수~ 보고 싶어서 왔어요~ 스프링캠프장 좀 소개해주세요~”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데 어느새 벌떡 일어난 루다가 내가 다가와 팔짱을 낀다.
내가 우리 엄마하고도 이런 거 안 하는데.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빼내고는 물었다.
“뭐야? 언제 왔어? 왜 왔어?”
“루다는 소전선수 보러왔죠~ 얼~ 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자 루다를 보고 있는 루다티비 친구들한테 인사해줄까요~”
사람이 곱게 미쳐야 하는데…. 이런 건 약도 없을 텐데….
“밥은 먹고 다니냐? 따라와 밥시간 다됐다. 밥 먹자”
“봤죠~ 여러분~ 봤죠. 소전선수가 루다를 이렇게 챙겨요~ 랩터스 스프링캠프 식당 구경 같이해요~”
정신과 의사가 영어로 뭐더라…. 미국은 의료비도 비싸다고 그랬는데…. 많이 나오려나….
머릿속에 돈 걱정이 가득한데 눈치 없는 후배님들이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여신님~ 진짜 소전이 형이랑 사궈요?”
“왜요? 왜요? 왜 그래요?”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세요. 소전이형 말 못 할 비밀이 있어요”
“소전이형 재미없어요. 식당 소개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식당까지 가는 길이 멀어서 그런지 뒤통수에서부터 들리는 소리가 많다. 너희들은 이따 마무리 훈련 기대해라.
자발적 노예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스토커를 공주 모시듯 수발을 든다. 훈련장 구석구석을 소개해주고 팀 내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술술 털어놓는다.
하다못해 자기들 소개팅하다 차인 것까지 이야기하면서 울고 웃고 난리도 아니다.
내가 저것들을 사람 만들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데 저것들은 사람이 될 생각이 없다…. 삶이 참 덧없네….
한참을 선수들과 떠들던 루다가 촬영팀을 다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금세 조용해진 훈련장. 시끄러운 게 없어졌으니 훈련을 다시….
“형. 여신님이랑 진짜 사궈요? 왜요?”
하…. 이 어지러운 놈
“그런 거 아니라고! 사귀고 말고 하는 거 아니라고! 그냥 아는 여자야”
“와. 인성. 진짜. 저렇게 예쁜 여자가 사귀자고 하면 넙죽 절해도 모자랄걸…. 아. 나쁜 남자 컨셉인가….”
“헛소리할 거면 가서 펑고나 더 받아. 힘이 남아서 입으로 올라가지?”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 그래도 너희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따라와 코치님한테 가서 펑고좀 쳐달라고 하자.”
“혀…. 형….”
요즘 훈련하면서 하나 배운 게 얘들은 펑고를 같이 받으면 말을 잘 듣는다. 까부는 놈들이랑 같이 펑고를 받으면 세상이 편해진다.
* * *
“루다가 랩터스의 얼음 여왕 조수아 단장님과 존재가 랩터스 김민중 감독님을 만나러 왔어요~”
훈련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SBC 신입 아나운서가 단장과 감독을 앞에 놓고 인터뷰를 시작한다.
첫멘트부터 마음에 안 드는 단장이 이어지는 질문들에 대해 군더더기 없는 단답형 대답을 내놓는다.
점점 심기가 불편해지는 아나운서. 화살을 감독에게 돌린다.
“감독니임~ 랩터스 진짜 우승할 수 있나요? 팀에 기둥뿌리만 뽑힌 게 아니고 솥단지에 젓가락까지 다 뽑혀 나갔는데 괜찮아요?”
사람을 앞에 팀 구성을 돌려가는 질문에 얼음 얼굴을 한 단장의 눈에서 불꽃이 서린다.
“어느 감독이라고 전력이 떨어지는 데 좋아하겠어요? 그래도 있는 전력으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랩터스 하면 돈으로 우승을 사는 팀인데 단장님 바뀌시고는 외부 FA 영입이 없어요. 이 상황 감독님 만족하세요?”
감독 옆의 단장이 주먹을 꽉 쥐는 걸 보면서도 웃으며 구단을 까는 아나운서의 말에 감독의 얼굴에 웃음기도 싹 사라진다.
“랩터스가 외부 FA 사들여서 우승할 때는 이길 줄 모르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달라요. 랩터스는 이기는 법을 아는 팀이고 다른 어떤 팀보다도 기준이 높은 팀입니다. 충분하진 않지만 해낼 수 있는 팀입니다.”
감독을 통해 구단을 돌려 까고 싶었던 아나운서 감독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감독님. 전문가들의 이번 시즌 랩터스 예상 순위가 5강권도 간당간당하는데요? 감독님의 이번 시즌 목표는 어디까지인가요?”
1선발 빠지고 주전선수들이 40을 넘나드는 스쿼드를 가진 랩터스에 예상 성적을 물었다.
지난 시즌 어찌어찌 우승을 하긴 했어도 팀 전체가 에이징커브도 모자라 조금만 무리하면 과부하에 헉헉대던 랩터스. 그 랩터스를 이끌어가는 수장의 입에서 공수표가 튀어나온다.
“랩터스는 우승팀입니다. 우승팀에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없어요. 이번 시즌도 랩터스는 우승만 보고 달릴 겁니다.”
감독의 선언에 사냥감을 포착한 여우가 추격전을 시작한다.
“선발진이 붕괴…. 내야에 생산성…. 코너 외야수 수비 범위…. 7점대 롱릴리프….”
분명 이번에 뽑힌 신입 아나운서가 어지간한 해설자는 명함도 못 내밀 적나라한 분석을 바탕으로 팀의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오자 적당히 대답하려던 감독도 진지하게 답변을 시작한다.
“5선발 10일 로테이션, 백업 내야수 벌크업, 2군 여포 1군 연착륙, 원포인트 릴리프 보직 변경….”
방송국에서 입만 살아있는 기레기들 말고 진짜 이야기를 할 상대를 만난 헛똑똑이가 우승팀 감독과 치열한 논쟁을 펼친다.
“감독님. 전부 다 IF잖아요. 야구에 '만약'이 어디 있나요? 그러면 다 우승하게요?”
“'만약'이 ‘만약’으로 끝나면 우승 못 하겠지요. 그렇지만 랩터스에는 만약을 진짜로 만들어 줄 선수가 있으니까요. 두고 보시죠. 이번 시즌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결과로 판단해주세요”
감독의 단호한 선언에 흐뭇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단장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