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09화 (109/204)
  • 109화. 대응

    아무리 스토브 리그가 단장의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의 전화에 랩터스의 단장이 전화기를 꺼버린다.

    평소 회의를 극혐하는 조수아 단장이 계속 터지는 구단 관련 기사에 또다시 팀장급 회의를 주재한다. 시즌 중이 아닌데 얼굴이 반쪽이 되다 못해 살이 쭉쭉 빠진 랩터스의 핵심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홍보팀장님. 김소전 기사 파악됐어요?”

    한 달 만에 피골이 상접한 홍보팀에서 쇠 긁는 소리를 내며 대답을 한다.

    “전일 신문에서 SBC 소스를 받아 냈습니다. 내일 SBC에서 이시윤 단독 인터뷰 내보낼 건데, 거기에 김소전 인터뷰가 같이 실립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홍보팀장의 대답을 듣자 단장의 기분이 더욱 사나워진다.

    “SBC 편집본 받아서 사전 검토해 보세요.”

    “해봤는데 바늘도 안 들어갑니다.”

    “최소한 김소전 부분이라도 들어내야 하잖아요! 담당 PD, CP, 국장까지 다 흔들어봤어요?”

    “다 해봤는데 담당이랑 직접 해결하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립니까! 방송국 밥 몇 년을 먹은 사람들이 핏덩이 어린애한테 떠미는 게 말이 돼요!”

    단장의 목소리가 회의실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울리지만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고 두 손 두 발 다 든 홍보팀장이 대답할 기운도 없이 퍼져버린다.

    이미 회의에 담당자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회의 참석자 모두가 오늘도 쉽지 않은 회의가 될 거라고 느낀다. 언제부턴가 랩터스에 모든 사건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흑의 장막…….

    팬들에겐 야구 여신, 구단에선 김소전 사생팬. SBC 아나운서 이루다. 이 이름이 나오는 순간 단장과 운영팀장이 동반으로 경기를 일으킨다.

    “운영팀! 김소전 지금 어딨어?”

    “소재지 확인 안 됩니다.”

    KBO 전 구단을 통틀어서 일 잘하기로는 1등인 여홍지 팀장이 미션에 실패했다는 소리를 하자 회의실에 탄식이 나오면서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여홍지 팀장 본인도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해보려고 하지만 조막만 한 작은 얼굴에 날 선 주름이 늘어간다.

    “집엔 가봤어? 김소전 어머니랑은 통화할 거 아니야?”

    “직원 하나가 24시간 붙어 있고, 저도 매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못 찾아!”

    “구단주님이 관여된 것 같습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회생활하면서 처음으로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을 만난 운영팀장이 절망감에 몸부림치면서도 보고를 이어 나간다.

    “그룹에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지만 다들 이 건에 대해서만은 회피합니다. 그룹에서 의도적으로 김소전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억울한 마음에 꽉 쥔 주먹을 꽉 쥔 운영팀장의 의견을 들은 단장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 XX. 팀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어…….”

    아무도 단장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가운데 이어지는 회의. 허공에 소리를 크게 한번 지른 단장이 선수단 재계약과 FA 계약을 서두르라는 지시를 빠르게 내리고 운영팀장을 데리고 단장실로 들어간다.

    “얘 어딨어?”

    문이 닫히자마자 단장이 날 선 질문을 하자.

    “미국 마이애미요.”

    운영팀장이 회의실에선 밝히지 않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 놓는다.

    “마이애미 어디?”

    “거기서부터 추적이 안 돼요.”

    “어디까지 동원했어?”

    “통신사 어지간한 임원들은 다 접촉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이에요. 처음엔 도와주다가 마이애미에서부터 멀어져요.”

    “그래서 구단주다?”

    “확실해요.”

    길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 랩터스 일 때문에 여홍지가 그룹 내 임원들과 접촉해서 불법이어도 못 가져오는 정보가 없었는데 일정 단계 이상 접근이 안 된다는 건… 확실히 더 높은 데서 압력을 넣고 있다는 소리.

    랩터스에 그 정도로 관심을 가지는 높은 놈은… 구단주 한 놈. 단장이 그놈이 범인이라고 확신을 하고 앞으로의 대응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FA는? 내부 FA들은 왜 계약 안 한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억지 부리는 거죠, 뭐. 다른 팀도 아니고 우리 팀에 선수 처우가 부족해서 계약 못 하겠다고 하는 건 사기에요.”

    다른 팀보다 3배 이상의 선수 복지 예산을 쓰는 랩터스의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면 운영팀장의 의견에 동의를 한다.

    “외부 FA 들은? 드래곤스에서 정한영은 꼭 데려와야 해”

    “그쪽도 에이전트에서 김소전을 들먹이면서 시간을 끌어요. 속내는 보장 금액인데, 4년 80억을 요구하고 있어요.”

    “미쳤구나. 우리를 바보 천치로 알고 있네.”

    이번에 랩터스가 FA 시장의 가장 큰손이 될 거라는 소문이 스토브 리그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떠돌았던지라 선수들의 몸값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는다.

    거기에 랩터스가 자팀의 스타 선수를 홀대한다는 이야기가 떠돌자 그걸 빌미로 랩터스에 추가금을 요구한다.

    “결국 직접 풀어야겠네.”

    “네. 직접 풀어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일하면서 한 번도 힘들단 소리를 하지 않았던 운영팀장의 말을 들은 단장이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40년 넘게 엉망진창인 랩터스야. 이제 겨우 진흙탕에서 나온 걸 멀쩡하게 돌려놓으려면 우리가 힘든 건 당연한 거야. 넌 소전이 옆에 붙은 여우에 집중해. 난 자기 집을 자기 손으로 부수려는 멍청이를 잡으러 간다.”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단장으로부터 이 사건의 가장 핵심이 되는 사냥감을 자기에게 해치우라는 명령을 받은 운영팀장의 눈이 다시 반짝인다.

    야구판에 단장 말고는 자기 상대가 없었는데 눈에 걸리적거리다 못해 판을 뒤집으려고 하는 여우를 사냥할 방법을 생각하는 운영팀장.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면서 전의를 다진다.

    “언니. 내가 여우 꼭 잡아 올게요.”

    * * *

    SBC 사장실에 여러 사람이 모였다. 사장쯤 되는 사람이 직원들까지 불러 모았을 때는 급에 맞는 상대가 나오기 마련인데 반대편에는 아직 20대의 작고 가녀린 랩터스의 운영팀장이 앉아 있다.

    “우리 초면이죠? 랩터스 조수아 단장만 미인인 줄 알았는데 운영팀장님도 아름다우시네요. 랩터스에서는 예뻐지는 물이라도 나오나 봅니다. 허허허.”

    “그럴 리가요. 예뻐지려면 방송국 물을 먹어야지요. 사장님만 봐도 방송국 물이 좋은 걸 알 수 있지 않나요? 드라마 국장님은 사장님을 왜 주연으로 캐스팅 안 하는지 모르겠네요.”

    자주 듣는 이야기지만 처음 보는 예쁜 여자. 예쁜 여자를 수도 없이 보지만 어딘지 모르게 똑같은 얼굴이 아닌 방송국에선 볼 수 없는 자연스럽게 예쁘면서 끌리는 여자에게 칭찬을 듣자 사장님의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이런. 오늘 제가 큰 보따리라도 하나 풀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팀장님이 큰 보따리를 가져오셨다니 이걸 어째야 하나. 우선 들어봅시다. 들어보고 오늘 내가 맛있는 저녁을 사지요.”

    법인카드로 긁을 걸 굳이 생색을 내는 사장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짓는 랩터스의 운영팀장이 말 그대로 선물 보따리를 쏟아낸다.

    “지, 진짜 이게 다 되는 겁니까? 야구단이 무슨…….”

    “야구단 앞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셔야지요. 저희 대한입니다. 그리고 구단주가 대한 금융 그룹 이사회의장이시고요. 대한이 빠지면 시총의 40%가 날아갑니다.”

    국장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나왔다가 예쁘장한 얼굴에 홀려서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뒤로 뉘이고 사업 계획을 듣고 있던 사장의 몸이 점점 앞으로 당겨졌다.

    그리고 브리핑이 끝났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확인을 구한다.

    “이거 돼?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대한전자, 대한자동차, 대한건설 전부 확인했고, 대한F&B에서도 가능하답니다.”

    “허허. 이게 무슨…….”

    실무자들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랩터스에서 제시한 사업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장이 다시 한번 세부 사항을 확인한다.

    “랩터스에서 제작비 50%를 대겠다는 거요? 제작비랑 별도로 잔여 광고 물량도 전부 소화하고? 확실한 거요?”

    “그것 말고도 옵션이 더 있는데 왜 안 말하세요?”

    랩터스에서 제안한 스케일은 사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규모였다. 1년간 제작비의 50%를 지원하는 것도 모자라 잔여 광고를 100% 소화하는 것은 기본. 이미 여기서 게임이 끝났어야 하는데 랩터스 TV 제작 지원 명목으로 1년간 추가 30억 지급. 더하기 방송국과 콜라보로 대한 그룹 식음료 프랜차이즈에 전용 상품 출시 후 수익 배분까지…….

    방송국 놈들은 가만히 땅 짚고 헤엄쳐도 월급이 따박따박 박히는 어처구니없는 제안. 이 정도면 먹고 죽는 한이 있어도 덥석 물어야 하는데 의심병 많은 사장이 돌다리를 두드려본다.

    “조건이 있을 텐데요?”

    “랩터스에 조금만 우호적이 되달라는 정도? 그게 다예요.”

    여전히 생긋거리면 말하는 여자에게 훅 빨려 들어가지만, 그간의 내공으로 금세 정신을 붙잡아오는 사장이 다시 한번 다그친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필요한 걸 얘기해 봐요.”

    그제서야 눈빛이 살짝 바뀌는 랩터스의 운영팀장.

    “진짜예요. 크게 바라는 거 없어요. 요즘 SBC가 랩터스를 너무 구박하길래 관계 개선 차 준비한 거예요.”

    돈다발을 싸 들고 온 사람이 구박받았다고 투덜대자 사장이 주변의 직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한다.

    “누구야? 누가 랩터스를 구박했어. 랩터스 작년에 우승도 하고 팬도 많고 잘하고 있는데 왜들 그랬어?”

    “사장님, 그런 게 아니고…….”

    “됐어. 우승 팀이 괜히 우승 팀이야! 1년 동안 고생해서 우승했으면 대우도 좀 해주고 적당히 살살해야지. 생각들을 하고 일들 하라고!”

    당장 내년도 경영 성과가 머릿속에 가득한 사장이 주변을 말을 듣지도 않고 쳐내버린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얼굴의 웃는 모양을 흉내 내며 호의를 베풀고자 한다.

    “우리 직원들이 일을 잘하는데 융통성이 없어요. 그런 것 때문에 서운했다면 앞으론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자, 이제 진짜 원하는 걸 들어볼까요? 이 정도 선물이면 뭔가를 대접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점점 더 냉철해져 가는 여자의 눈빛이 살기를 띠면서 앞에 앉은 중년의 남자를 바라본다.

    “SBC에 랩터스를 노리는 직원이 한 분 계시더라고요. 언론이 보도 정신에 입각해서 얘기하는 건 존중하겠는데 이상하게 변형된 치정으로 구단을 음해하는 건 못 참겠습니다.”

    드디어 나오는 선물의 반대급부에 사장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허. 내가 있는데 어떤 놈이 멀쩡한 구단을 음해하고 다녀? 김 국장! 자네야? 아니면 최 국장! 자네야?”

    괜히 소리를 지르며 쇼를 펼쳐 보이는 사장. 보통이라면 욕먹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하면서 협상의 우위에 서게 되는 작전인데 이걸 알고 있는 상대는 미동도 없다.

    “이루다. 걔만 치워주세요. 그러면 지원 계획 바로 시작됩니다.”

    아까까지의 생긋거리던 얼굴은 어디 가고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얼굴이 나타난다.

    회의실에 한기가 몰아치는 걸 느낀 사장이 순간 움찔했지만 지금 상대가 어디를 노리는지 정확히 알아채고는 쉽게 입을 떼지 못한다.

    “어렵지도 않잖아요. 신입으로 들어온 아나운서가 방송국 들어오자마자 열애설이 났어요. 거기다 하는 거 보셨죠? SBC에 그런 싸구려 컨셉이 가당키나 한가요? 아직 6개월도 안 됐어요. 소량 부족으로 내보내 주세요.”

    사장의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저 평범한 일반 신임 아나운서였으면 고민도 안 하고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인물. 대다수의 회사 사람들 신임 아나운서의 정체를 모르지만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걸 아는 사장의 고민이 길어진다.

    “김 국장, 이루다 아나운서 좀 불러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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