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05화 (105/204)
  • 105화. 시상식

    * * *

    새벽 6시. 남들은 다 자는 시간. 얼굴이 반쪽이 된 야구 선수가 숙소에 기어들어 왔다.

    밤새 인터뷰하고 비행기 기다리는 동안 동영상 편집하겠다는 악마 커피 타고, 음향 씹힌 거 다시 녹음하고 얼음물 가져다주고……. 그렇게 우승 뒤풀이를 마친 우승 팀 주장이 다시는 국대 참가 안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잠에 빠져든다.

    “김소전 선수! 일어나세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한 시간이나 잤나? 꿈속에서도 따라다니는 마이크를 피해 도쿄돔 관중석을 뛰어다니고 있는데 누가 나타나 날 흔들어 깨운다.

    “뭐야? 누구야? 누군데 소전이 형을 깨우는 거야!”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같은 방 쓰는 경준이가 먼저 일어나서 조폭같이 생긴 양복쟁이들을 막아선다.

    너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값 하는구나…….

    경준이에게 가로막힌 양복쟁이들이 품에서 대한 그룹 감사실 명함을 꺼내며 경준이를 치운다.

    “노경준 선수는 여기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이사회 의장님이 김소전 선수만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자, 잠깐. 누구? 이사회 의장?

    “저… 우리 구단주님 얘기하시는 건가요?”

    질질 흘러내린 침으로 범벅이 된 뺨을 훔치며 물었다.

    “맞습니다. 한희승 의장님 지시 사항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구단주 형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한다고? 그런데 어딜?

    “어딘지는 알아야 가지 않겠습니까? 왜 이렇게 급한 겁니까? 저 짐도 안 싸서 캐리어 정리도 해야 합니다.”

    난감해하는 양복쟁이들의 등 뒤로 내가 아는 얼굴이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다.

    “뭐 이렇게 꼼지락거려. 소전아, 빨리 가야 해. 이러다 따라잡힌다.”

    어? 에이전트 형? 형이 여기 왜?

    “형? 저 어디 가요? 한국 가서 우승 파티도 해야 하고 일정이 많아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조수아가 너 노리고 있어. 잡히면 끝장이라고 빨리 움직여야 해!”

    뭐, 뭐야. 단장님이 나를 왜? 내가 단장님한테 뭘 잘못했다고…….

    물어볼 말이 산더미지만 현민이 형의 성화에 짐을 대충 캐리어에 넣고 따라나선다.

    아침 7시지만 야밤에 도주하는 느낌의 나를 본 경준이가 발을 동동 구르지만, 현민이 형이 감독님하고도 얘기가 다 된 사항이라고 조용히 한국 돌아가라는 말만 남기고 나를 잡아끈다.

    방을 나서기 무섭게 호텔 로비에 기다리고 있던 차에 집어 던져져서 어딘지 모를 곳으로 무작정 끌려간다. 가면서도 계속 주위를 살피며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현민이 형.

    뭐야, 도대체…….

    공항으로 차가 미끄러져 들어가고 군사 작전하듯 양복쟁이들이 다가와 나와 현민이 형을 감싸고 수속을 밟는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가 떠오른다.

    “형, 저희 어디 가요?”

    “우리 미국 간다.”

    “미국이요? 갑자기?”

    “너 라타 코치하고 훈련해야지.”

    “올해는 국대도 다녀오고, 겨울에 시상식 많다고 건너뛰기로 했던 거 아니에요? 한국에서 훈련하다가 스프링 캠프 가기로 했는데요?”

    엄마한테 일주일만 일본 다녀온다고 했는데 갑자기 미국이라니……. 이대로 미국 가면 최소 석 달인데…….

    “스프링 캠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올해 스프링 캠프 취소될 생각까지 하고 있어. 마음 굳게 먹어야 한다.”

    뭐, 뭔 X 소리야!

    “형, 스프링 캠프를 안 간다고요? 제가 정확히 들은 거 맞아요?”

    “맞아. 우리는 최악의 경우……. 아니지. 90% 이상의 확률로 스프링 캠프 불참이다.”

    미쳤다. 왜? 무슨 이유지? 단장님이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지만 내가 스프링 캠프 명단에서 배제될 만큼 구단에 찍혔다고? 믿을 수가 없다.

    “형,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1년을 준비하는 스프링 캠프를 빠지다니요. 제가 단장님한테 전화드릴게요. 뭔가 잘못됐어요.”

    내가 전화하겠다고 말하자 화들짝 놀라는 현민이 형. 진짜 절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이야기를 한다.

    “안 돼! 절대 안 돼! 무조건 안 돼! 넌 내가 된다고 할 때까지 구단이랑 절대 연락하면 안 돼. 어머니하고 전화도 나 있을 때만 가능해. 넌 무조건 아무것도 모르고 라타 코치하고 지옥 훈련 하고 있는 거다.”

    이, 이게 뭐야……. 엄마하고 전화도 못 한다고? 잠깐… 루다는? 루다 하고도 연락 안 되면……. 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 * *

    한동안 안 보이던 진상 커플이 다시 카페에 나타났다. 그들만 왔다 가면 극심한 우울감을 호소하며 정신과를 들락거렸던 사장이 도장 하나밖에 안 찍힌 꼬깃꼬깃한 쿠폰 두 개를 합쳐달라는 남자의 요청에 손을 부르르 떨다가 뒤이어 들어온 여자가 아이스아메리카노에 물 빼고 달라는 요청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져 시럽을 물처럼 들이켰다.

    몸에 당이 들어오자 멈춰지는 떨림. 진지하게 장사 잘되는 카페를 정리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한다.

    “내놔.”

    “뭘?”

    “박현민이 내놔.”

    “어허, 사람이 물건이야? 내놓으라니…….”

    “그거 내놓지 않으면 너도 찢어버릴 거야.”

    진동벨이 아무리 울려도 커피를 찾으러 오지 않아 한숨을 쉬며 직접 서빙을 하던 카페 사장이 커플의 살벌한 사랑싸움을 엿듣고는 커피 가져다주며, 한마디 하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재빨리 자기 자리로 돌아가 시럽을 한 사발 들이켠다. 그리고는 돈보다 건강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진다.

    “나도 몰라. 연락 안 돼.”

    남자의 시치미에 조금도 믿음을 보이지 않는 여자가 히스테릭 가득한 목소리로 더욱 다그친다.

    “그럼 김소전이라도 내놔”

    “왜 그걸 나한테 묻냐고?”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받아치자 여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친다.

    “지금 해보자는 거야!”

    조잘조잘 적당한 백색소음이 있던 카페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사람들의 시선이 카페 가장 깊숙한 곳 잘 보이지도 않는 공간으로 향하지만, 그쪽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향했던 시선이 자꾸 되돌아간다.

    “조용히 좀 해. 너 때문에 쪽팔려서 못 있겠네. 나 갈래.”

    “앉아.”

    은근슬쩍 일어나려다가 여자의 명령에 다시 조용히 착석하는 남자. 여지없이 꼬리 만 강아지의 모습이다.

    “하… 내가 참는다. 계약서 도장만 받아와.”

    “무슨 계약?”

    “진짜 모르는 척할 거야!”

    “조용히 좀 해.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야?”

    남자의 간절한 요청에 으르렁거리던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은 가라앉는다.

    “2억8천. 끝. 찍어와.”

    “그걸 왜 나한테 그래.”

    “그 XX가 연락이 안 되니까 그렇지. 가서 도장 찍어와.”

    “왜 이러실까. 한국에 김소전 대리인 있잖아. 너도 알잖아, 수영이.”

    여자의 손에 주먹이 꽉 쥐어진다.

    “그놈은 말도 하지 마.”

    “왜?”

    “그놈은 불러봐야 가만히 앉아서 울다가 가.”

    우, 울어? 이수영도 어디 가서 허우대로 밀릴 덩치가 아닌데… 그런 애를 울려?

    “그래도 대리인인데 뭔가 얘기를 할 거 아니야!”

    남자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여자가 당장이라도 얼음이라도 내리꽂힐 듯한 목소리를 낸다.

    “아무 말도 안 한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나간다고! 금액을 올리면 씩 웃고 나가고, 깎으면 째려보고 나가고. 내가 24시간 가둬도 봤는데, 24시간 동안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한다고!”

    여자의 불법 행위를 들은 남자가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안 하고 자기도 감금당할까 봐 몸을 부르르 떤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이 시킨 거야. 이런 더러운 술수를 쓸 놈은 그놈밖에 없어. 그놈 내놔.”

    “나, 나도 몰라……. 여, 연락은 해볼게…….”

    남자의 눈앞으로 얼굴을 확 들이미는 여자가 무서운 이야기를 남긴다.

    “내일 KBO 시상식이다. 유격수 골든 글러븐데 이시윤이랑 같이 꼭 오라고 해. 안 오면 셋 다 뼈째로 갈아 마셔버릴 거야.”

    그 말만 남기고 떠난 여자. 혼자 남은 남자는 사고 친 건 둘인데 왜 셋을 갈아 마신다는 건지 영문을 몰라 카페 폐점 시간까지 무료 리필되는 생수를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 * *

    KBO 시상식. 일반인들은 기사로 수상 내용만 확인하지만 언제나처럼 야구 환자들은 알람 걸어놓고 시상식이 진행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방송사에서 만드는 시즌 정리 프로그램이랑 비할 바 없는 저퀄리티. 팬들은 전혀 관심도 없는 자화자찬의 시간이 지나가고 퓨처스 리그 시상부터 진행이 된다.

    “다음은 이번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친 신인을 선정하는 시간입니다. 사무총장님 발표해 주시죠.”

    “2027 KBO 신인상, 서울 랩터스 노경준.”

    랩터스에서 2년 연속 신인상 수상자가 배출되면서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그리고 신인상 수상자가 작년에 이어 야구를 퓨처리즘에 맞춰 재해석한 현대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넝마 데기를 입고 나타나자 쓸 이야기가 많아진 기자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엄숙한 시상식장에 환호를 받으며 수상을 하러 나온 신인상 수상자가 상기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수상 소감을 밝힌다.

    “이상은 제가 잘해서 받은 게 아닙니다. 소전이 형. 소전이 형이 만들어 준 상입니다. 형……. 보고 싶어요.”

    신인상 받으러 온 수상자가 같은 팀 선배만 울부짖는 수상 소감을 마치고 각 부분별 골든글러브 시상이 진행된다.

    “다음은 이번 시즌 최고의 유격수를 발표하겠습니다. 발표해 주시죠.”

    수상자 섭외가 힘들었는지 무대를 내려가지도 못하고 계속 무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사무총장이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발표한다.

    “2027 유격수 골든글러브. 서울 랩터스의 김소전.”

    “김소전 선수는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대리 수상을 하겠습니다.”

    평소에 언론에 사진 찍히는 걸 극도로 싫어하지만 한번 나타나기로 마음먹으면 어지간한 배우들은 쩌리로 만들어버리는 랩터스의 조수아 단장이 간결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정장을 입고 단상으로 향한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를 한껏 즐기며 랩터스 단장이 계단을 오르려는 그때 단장의 옆으로 검은 그림자가 번개같이 뛰어 올라가 사무총장이 들고 있는 골든글러브를 뺏어 들고는 마이크를 잡는다.

    “김소전의 에이전시 HM 코퍼레이션의 박현민입니다. 우선 선수를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잡상인이 누군가 걱정했던 사람들도 소개를 듣고는 얼굴이 펴진다.

    “김소전 선수 본인이 와서 영광스러운 수상을 하여야 하나 현재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모처에서 선수 인생을 걸고 훈련 중에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시즌 국내 유격수 부분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구단으로부터 2억 대 연봉을 제안받고는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계단 밑에 있는 랩터스 단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아마도 아닌 듯 꽉 조이는 옷을 입어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

    “등록 기간이 만 3년도 안 돼 연.봉.조.정.신.청도 안되는 애송이 선수가 WAR이 4를 훌쩍 넘기고도 연봉을 2억 대를 제시받았지만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노력 중이니 다음 시즌도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FA 때는 모르겠지만요.”

    이 말을 남기고 대리 수상자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바람같이 사라진 수상자를 쫓던 카메라가 일제히 랩터스 단장에게 향한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음에도 고고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단장이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우아하게 앉는다.

    그리고는 그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톡을 보낸다.

    [오늘 박현민이 못 잡아 오면 운영팀 일괄 사표 제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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