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104화 (104/204)

104화. 또 한번의 승리

- 9회 말, 2사 주자 2루. 마무리 김기훈 여기서 끝내야 합니다.

- 뒤에 나올 투수도 없어요. 김기훈 선수가 끝내야 해요.

스코어 2:0. 홈팀 일본의 마지막 공격. 팽팽한 경기를 하다 9회에 홈런을 맞으면서 경기가 기울었으면 무력감을 느끼면서 팀이 무너져야 하는데 저놈들은 안 그렇다.

자기들보다 못한 놈들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눈빛이 바뀌면서 악착같이 달라붙는다.

8회까지 선수를 다 써버린 대한민국이 마지막 9회를 막기 위해 아끼고 아꼈던 마무리 김기훈을 올렸다.

첫 타자를 1루 파울플라이로 잡아낸 투수가 다음 타자에게 깨끗한 중전 안타를 맞더니 그다음 타자의 진루타로 2사 2루를 만들어줬다.

결과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되는 결과지만 문제는 투구 수.

세 타자 상대하면서 던진 공이 37개. 강한 공을 때려 박는 김기훈의 가장 큰 약점인 한계 투구 수가 넘어가고 있다.

- 타석에 좌타자 세네토미가 들어왔습니다.

- 직구를 매우 잘 때려 내는 선수거든요. 김기훈 선수, 힘으로만 이겨 내기는 쉽지 않을 수 있어요.

외야는 그냥 두고 내야수들을 뒤로 물렸다. 어차피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끝이다. 공을 내야에 가둬놓고 잡아내면 된다. 타자가 빠르긴 하지만 공은 다리보다 빠르다. 점수 차도 두 점. 잡아내면 된다.

- 볼. 다시 한번 빠져나가는 볼. 공이 높습니다.

- 김기훈 선수 공을 조금 더 강하게 채줘야 해요. 한계 투구 수 넘어가는 건 아는데 지금은 결승전입니다. 내일이 없는 투구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시프트를 걸고 수비를 빡세게 해도 공이 와야 시작이 되는 거다. 투수가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넣지도 못하면 수비수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다.

- 볼. 쓰리 볼.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 비어 있는 1루를 채우는 작전을 구사하는 대한민국 대표팀입니다.

- 투 아웃이거든요. 점수도 두 점 여유가 있어요. 붙어줘야 해요. 저런 식으로 도망가면 안 됩니다.

글렀다. 기훈이 손끝에서 공이 날린다. 악력이 떨어졌다. 저, 저놈. 공 몇 개 던졌다고 손에 힘이 풀려? 우리 팀만 같았으면 붙잡아다 손에 악력기를 테이핑해 놓겠는데, 우리 팀이 아니니……. 생각해 보니까… 얘 리그에서 만날 건데……. 이런 상황이 생기면 개꿀인데…….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거야? 아니야…….

- 스트레이트 볼넷. 1루 베이스를 채워주는 대한민국.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됩니다.

- 마지막이에요. 힘들어도 이겨내야 해요.

이대로 질 수는 없으니 힘 빠진 투수에게 우타자 낮은 쪽으로만 던지라고 그러면 내가 잡아주겠다고 한마디 해주려고 발걸음을 떼는데 나보다 먼저 발걸음을 뗀 사람이 나타났다.

- 기인환 감독 올라옵니다. 주심에게 공 받아들고 올라오네요. 투수 교체인가요?

- 남은 투수가 없는데요. 불펜에 누구 있나요?

- 대한민국 투수 교체 있습니다. 김기훈 내려가고 일본과의 예선에서 선발로 나왔던 표지상이 올라옵니다.

이런……. 예선에서 1회에만 6점 주고 쫓겨난 지상이가 올라온다. 그 경기 대패당하고 지상이한테 공 조금 던졌으니까 준비하라고 얘기는 했지만……. 올라와도 중간에서나 잠깐 던지라는 거였지, 지금처럼 9회 말 투 아웃에 올라오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국가 대항전이라고 하지만 이벤트성이 강한 대회에서 선발 투수들 보호하려고 오늘 지상이는 안 쓸 줄 알았더니. 저 속이 시커먼 감독 놈. 이 상황에서 올렸어.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 표지상. 1차전 선발로 나와서 성적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 제구가 안 잡히면서 점수를 많이 줬지만, 구위 자체는 괜찮았거든요. 한 타자만 상대하면 돼요. 표지상, 이 위기 막아낼 수 있어요.

9회 말을 지키러 나온 투수의 연습 투구. 연습 투구만 봐도 알겠다. 변화구 따위는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직구만 때려 박아서 경기를 끝내든 터트리든 할 거다.

힘과 힘으로 맞붙는 대결…….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승부다.

연습 투구가 진행되는 동안 덕아웃의 수비 코치를 바라봤다. 간결하게 나오는 사인. 그렇지 뭐. 지금 할 게 뭐가 있다고……. 서로 눈으로 의견의 합치를 이루고 등 뒤로 손가락 두 개를 올린다.

- 스코어 2:0. 2사 주자 1, 2루. 마운드에는 표지상, 타석에는 가이슈. 이번 대회 우승을 결정지을 마지막 순간입니다.

- 우리 선수들 전부 뒤로 물러나 있어요. 주자도 신경을 안 쓰겠다는 거거든요. 투수 타자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내외야를 전부 뒤로 물려놨다. 어차피 빠른 공만 던질 지상이. 타자도 갭파워가 있는 타자. 최대한 뒤로 물러나 잡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일본의 약삭빠른 2루 주자가 우리의 수비 위치를 보더니, 리드를 길게 가져간다. 투수가 견제도 안 하니 겁도 없이 정상적인 리드보다 두 배는 더 나온다.

내가 아무리 주자를 신경 안 쓴다지만 이건 좀……. 선을 넘었지.

- 투수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고 마운드에서 심호흡합니다.

팡!

투수가 투수판을 밟자마자 2루 베이스로 살짝 뛰어들면서 주자 머리 뒤에서 빈 글러브를 주먹으로 크게 쳐준다.

깜짝 놀란 주자가 2루로 급히 뛰어들고 그 순간 투수의 공이 홈플레이틀 향해 날아든다.

- 초구 타격. 라인 드라이브로 펜스를 직격합니다.

저, 저 XX.그때도 느꼈지만 제구라는 게 없어. 지금 공을 한가운데 때려 박으면 어쩌냐…….

- 노경준의 펜스플레이, 떨어지는 공을 잡아 홈을 향해 던집니다.

뒤로 물러나 있던 경준이가 펜스 맞고 떨어지는 공을 잘 잡았다. 지금 써먹으려고 연습한 건 아니지만 한국 시리즈 준비하면서 선배들 아프다고 훈련을 못 해서 경준이 하고 이것만 천 번은 연습했다.

- 2루 주자 하치로~ 3루 돌아 홈으로 달립니다. 대한민국 공 중계되고 있습니다. 유격수 잡아서 홈으로~ 아웃! 아웃! 홈에서 아웃! 홈으로 달려드는 주자를 막아 세우는 포수 송교필! 대한민국이 일본의 심장 도쿄돔에서 다시 한번 일본을 꺾어냅니다.

경준이의 포구 위치를 보면서 홈플레이트와 일자로 선다. 홈까지 다이렉트로 던질 수 있는 경준이의 어깨지만 중간에 내가 있으면 포물선 없이 직선으로 공이 뿌려진다. 캐치볼 하듯 정확히 가슴으로 날아드는 공. 잡으면서 그립을 잡고 몸을 돌려 원 스텝으로 홈플레이트 끝을 향해 공을 던진다.

머리고 계산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이제는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 경기 시작 전 일본의 언론에서 세련된 일본의 대표팀과 투박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라고 했거든요. 그 기사 쓴 사람들 보고 싶네요. 이게 대한민국의 야구에요. 우리 어린 선수들이 이 정도 야구를 합니다.

홈에서 아웃 카운트를 잡아낸 포수가 투수도 아니고 나에게 뛰어온다. 그 포수를 보면서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나에게 달려든다.

오지 마! 오지 마! 으악! 무, 무거워! 꺼지라고!

딸랑 3개국이 출전한 국제 대회. 골수 야구 팬들이나 관심 가질 대회지만 대회전 일본보다 한 수 두 수도 아니고 세 수는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대표팀이 도쿄돔에서 일본을 이기고 우승을 하니 갑자기 기자들이 몰려든다.

어수선한 경기장에서 간단한 시상식이 끝나고 해설자 출신인 감독님이 혼자 마이크를 독점하고 있는 사이, 선수들은 서둘러 숙소로 돌아간다.

우승으로 기쁘지만, 이 기쁨은 내일 서울로 돌아가서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조용히 숙소에서 머물기로 한다. 절대 우승을 예상 못 한 KBO가 회식 자리를 준비 안 해서가 아니다. 외국에서 사고 나면 안 되기 때문에 취한 고육지책이다. 그렇게 KBO에서 지원 나온 과장님이 얘기했다…….

“형, 전화 와요.”

“응?”

홈이든 원정이든 1인실을 쓰는 랩터스에서 생활하다 오랜만에 2인실을 쓰니까 좀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시키면 투덜대면서도 수발 잘 드는 경준이를 룸메이트로 쓰니 좀 낫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서 경준이가 가져다주는 전화를 확인한다. ‘진상 스토커…….’

“축하 감사하고 몸 상태는 괜찮고, 내일 2시 비행기. 도착하자마자 바로 해산해서 집에 갑니다.”

옆에 경준이도 있는데 전화기에 대고 오래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상대가 물어볼 예상 질문에 대해 미리 대답을 해드렸다. 내가 이렇게 친절하다.

“1층 로비. 내려와.”

“응? 뭐?”

“내려오라고.”

“어딜?”

“이게 이제 귀도 안 들리나. 1층 로비로 내려오라고.”

“거길 왜?”

“누나가 내려오라면 내려올 것이지, 꼭 토를 달아. 죽고 싶어?”

설마… 아니지? 취직했다고 신입 사원 연수받느라 바쁘다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형, 어디 가요?”

“악마를 만나러 간다. 내가 두 시간 안에 안 오면 실종 신고해라.”

“혀, 형……. 같이 가요. 형만 보낼 순 없어요.”

그래? 그러고 보내 얘라도 데려가면 좀 든든하려나…….

1층에 내려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누가 뒤에서 나와 경준이의 팔을 잡아챈다.

“오호, 경준이도 데려왔어? 따라와”

“야! 너 여기 왜 왔어? 언제 왔어?”

“잔말 말고 따라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어디 이상한 회의실 같은 데로 끌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환한 조명과 세팅된 카메라. 이게… 무슨…….

“선수분들 여기 앉으세요.”

그제서야 날 잡아끈 루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풀메이크업에 샤랄라한 옷. 그것도 모자라 거짓이 가득한 눈웃음. 순진한 어린양을 잡아먹으러 내려온 악마의 모습이다. 그리고 내 옆에 멍청한 어린양은 이미 넘어갔다.

“형수님. 조명받으니까 진짜 예쁘시네요. 와…….”

“그렇지. 나 오늘 화장 좀 받지? 내가 이래서 경준이를 좋아한다니까. 누나가 인터뷰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형수님. 역시 인성도 최고예요.”

넌 모른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 멍청아.

“이거 뭐냐?”

“뭐긴. 인터뷰해야지.”

“그러니까 갑자기 이게 뭐냐고.”

“내 첫 인터뷰다. 좋게좋게 하자. 인터뷰하고 편집까지 해서 내일 컨펌받으려면 머리 아프다. 앉아.”

항상 느끼지만, 얘만 보면 어지럽다. 이게 무슨 일이야.

“너 교육이라며?”

“어. 그래서 교육 마지막 발표 자료 만들어야 해. 시간 없어. 인터뷰 따고 편집해서 첫 비행기 타고 서울 가야 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포기한다. 여기서 뭐라고 해봐야 고통스러운 시간만 길어진다.

“안녕하세요~ SBC 신입 야구 여신 이루다에요~”

와~ 원래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지입으로 야구 여신……. 방송국은 이거 알고 얘 뽑은 거야?

“2027 다시 앞으로 야구 챔피언십 우승의 주역, 랩터스의 뉴 타입 1호기와 2호기, 김소전 선수와 노경준 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

저 혼자 떠들던 루다가 갑자기 나를 째려본다. 뭐? 어쩌라고…….

“쓰읍…….”

응? 뭐…….

“인사하라고! 인사! 인터뷰 첨 해보냐? 알아서 못해?”

내가 전일 신문이랑 인터뷰할 때도 이런 굴욕은 당해 본 적이 없는데……. 허락도 안 받은 인터뷰 하면서 구박까지 받아야 한다니… 에효… 내 팔자야…….

“랩터스의 김소전입니다.”

“노경준입니다.”

루다의 표정이 안 좋다.

“그게 다야?”

“어?”

“됐다. 내가 고생하고 말지. 됐다.”

뭐야 혼자 화내다가 한숨 쉬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우승 축하드려요~ 9회 마지막 중계 플레이는 올해 루다가 본 가장 멋진 플레이였어요~”

뭐, 뭐냐……. 그 목소리와 텐션은……. 사람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널뛰기해도 되는 거냐?

“노경준 선수~ 루다와 마지막 수비부터 얘기해 볼래요?”

하지 말라고……. 너 그런 거 어울리지도 않아.

“헤… 그게 말이죠…….”

저, 저 멍청이……. 목소리에 홀렸네, 홀렸어……. 넌 여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 이 무서운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냐.

“처음에 소전이 형이 수비를 뒤로 밀길래 미쳤나 생각했는데…….”

“와~”

“딱 맞는 순간, 제 뛰어난 감각으로…….”

“대단해요~”

“저희가 연습을 진짜 많이 했거든요…….”

“김민중 감독님도 우승에 일조하셨네요~ 사랑합니다. 감독님~”

너희 뭐 하냐? 닭살 돋아 미치겠네.

“누나~ 제가 얘기 좀 더 해도 될까요?”

“어머~ 노경준 선수, 누나라고 불러주니까 너무 앙증맞다. 들어볼까요?”

앙증? 랩터스 들어오고 나서 키가 자꾸 커서 190이 넘어가는 조폭 얼굴이 앙증?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너무 현실감 없는 거 아니냐?

“1차전 지고 팀이 무너져 있는데 형이 주장으로 중심을 잡아주니까 다시 심기일전해서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강고 형, 고마워요~”

자, 잠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강고 형? 그건 뭐예요? 루다는 처음 듣는 말인데?”

경준이의 재미 없는 말에 살짝 풀려가던 루다의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해진다. 완전 빡 집중 모드로 들어가는 루다. 저 멍청이를 데려온 내가 똥멍청이다…….

“아, 그게요… 저희가 훈련 인원이 정말 부족했거든요. 그래서….”

저, 저 XX, 뭔 말을 하려고.

“자, 잠깐. 너무 늦었다. 이제 나랑. 나랑 얘기해야지.”

“경준이 얘기 재미있어지는데 왜? 기다려봐 봐. 경준아, 다시 해봐. 훈련할 때 뭐?”

안 된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저 불여우한테 코 꿴다. 절대 안 된다.

“경준아! 너 자야지? 너 잠 많잖아. 가서 자.”

“형, 저 잠 안 오는…….”

“어. 너 졸려. 가서 자, 자.”

잠 안 온다고 거짓말하는 경준이를 문밖으로 몰아내고 등을 돌려 루다를 마주 봤다.

살기 넘치는 루다의 눈빛.

“매가 부족해? 뭐 하는 짓이야!”

“너 나보러 왔잖아. 내 인터뷰만 따면 되잖아. 괜히 다른 선수들은 괴롭히지 마라. 연락도 안 하고 인터뷰하는 거 언론 윤리에 안 맞는 거야.”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언론 윤리까지 꺼내 들자, 현직 방송인이 되신 이루다 아나운서께서 화를 한번 참고는 나를 카메라 앞에 앉힌다.

“넌 오늘 잠 다잔 줄 알아라.”

잠… 다 잤다고? 오늘 결승전 경기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승은 랩터스에서만 해야겠다. 국가 대표 와서 우승했는데 뒤풀이가 뭐 이래……. 나 우승 안 해. 안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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