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억 FA선수가 되다-99화 (99/204)
  • 99화. 참사

    부작용이 생겼다.

    처음엔 그저 운동을 어떻게 조용히 할 수가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경준이의 처절한 발라드 모음집을 들은 상훈이가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청음단을 모아온다.

    “형, 얘도 같이해요. 얘도 무게 좀 쳐요.”

    어제는 쭈뼛쭈뼛하던 놈이 알밴 종아리를 절룩거리며 친구 놈을 데려온다.

    “야! 뭔 소리야! 선배님 그런 게 아니고요…….”

    “어? 울브스 지상이네. 안 그래도 너 공 던질 때 팔뚝 좋더라. 운동 어떻게 하니?”

    “선배님.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야! 정 없게 선배님은. 소전이 형이라고 해. 그리고 무게를 많이 드니, 손목을 돌리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 그래. 이런 건 말로 하는 게 아니지. 경준아, 덤벨 좀 가져와 봐. 지상아, 20킬로 정도면 괜찮지? 너무 가볍나? 지상이 손목 힘도 좋아 보이니까… 경준아, 24로 하자!”

    “서, 선배…….”

    “형이라고 하라니까.”

    훈련장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선수들이 하나둘 찾아든다. 그리고는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기 시작한다.

    “지상아, 그게 도움이 되는 거야?”

    “네. 이러면 스트라이드가 길어지면서 조금 더 앞에서 때려지더라고요.”

    울브스의 2군 에이스 표지상이 원렉프레스의 무게를 늘리면서 뒷발을 강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재규어스의 황윤찬에 슬쩍 떠본다.

    “아, 그렇구나. 윤찬아, 지상이는 앞에서 때리는 게 좋은가 봐.”

    “형, 지상이는 유연성이 좋아서 그래요. 전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더 높이 때리려고 하고 있어요.”

    음… 쉬는 시간 끝이다. 이제 또 운동해야지.

    “어? 유연성이 안 좋아? 경준아, 이 손님이 유연성이 안 좋으시다는데?”

    “윤찬이 형, 우리 구단에서 하는 건데 좀 따라 해보실래요?”

    입 한번 잘못 놀리고 끌려가는 투수가 숙달된 조교의 필라테스 자세를 보고 학을 뗀다.

    “야, 야……. 다리가 어떻게 머리 위로 올라가!”

    “이렇게요.”

    “이런 미친… 아, 악……. 아악! 혀, 형……. 그만… 그, 그만…….”

    손님이 조교를 보고는 엄살이 심해져서 내가 직접 살짝 도움을 줬다.

    “엄살은. 랩터스에선 식당 이모님도 이 정도는 해. 조금 더 당겨줄게. 옳지. 그렇지.”

    훈련장에 뜨거운 학구열이 불타오르자 코치들도 크게 터치 안 하고 구경만 한다. 그리고 나는 리그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들의 몸을 직접 만지고 느끼면서 이들의 장단점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그리고 확실히 저 여우 같은 감독놈 분석 자료의 디테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평가만 빼고! 누가 소심해!

    하루 이틀 지나고 본격적인 단체 훈련이 시작된다. 다른 팀보다 대여섯 배는 데는 지원 인력을 꾸리기는 랩터스에 비교하자는 건 아니지만 다른 팀 지원 인력의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 대표팀 인원. 배팅볼 던져줄 투수도 없어서 코치는 물론 감독까지 나서서 공을 던져준다.

    그래도 배팅 훈련을 하는 타자들은 조금 나은 상황. 투수조는 공 받을 포수가 없어서 네트에 공을 던진다. 이게 무슨 고등학교도 아니고…….

    그래도 주장이라고 배팅케이지에 가장 먼저 들어가 배팅볼을 무려 20개나 때리고 나왔다. 20개! 20개! 어마어마한 특혜!

    XX. 홍시 누나한테 부탁해서 구단에 있는 피칭 머신이라도 빌려 달라야 하나……. 한숨만 나온다.

    훈련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 여기저기 마실을 나가본다. 그러다 보인 피칭 훈련장. 여기도 던지고 싶은 선수들은 수두룩한데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딸랑 셋.

    그나마 주전 포수가 타격 훈련하러 떠나자 백업 포수와 배터리 코치까지 해서 둘이 투수 공을 받아준다. 이래서야 무슨 훈련이 돼…….

    “해정아! 자신 있게 던져! 빠져도 좋으니까 자신 있게 던져야지!”

    투수 코치가 엘리펀트의 사이드암 투수를 보면서 자신 있게 던지라는 이야기를 던지자 그 옆에 드래곤스의 스리쿼터 투수가 자기 이야기인 양 주의 깊게 듣는다.

    “명수야. 해정이 던지는 거 잘 봐. 옆에서 나오는 투수는 타자를 죽일 듯이 던져야 하는 거야. 맞춰도 좋다고 생각하고 몸쪽에 붙여야 한다. 그래놓고 바깥으로 도망가야 못 친다.”

    저런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다니. 이 사람 인성 좋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네.

    우타자 상대 원 포인트나 1이닝 정도 막아줘야 할 사이드암 계투가 좀처럼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른 투수들이 대기하고 있는데도 계속 마운드를 차지한다.

    연습 투구를 보면서 점점 애가 타는 투수 코치. 비슷한 유형의 다른 선수를 같이 보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른다.

    “소전아. 해정이나 명수 상대로 타석에 서본 적 있냐?”

    “없습니다.”

    이번 생엔 없어요.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 예전에는 처절하게 털린 기억이 심해 깊은 곳에 있는 듯도 하지만요. 박해정한테 14타수 1안타? 김명수한테 9타수 무안타? 삼진 개수도 생각이 날 것 같지만 그건 생각해 내지 않겠어요.

    “얘들 각도가 정말 좋거든. 하나는 떨어지면서 도망가는 슬라이더, 하나는 올라가면서 도망가는 슬라이더. 진짜 좋거든.”

    알다마다요. 지금은 그냥 슬라이더만 던지지만, 나중에는 좌타 상대로 한 놈은 싱커, 한 놈은 체인지업을 던질 겁니다. 그래도 옆에서 나오는 선수들이라 다른 왼손들은 잘 치던데… 저는 못 치겠더라고요.

    “지금 봐도 좋아 보여요.”

    “아니야. 진짜는 앉아서 봐야지. 투수 공을 앉아서 봐야 공에 무슨 생각이 담겼는지 알 수 있는 거야.”

    뭔 소리지? 공에 무슨 생각이 담겨. 공이라는 건 회전 걸려서 날아오는 거지.

    “소전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너 한번 앉아봐봐. 진짜 다르다니까?”

    “네?”

    “명수야. 너 저기 빈 곳에 좀 올라가 봐. 올라가서 가운데 직구만 던져 봐.”

    뭐, 뭐야…….

    “코, 코치님……. 저 미트도 없는데요.”

    “없기는. 교필이 놓고 간 장비 있어. 저거 해봐.”

    “저… 파울 컵도 안 찼는데…….”

    “야! 명수 무시해? 쟤 제구 좋아.”

    아, 아닌데…… 직구는 몰라도 변화구 제구는 꽝 아니었던가?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어버버 하는 동안 누가 나타나서 내 몸에 프로텍터를 씌우더니 머리에 마스크도 씌운다. 그리고 왼손에 끼워 넣는 포수 미트……. 묵직하고 뻑뻑한 게……. 어떤 XX가 글러브 길을 이따 위로 들였어.

    “명수야. 가볍게 직구부터! 소전이 처음이니까 글러브 보고 던져.”

    “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수한테 포수 장비를 씌워서 불펜에 앉히는 게 말이 되나. 어쨌든 글러브 대는 데다 던지기로 했으니 한가운데 글러브를 크게 펴준다.

    펑!

    “좋아! 밸런스 신경 쓰면서 5개!”

    좋다고? 이게? 어깨가 다 퍼져서 나오는데?

    펑!

    “좋아! 소전아, 너도 파이팅해 줘야지.”

    파이팅… 해줄 공이 아니잖아요. 이게 뭐야? 얘 신인 때는 공이 이랬구나.

    타탓!

    XXX. 직구도 못 던져.

    “명수야! 디딤발 흔들리면 안 된다.”

    XXX아! 지금 투수가 아니라 나를 봐줘야지 원 바운드로 튀는 직구를 블로킹한 게 난데!

    펑!

    XXX.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계속 던지네.

    “좋아! 소전아, 한마디 해주라니까.”

    아오, 빡쳐. 지금 내가 한마디 해주게 생겼냐고요.

    “명수야, 밸런스 생각하면서 조금 더 강하게 때려보자.”

    펑!

    야 이 XXX야. 저게 지금 죽을라고!

    가을 야구 빨리 떨어져서 너무 오래 쉬었나. 누굴 죽이려고 직구를 발목으로 던져!

    화가 치밀어올라 마스크를 던져버리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내가 투수에게 다가가자 깜짝 놀라 뛰어오는 투수 코치. 말리지 마. 나 지금 진짜 화났으니까.

    “서, 선배님……. 죄송합니다.”

    내가 도끼눈을 뜨고 다가가자 잔뜩 쫄아서 미안하다고 하는 투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소전아. 참아, 참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훈련장에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면서 고요해진다. 다들 나만 바라보는데 무서워서 화낸다고 할 수가 없다.

    “명수야. 너 지금 앞발이 흔들리고 내려놓는 위치가 계속 바뀐다. 그러니까 몸이 다 움직여. 머리가 고정이 안 되니까 제구가 안 되지. 형이 투수는 아니지만 송구할 때 제일 중요한 게 타깃을 잡는 거다.”

    마운드에 올라간 김에 투수를 붙잡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글러브를 낀 팔로 정확히 포수를 찍으라는 둥, 코어 힘이 부족해 보인다는 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알았지?”

    “네, 선배님.”

    “선배는 무슨. 같이 운동하면 형이지. 편하게 형이라고 해. 우리 편하게 하자. 힘 들어가니까 공이 튀잖아.”

    “네, 선… 형.”

    여기까지 하고 마운드를 내려와 쪼그리고 앉아서 공을 기다린다.

    펑! 펑! 펑!

    투수라는 동물이 정말 신기한 게 포수든 코치든 마운드를 한번 갔다 오면 매우 낮은 확률로 제구가 확 좋아질 때가 있다. 그리고 이 드래곤스의 신인 투수는 그 낮은 확률을 뚫고 제구가 안정되기 시작한다.

    “명수야, 좋아! 조금 더 구속 올려보자!”

    “그렇지!”

    “좋아!”

    투수가 안정감을 찾아가자 투수 코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투수 코치의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구속과 구위가 좋아지는 투수 놈. 이거 문제가 있다.

    펑! 펑! 펑!

    으…….

    어떤 놈이 글러브를 이따위로 길들여놨는지 공이 글러브 안에서 노는 것도 모자라서 미트가 충분히 벌어지지도 않는다. 특히나 저 쓰리 쿼터의 옆으로 도망가는 공을 잡으려면 글러브 끝으로 잡는 공도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충격이 너무 크다.

    “명수야. 이제 브레이킹볼도 해보자. 가운데 보고 슬라이더부터 해봐!”

    미, 미친놈아. 내가 전문 포수도 아니고 투수한테 변화구를 던지라고 하는 게 어딨어!

    내가 투수 코치를 노려보려는데 앞 손을 까딱이고는 투구 자세에 들어가는 투수 놈.

    글러브에서 손이 들어가더니 던지는 팔이 살짝 내려갔다 올라간다. 저건 뭐지?

    펑! 펑! 펑!

    으… 아까보다 더 손이 울린다. 포수들은 이 짓을 어떻게 하는 거지?

    “명수야. 좋다! 진짜 좋네. 내가 본 슬라이더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구라도. 쟤 슬라이더가 좋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문제는 저 투수 놈이 점점 더 구속과 구위를 올린다. 구속이 아까 직구만큼 올라오는데 공이 빠지는 각도가 점점 더 커진다.

    미친놈아. 가운데 던지라고.

    “좋아! 그렇게 자신 있게 던져. 그렇게만 던지면 타자들 보고만 있는 거야.”

    보고만 있다니. 쟤 지금 제구 아예 안 되고 똑같은 폼에서 똑같이 던지는 데도 공이 날리는데. 잠깐… 저거 좀 이상한데…….

    펑! 펑! 펑!

    “굿! 명수야! 각도 좋다! 제구만 신경 쓰자!”

    이거 확실하다. 저놈 지금 제구 같은 거 없어. 똑같은 폼에서 똑같이 던지려고만 하는 거다. 본인은 똑같이 던지는데 폼이 흔들려서 앞발 놓은 위치에 따라서 공이 날아가는 거야. 계속 보니까 보이는데… 실험을 해보자.

    한가운데만 대주던 미트를 살짝 바깥으로 빠져 앉으면서 대줘본다.

    펑!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 위치로 날아드는 공. 이번엔 몸쪽으로 붙어서 미트를 대본다.

    펑!

    으… 반대 투구. 내 귀신같은 반사 신경으로 잡았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바로 폭투다. 그나저나 이 미트는 누가 이 따위로 관리를 한 거야

    “명수야! 좋아. 괜찮아 제구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던져!”

    계속이라니. 누굴 죽이려고.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하지.

    계속해서 투수의 공을 받아보면서 짱돌을 굴려보는데 뾰족한 방법은 생각이 안 나고 글러브 손질해야 할 부분만 머리에 떠다닌다.

    “소전이 형~ 번트 훈련하러 오래요!”

    이러다 내 엄지손가락 날아가는 거 아닌가 고민을 하는데 사랑스러운 경준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무나도 기뻐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마운드의 제구레기도 모자라 체력도 조루인 투수 놈이 공을 패대기친다.

    파팟. 타 턱!

    “으악! 아악!”

    원 바운드로 던져진 공이 홈플레이트를 맞고 이상하게 낮은 각도로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었다. 정상적이었으면 내 빠른 반사 신경이 글러브를 놀려 잡았겠지만 경준이에게 잠시 시선을 뺏겼다 돌아오니 반응이 늦었다.

    가져가는 미트보다 빠르게 튀어 오른 공이 미트 끝을 맞고는 어딘지 모를 이상한 부위를 원 바운드로 강타한다. 나도 모르게 허벅지 안쪽으로 가져가는 손. 정수리까지 찌릿하게 올라오는 아픔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온다.

    “혀, 형… 괜찮아요?”

    귓가에 경준이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리고 주변에 누가 우르르 몰려드는 것 같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죽을 것 같다.

    “아… 아까 소전이 형 파울컵 안 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힉~ 서… 설마…….”

    “빠… 빨리 119! 119 불러!”

    “서… 설마……. 그거… 되는 거 아니지?”

    “몰라. 나중에 애 놔 봐야 알지.”

    “진짜 아파하는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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