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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FA선수가 되다-94화 (94/204)

94화. 뒤풀이

숨이 턱 하고 막히면서 온몸의 모든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최근에 직접 듣지 못하고 전화로만 듣던 목소리가 내 고막을 때린다.

현실을 부정하는 내 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움직이는 발걸음. 아무 일도 없는 척 움직이는 내 어깨를 무지막지한 손이 잡아끈다.

“야! 여기 왜 왔냐고!”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우악스러운지. 확 잡아챈 루다의 손에 내 몸이 뒤로 재껴진다.

“어… 아, 안녕……. 오랜… 오랜만이네.”

“오랜만이고 뭐고 여기 왜 왔냐고! 대한 호텔에서 파티한다며?”

“파, 파티……. 파티해야지, 파티.”

“이거 봐라. 빨리 말 안 해? 여기 왜 있냐고.”

“어… 그게…….”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공간에서도 루다의 하이 톤 목소리가 깨끗하게 귀에 때려 박힌다.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해 보려고 하지만 나보다 낮은 데서 나를 깔아보는 루다의 눈을 보며 반항을 포기한다. 어떻게 올려보는데 나를 깔아보는 느낌이 들 수가 있지…….

“헐… 선수단끼리 2차로 우승 파티를 한다고? 여기서? 여기 수질 관리가 국내 탑인데……. 이거 사장님 불러서 한마디 해야겠네.”

“그래……. 여기 여자들 예쁘긴 하다.”

아… XX 괜한 말을 했다.

“어. 예.쁘.지. 그렇고말고.”

내 말에 동의하는 루다의 표정에 한기가 서린다. 얘는 왜 예쁘다는 말에 꼭 과민 반응을 하는 걸까.

“저… 나는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 루다야 잘 놀다 가고…….”

우선은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루다를 곱게 돌려보내려고 시도하였으나 이 미친것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어디로 들어가려고? 나도 좀 같이 가자. 선수들은 얼마나 예.쁜. 여자들하고 노는 지 나도 좀 구경하자.”

애초에 밖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괜히 숨 한번 쉬어보겠다고 밖에 나온 내가 잘못이다. 여기서 하필 얘를… 얘 데리고 들어가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저… 루다야. 거기 선수들만 있어서…….”

“빨리 안 가! 아니다. 저 끝에 연결되는 큰 방이지? 대기업 한량들 생일 파티하는데? 선수단이 다 오려면 거기밖에 없지. 따라와!”

여기 구조를 전부 아는 듯한 루다가 내 팔짱을 끼고 나를 잡아끈다. 바둥바둥 반항해 보려고 하지만 강아지 목줄 메고 끄는 것처럼 잡아당기는 루다. 성격도 안 좋은 게 힘도 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문이 열리고 질펀한 술판이 벌어진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야구만 하던 선수들이 숨겨왔던 본능을 펼쳐 보이고 있는 공간에 루다가 겁도 없이 생긋거리면 날 끌고 들어간다.

“우와~ 김소전~ 얌전한 척하더니 누굴 데려온 거야~”

“와~ 나 아까 봤어~ 아까 저기서 봤어. 너무 예뻐서 말도 못 붙였는데… 김소전~ 우와~”

“이리, 이리 오세요. 술, 술 어딨어. 이거 글… 글… 뭐 글래… 뭐시기 30년. 여기 오면 한잔하고 앉는 거예요. 와~ 김소전~”

입단하고 나서 선배들이 나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불러준 적이 없는데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미쳤구나.

내가 어찌할 바 모르고 당황함을 표출하고 있는데 여전히 나한테 밀착해서 팔짱을 끼고 있는 루다가 30년 된 술잔을 스트레이트로 원샷을 한다.

“김호영 선수가 주시니까 더 맛있다! 팬이에요.”

저, 저… 꼬리 9개 달린 불여시 같은 것. 어디서 호영 선배한테 눈을 찡긋거리면서 수작을…….

“야구 좋아하세요? 사인… 사인해 드릴까요? 진호! 진호야! 공 좀 가져와 봐! 아니, 글러브. 내 글러브 좀 가져와!”

미쳤구만…. 저 선배 술을 너무 많이 드셨어. 시즌 끝나고 결혼한다고 했는데…. 저래도 되나….

“괜찮아요. 얼굴만 봐도 너무 좋네요. 그럼 제가 한 잔 따라드려도 될까요? 술, 술이 어딨죠? 난 돔페가 좋던데…….”

“진호야! 뭐 하냐! 가서 돔인지 옥돔인지 가져와!”

글렀다. 호영 선배한테 심부름꾼 취급을 당하는 진호 선배가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오늘이 끝나고 세상이 망하길 기도해야 하나…….

“어머? 여기 소주가 있네. 위스키보다 맛있는 거 드실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글라스에 얼음을 채우고 회오리를 만들어 소주를 따서 콸콸 붓는다. 그리고는 1:1 비율로 토닉워터를 채워 다른 양주잔에 꽂혀 있던 레몬을 뽑아 쭉 짜준다.

수천, 수만 번은 만들어 본 듯 빠르고 정교한 손놀림. 마지막으로 손목 스냅으로 한 바퀴 돌려 호영 선배한테 먼저 내어주고는 더 빠른 손놀림으로 하나 더 만들어 진호 선배한테도 내어준다.

갑자기 파티장에 나타난 바텐더의 칵테일 쇼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관중들의 시선을 즐기며 예쁜 여자가 타준 술을 원샷하는 두 명의 시음자.

“XX. XX 맛있어.”

“소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술이었어…….”

눈앞에서 극찬을 들은 바텐더가 기분이 좋아져 또다시 글라스에 소주를 콸콸 붓는다. 선배님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루다의 잔을 받아보기 위해 어느새 줄까지 서서 기다리는 선수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루다가 선수들 조련을 시작한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누구?”

“이루다!”

“좋아요! 리그 최고의 슬라이더 아티스트 구경 오빠~ 다음~”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사람은 누구?”

“이루다!”

“좋아요~ 리그 최고의 타이밍 마스터 이문 오빠~ 다음~”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사람은 누구?”

“이루다!”

“좋아요~ 리그 최고의 번티스트 수경 오빠~ 다음~”

미쳤다……. 저 사람들 단체로 미쳤어. 무슨 사이비 종교 부흥회도 아니고……. 저게 뭐 하는 짓이야.

한창 이루다 교주님이 성수를 나눠주고 계시는데 문이 벌컥 열린다.

“여러분~ 누가 왔는지 보세요~ 제로원 레이싱팀 레이싱 모델님들이십니다~”

경기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당당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주장이 들어온다. 주장 뒤로 8등신의 똑같이 생긴 객관적으로 엄청나게 예쁜 여자들이 들어온다.

이 상황에도 여전히 맛깔나게 술을 제조하던 루다가 새로 제조한 소토닉을 경준이에게 건네고는 천천히 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정안 오빠 안녕~”

“아, 안녕… 루다… 루다. 안녕…….”

두 사람이 첫인사를 나누고는 잠시 정적이 흐르며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오빠, 저 언니들이랑 같이 놀게요? 나도 같이 놀면 안 돼요?”

“같이… 놀면… 하… 진짜…….”

주장이 뭔가 눈으로 루다에게 협박, 회유, 애원을 보내보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생긋거리기만 하는 루다.

루다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주장이 뒤에 있는 레이싱 모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나눈다.

주장의 말을 듣는 모델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더니 자기들끼리 웅성웅성 회의를 하고는 루다를 째려보더니 우르르 나간다.

나가는 모델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주장. 어깨가 축 처져서 참담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선수단에게 공지를 한다.

“여러분… 오늘 모신 손님들이 급한 일이 있어서 함께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우리끼리 재미있게 즐기시고… 오늘 함께하시게 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주장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병살을 쳤을 때도 저리지 않았는데…….

“이번에 SBC 스포츠에 신입 아나운서로 활동하게 되실 이루다 아나운서님입니다. 어떻게 같이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랩터스 우승을 축하해 주러 자리를 빛내주셨으니 다들 한 잔씩 드리세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던 주장이 마지막에 다들 한 잔씩 주라는 말만 정확하고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그것보다는 방송국 아나운서라는 말에 선수단에 얼어붙는다. 방금까지 루다가 예쁘다느니 소전이 보다는 자기가 훨씬 낫다느니 찝쩍대던 선수들은 더욱 굳는다.

그리고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루다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수많은 여자가 들락날락했던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방송국 아나운서가 소주병을 돌려 따 한 손에 들고는 입을 연다.

“오빠들~ 오늘은 랩터스 우승해서 축하하러 온 소전이 친구 루다예요~ 오늘 여기서 필름 끊겨서 갈 생각이니까 루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줘요~ 자 다들 원샷~”

어정쩡 술잔을 든 선수들에게 루다가 직접 다가가 짠을 하며 술을 먹인다. 얼떨결에 술을 마신 선수들에게 다시 한번 헛소리를 늘어놓는 루다.

“오빠들~ 예쁜 언니들이 다 사라져서 재미없으시죠? 자, 루다가 따라주는 술 받으면서 5분만 기다려볼까요?”

뭐, 뭐지. 얘 뭐 하는 거야?

방송국 아나운서를 앞에 두고 아까처럼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선수들 입에 술을 들이부으면서 장난을 치는 루다. 그리고 진짜 5분이 지났을 무렵 여전히 괴로운 표정으로 서 있는 주장 뒤의 문이 열린다.

“자~ 루다의 친구들이에요~ 우승 파틴데 눈치 보지 말고 매너 있게 재미있게들 노는 거예요~ 자~ 놀자~”

루다가 클럽 갔다고 보내준 사진에서 봤던 사람들이 잔뜩 몰려왔다. 플래시 터지고 보정 없는 사진들도 엄청나게 보내서 잘 몰랐는데… 실물이 깡패네……. 저 예쁜 사람들이 왜 루다랑 놀아주는 거지?

오늘 파티에 게스트로 와서 어느 순간 호스트가 돼버린 루다가 원맨쇼를 펼치는 동안 구석에서 남들 노는 걸 구경한다.

선배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VVIP 클럽이라는 데를 처음 온 경준이마저 루다에게 잡혀 술을 입에 쏟아붓더니 전위적인 춤사위를 펼치며 노랑머리 언니한테 어필한다.

넌… 그냥 야구나 하자. 그딴 몸부림은 추하다…….

“야, 나와.”

“하… 그래.”

세상이 무너졌던 주장마저 선수단과 함께 광란으로 빠져들 무렵 지금까지 진행과 바텐더를 동시에 맡았던 루다가 나를 밖으로 불러낸다.

“우승할 만하네. 랩터스 선수들 순둥이라더니 다 구라였어.”

“난 모르겠다. 나 이제 구단 생활 어떻게 하냐?”

“왜? 넌 이 누나 때문에 앞으로 예쁨 받으면서 사는 거지”

예쁨은 무슨…….

“너 아나운서는 뭔 얘기냐?”

아까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 못 물어봤던 오늘 가장 궁금한 이야기를 물었다.

괜히 물었다.

묻자마자 날아드는 바디 블로우. 여태 그렇게 뛰어다니고도 무슨 펀치가 이렇게 살아 있어.

“죽고 싶냐?”

“케… 켁… 주… 죽겠다…….”

갑작스러운 펀치에 숨쉬기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루다의 랩이 쏟아진다.

“내가 방송국들 시험 본다고 얘기했냐, 안 했냐? 방송 3사 다 붙었다고 얘기했냐, 안 했냐? 그중에서 SBC가 월급이 제일 많이 줘서 간다고 얘기했냐, 안 했냐!”

그랬냐……. 네가 말이 좀 많냐? 네가 하는 얘기 중에서 선수 분석 말고는 별로 머리에 담아두지 않으니까 나는 잘 모르지…….

“나 잘 때 했냐?”

오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너무 많이 한다.

또다시 날아드는 바디 블로우. 때린 데 또 때리는 건… 반칙이지…….

“너 안 잔다며? 나랑 전화할 때 안 잔다더니, 잔 거지?! 그럴 거면 전화 끊고 자라니까 괜찮다며! 이 XX가 입만 열만 거짓말이야!”

거짓말 안 하게 생겼냐. 나 피곤하다고 잔다고 하면 초저녁부터 잔다고 그렇게 욕을 하면서……. 억울하다.

“어쨌든, 그래서 너 SBC 아나운서라고?”

“그래. 누나가 조기 졸업에 과 수석 하시고는 대학원 가라는 교수님의 간절한 요청을 뒤로하고 취직하셨다! 그런데 넌 그것도 모르고 있어? 죽어라!”

라이트 바디 블로우 두 방이 연속으로 작렬한다. 평소에 복근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에도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운동은 내가 아니라 얘가 했어야 한다.

우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저 정글로 들어가기를 묻는다.

“이제 너 다시 들어가 봐야 하지 않을까? 너 없어졌다고 찾을 텐데?”

“에라. 이 멍청아. 저기 여태 내 눈치 보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하던데 난 사라져 줘야지.”

놀지도 못한다고…. 지금 저기 술 마시고 게임하고 울고 난리도 아닌데?

“그럼 난 들어간다.”

“너? 너 들어가려고?”

“넌 몰라도 난 찾으면 어떡해.”

“미친. 너 없으면 더 좋아하지. 재미도 없는 널 왜 찾아?”

재미가 없다니, 내가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인데.

“내가 가서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인지 보여주겠어!”

내가 그동안 봉인됐던 내 음주가무의 무공을 펼치겠다고 선언하자 루다가 이상야릇한 눈초리를 하고는 나를 보며 입을 연다.

“그래? 그 재미있는 거, 나랑 둘이 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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