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교육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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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랑 일주일인데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경준이랑 둘이서만 훈련을 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신인 선수들 방과 후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이런다고 연봉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어린애들이 와서 뭐라도 하나 더 배워보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안 가르쳐줄 수도 없고…….
전에는 나 같은 쩌리 선수한테 다가오는 후배가 없어서 몰랐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게 된다.
“형, 저도 금방 올라갈게요.”
“올라올 생각하지 말고 네 친구한테 먹히지나 마.”
“헤헷. 형. 죽어라 해서 갈게요.”
결전의 날이 왔고, 사기꾼들을 잡을 시간이다. 짧은 이천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잠실로 올라간다. 조금씩 삐걱거리던 몸 상태도 완벽하고 어제 프리 배팅하면서 타격감도 끌어올렸다.
오늘 재미있는 거 많이 보여줄게. 주작범들아.
- 잠실에서 랩터스와 폭스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 랩터스에게 오늘 경기는 매우 중요하죠. 소닉스와 한 경기 차로 2등이거든요. 지면 안 됩니다.
- 김소전 선수가 불미스러운 일로 엔트리 제외된 상황에서 소닉스와 경기 차를 줄인 랩터스입니다.
- 최근 소닉스도 경기력이 안 좋았어요. 그 와중에 랩터스가 계속 한 점 차 승리를 이어 가면서 승차를 줄였거든요. 전력 소모가 많았지만 그래도 이겨내야 합니다.
- 선수단이 지쳐 있는 가운데 김소전 선수가 출장 정지 징계를 소화하고 엔트리에 등록됐습니다.
- 만나서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어요. 알려진 바로는 노경준 선수하고 다툼이 있었다고 하고 KBO에서도 상벌위가 열릴 예정이라고는 하는데 밝혀진 게 별로 없어요
- 숨기는 게 능사가 아닐 텐데요. 랩터스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경기장에 들어오니 일주일 만에 확 늙어버린 선배들이 따뜻하게 반겨준다. 사유는 정확하지 않아도 2군에서 내가 경준이랑도 잘 지내고 경준이 친구들하고도 잘 지냈다는 이야기가 돌아서 그런지 크게 뭐라 하는 선배들도 없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선수단에 녹아든다.
경기 시작 직전, 감독님하고 잠깐의 면담을 하고 시합에 들어간다. 면담이라 봐야 서로 얼굴 보고 오늘 작전에 관해서 확인만 했을 뿐 서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
우리는 준비가 끝났다. 이제 적을 잡으러 갈 시간이다.
- 1회 초, 폭스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마운드에 이번 시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시윤이 올라왔습니다.
- 지난 한국 시리즈에서 팀을 우승시키고 메이저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이시윤이거든요. 이번 시즌 모습만 보면 메이저도 때려잡을 듯한 모습이에요
- 시즌 17승 무패. 평균 자책점 2.01입니다. 20승을 정조준하고 있는 이시윤입니다.
- 오늘 경기 포함해서 5, 6경기 정도 더 나올 그것으로 보이거든요. 20승은 충분해 보이고 탈삼진 200개와 1점대 평균 자책점이 가능한가가 관건이에요
오랜만에 중견수로 들어와 마운드의 투수를 바라보니 이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다. 투수라는 동물의 모습을 그대로 뿜어내는 오늘의 선발 투수가 언제나처럼 제멋에 빠져서 초구부터 한가운데 직구를 꽂아 넣는다.
- 초구 한가운데 들어가는 직구. 구속 155킬로미터가 찍힙니다.
- 오늘 기합이 꽉 들어갔네요. 저런 공은 무슨 수로 칠까요? 현역 때 저 선수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미쳤어. 아무리 오늘 토 사장님들이 주작 경기를 하는 걸 선발 투수가 확실히 알고 있고 처음 두 타자에게 무조건 볼넷은 주지 않기로 계획이 되어 있지만 무슨 한국 시리즈 마지막 공 던지듯이 던지고 있어.
- 초구를 지켜만 본 타자, 타석을 잠시 벗어납니다.
- 저라도 잠깐 나갔을 것 같아요. 무시무시하네요.
폭스의 타자도 조작에 가담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자가 확실히 당황한 게 느껴진다. 조작이 아니어도 저런 공을 보면 당황스럽지.
- 3구. 스트라이크 아웃! 한가운데 꽂히는 157짜리 직구로 선두 타자를 돌려세우는 이시윤! 원 아웃입니다!
- 이한승 선수, 공 세 개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어요. 폭스 오늘 재앙이 닥쳤습니다.
옛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야구는 투수 놀음. 투수가 공을 저따위로 던지면 타자가 어떻게 치냐. 제구도 없이 한가운데 통나무를 때려 박는 건 반칙 아니야?
진짜……. 내가 랩터스라 저 공을 상대 안 하는 게 천만다행이다. 타석에서 저딴 공 보면 트라우마 생길 것 같아.
- 루킹 삼진! 두 타자 연속으로 삼진을 뽑아내는 이시윤!
- 오늘 화나는 일이 있나요? 1회부터 전력투구를 하고 있어요. 이건 폭스가 이시윤 선수한테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데요. 오늘 타자들 쉽지 않아요.
이번 시즌 우승하면 메이저 간다고 했지? 진짜 가긴 가야겠다. 이건 뭐… 생태계 파괴 수준이지. 어린애 팔 비트는 것도 아니고, 이건 상대가 안 되잖아.
저렇게 몇 개까지 던질 수 있지? 저런 식으로 100구를 던지면 진짜 미국 가서도 에이스 하겠는데.
- 3번 타자 김인경입니다.
- 상대 투수가 너무 좋거든요. 이럴 때 베테랑이 한번 분위기를 바꿔줄 필요가 있어요.
- 어떻게 바꿔줄 수 있을까요?
- 글쎄요. 이시윤 선수 공을 보면… 방법이 없어 보이긴 하네요.
김인경 선배가 타석에 들어섰다. 국대 우익수. 한때는 메이저 포스팅도 노렸던 홈런 타자가 배트를 짧게 쥔다. 김인경이 컨택에 집중할 정도면 오늘 이시윤 공은 건드리기도 쉽지 않다는 말이다.
- 파울! 뒷그물로 넘어가는 파울입니다.
- 오늘 처음으로 공을 맞혔어요.
- 이시윤, 웃네요.
- 한국 시리즈인가요? 이시윤 선수, 뒤가 없는 투구를 하고 있어요.
저딴 공을 던지는 투수 놈이나 저 공을 기어이 컨택 해내는 타자 놈이나. 미친것들…….
저런 승부는 바라보기만 해도 배우는 게 많다. 야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장난질하는 XXX들은 도대체 누구야!
- 또다시 뒷그물로 날아가는 파울. 3구 파울입니다.
- 밀려요. 타자가 한복판 직구를 알고 치는데도 밀리네요. 이시윤 선수 신인 때 보는 것 같아요. 힘으로 다 때려 부수고 싶어 하는 게 보여요.
투수라는 것들은 이해하면 안 되지만 이건 도가 좀 지나치잖아. 첫 두 타자 볼넷 주지 말고 1회에 5점 이상 점수 주지 말라고 했지, 한복판 직구만 꽂아 넣으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미쳤어.
- 4구, 쳤습니다. 빗맞은 타구. 중견수 앞으로 떴습니다.
타자가 배트를 더 짧게 잡고 타석에 들어선다. 포수와 사인 교환조차 하지 않는 투수가 심판이 던져주는 공을 잡자마자 투구를 시작한다.
또다시 한복판에 때려 박는 직구. 배트 절반만 잡은 타자가 번개 같은 스윙을 돌린다.
계속되는 직구에 스피드는 적응하면서 타이밍은 맞췄지만, 살아오는 공을 끝까지는 어찌 적응할 수 없던 타자가 공의 밑동을 때린다.
애매하게 맞은 공이 애매하게 떠서 애매한 위치로 떨어진다.
전형적인 텍사스 히트가 되는 타구. 타구가 뜨는 모습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문다.
- 중견수. 중견수 김소전! 김소전 잡아냅니다. 오늘 폭스 타자들, 악몽 같은 1회입니다.
- 김인경이 저 공을 때린 것도 신기한데 저 타구를 잡은 건 서커스에요. 수비하면서 슬라이딩하기 정말 어려운 게 앞으로 달려들면서 하는 거거든요. 저 슬라이딩 명품이네요.
오랜만에 하는 외야 수비. 외야에 나와 첫 타구부터 내 시그니처 수비를 성공시키고 나니 한동안 안 했던 외야 수비 본능이 확 살아난다. 할 만한데. 오늘 센터로 날아오는 건 다잡아준다.
1회 초 마지막 타구를 잡고 덕아웃으로 달려가는데 1루 라인에서 그 도도한 선발 투수가 날 기다렸다 궁디를 팡 쳐주고는 불펜으로 사라진다.
살살 때리지……. 겁나 아프네.
- 1회 말, 랩터스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석에 1회 초 좋은 수비를 보여준 김소전입니다.
- 일주일 만에 들어오는 김소전 선수죠. 후배와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구단 자체 징계를 받았다고 발표는 되었지만, 자세한 사항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고 있어요.
- 팬들도 답답해하고 있습니다만 구단에서는 정확한 이유 없이 6경기 징계를 내렸습니다. 선수도 언론과의 인터뷰도 거부하고 말을 안 합니다. 우려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 프로 선수가 팬들의 사랑으로 존재하거든요. 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은 속 시원히 밝혀줄 필요가 있어요. 답답해하는 팬들. 특히 김소전 선수 팬들이 답답해하고 있어요
아무리 라이브 배팅 연습을 실전같이 해도 실전에서 투수를 바라보는 것과 비교를 할 수가 없다. 타석에 들어가 나보다 높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투수를 보면서 심호흡을 크게 해본다.
- 초구 볼. 많이 빠집니다.
- 갠딜 선수,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네요.
제구가 딱히 뛰어난 투수는 아니지만 이 정도로 날리는 공을 던지는 투수는 아닌데… 1회를 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 2구, 3구 연속으로 볼이 들어옵니다.
- 안 좋아요. 공이 너무 많이 빠지네요.
이거 너무 티 나잖아. 좀 적당히 해야지.
- 4구. 어이없는 공에 헛스윙하는 타자.
- 이거… 왜 이러죠. 많이 빠지는 공에 타자가 반응했어요. 김소전, 수비할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타격감은 많이 떨어졌나요.
첫 타석 볼넷이라고 했으니 절대 공을 흘려보내 줄 수는 없지. 몸도 풀 겸 눈감고 냅다 휘둘렀다.
“뭐 하냐?”
“일주일 만에 나왔는데 걸어나가기는 미안해서요.”
“뭐? 걸어 안 나가면 어쩌려고? 삼진이라도 당하게?”
주전 포수는 어디 가고 2군에서나 보던 백업 포수님이 올라오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래.
“쳐야지요. 들어만 오면 넘길 만한 후진 공인데 쳐야지요.”
“뭐 인마!”
뭘 열을 내고 그래.
이 정도 긁었으면 반응이 오겠지? 너도 쟤랑 같은 쪽인지 보자.
“가운데 하나 주세요. 넘겨버리게.”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포수가 사인을 낼 생각은 안 하고 나를 노려본다.
나도 같이 포수를 바라보는데 주심이 한마디 한다.
“둘 다 그만하고 플레이볼~”
그러면서 투수를 가리키며 경기 진행을 하는 주심. 어쩐 일로 운영 잘하시네.
내 스윙에 당황한 듯한 투수가 다시 투구 폼을 가다듬고 큰 폼으로 공을 던진다. 또다시 바깥쪽 높게 빠져나가는 공.
칫. 이건 못 치는 공이네.
- 스윙. 김소전 또다시 스윙. 어이없는 공에 스윙하는 김소전입니다.
- 이거 이상해요. 이상합니다. 정상적이지가 않아요. 투수와 타자 둘 다 정상이 아닙니다.
홈팀 팬, 원정팀 팬 할 거 없이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포수가 타임을 부르고는 마운드로 향한다.
타석에서 잠깐 벗어나 대기타석으로 발걸음을 옮겨 타르 스틱을 쓱쓱 문지르는데 다음 타자인 주장 라정안 선배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뭐 하냐?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해.”
제대로 하려고 하는 겁니다.
“네.”
대답은 크게 하고 다시 타석으로 들어가자 투수와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포수가 다시 갈군다.
“적당히 해라. 맞춘다는 거 간신히 말렸다.”
“가운데 주세요. 전 치고 나갈 겁니다.”
“아, 진짜 미치겠네. 가운데 던지래도 못 던지는데 어쩌라고!”
포수의 목소리에 한이 맺힌 거 보니 진짜인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난 치고 나간다.
- 김소전 6구 맞습니다.
- …….
- 6구. 갠딜 와인드업. 6구 타격! 3루 베이스를 타고 넘어가는 타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날아간 타구. 김소전 달립니다~
- 시프트가 걸려 있는데 반대쪽으로 날아갔어요. 외야수들까지 우측으로 당겨놨는데 힘없는 타구가 좌측으로 떨어지네요
- 김소전 벌써 2루 돌아 3루를 향합니다. 이제야 좌익수 공 잡아듭니다. 김소전 3루를 향해 달리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습니다!
직구나 던질 것이지. 저 조작범 XX가 바깥쪽 공 세 개는 빠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안 맞아도 좋다는 생각으로 팔을 최대한 펴면서 돌리는 풀스윙. 힘도 실리지 않은 타구가 3루 선상을 타고 날아가다 3루 베이스를 살짝 넘어 라인 안쪽에 떨어진다.
인플레이 타구를 쳤으면 고민할 게 뭐가 있나. 일주일 동안 전력 질주한 적이 없으니 오늘 각 잡고 발에 모터를 달아본다. 타구가 날아가는 방향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으니 최소 3루까지는 달린다.
타격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글러브를 내팽개치는 투수의 모습을 보니 몸도 마음도 가볍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2루를 밟고 3루를 향한다.
3루를 보고 달리는데 보이는 3루 주루 코치. 보든 안 보든 항상 크게 팔을 돌리는 선풍기 코치지만 오늘의 선풍기는 강풍이다. 마음 같아서는 타구를 보면서 뛰고 싶지만 저 정도 강풍이면 발걸음을 늦추는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공을 보지도 않고 홈까지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들어 올리는 팔을 더 크게 들어 올린다.
팔이 올라가는 만큼 더 크게 올라오는 허벅지. 대퇴부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지만 내가 이럴 때 쓸려고 힙업에 신경을 쓴 거다.
- 김소전 3루를 크게 돕니다. 폭스의 중계 플레이. 유격수가 멀리까지 나가 공을 연결합니다.
3루의 선풍기를 지나 홈으로 달린다. 27미터 밖의 주장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달린다. 홈플레이트를 바라보며 주장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을 때 주장이 천천히 들어오라는 사인을 낸다.
이 정도면 충분하구나.
마지막에 속도를 줄이면 가볍게 홈플레이트를 밟고는 투수를 바라봤다.
글러브는 땅바닥에 처박아놓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투수.
세상 사는 게 다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가 한국 영화에 박살 나는 거 확실히 보여줄게.